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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년, 지금 여기의 마녀사냥.
    mc 워너비 | 2015-02-22 | 10,499 Reads | 0 Thumb Up

    설 연휴에 시간이 나서 소일 삼아 잡상을 끼적였는데, 그대로 썩히기도 아깝고(?) 리드머 자게에 공유합니다. 음악과 관련된 주제의 글은 아니지만, 관심있는 분들은 읽어보시길. 





    1.

    마녀 사냥은 중세에 시작해 근세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 유럽 전역을 휩쓴 종교 재판이다. 악마와 계약을 맺고 기기한 마술을 부리는 마녀를 색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기독교 신앙을 더럽히고 공동체 안녕을 위협한다는 죄목으로, 주로 독거하는 부유한 과부가 심판에 회부되었다. 이들에게는 자신을 보호해 줄 성인 남성, 반려자나 동거자가 없었을 것이다. 이들의 재산은 심문과 재판, 처형 비용을 충당하는데 쓰였고, 나머지는 전액 몰수당했다.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영국 본토와 북미 식민지,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동유럽과 남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걸쳐 종교적 광기에 학살당한 ‘마녀’의 수급은 20만에서 50만에 달한다.

    마녀를 가려내는 심문 수단은 네 가지다. 마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 속설에 입각한 눈물 시험. 바늘로 피부를 찔러 피를 흘리는지 확인하는 바늘 시험. 불에 달군 쇠로 지져 살이 타는지 지켜보는 불 시험. 마지막, 물 시험이다. 이 심문들은 혐의의 진실 됨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가혹한 고문으로 마녀라는 자백을 받아내고, 확정된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목적이다. 저 가운데 물 시험은 마녀 재판의 작위적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생각건대, 마녀 사냥의 근본 원리는 '징후'를 통해 '정체성'을 식별하고 솎아내는 것이다. 누군가를 마녀라 지목하고 재판에 회부한다. 용의자 손발을 묶고 자일을 엮어 깊은 물에 빠트린다. 그녀의 몸뚱이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이단의 징후가 발생하면 마녀라는 증거다. 따라서 화형에 처한다. 진실이 무엇이건, 어떤 경우에도 마녀는 공동체에서 배제된다. 떠오르지 않는다면, 익사해 사라 질 테니까.

    모든 현대판 마녀 사냥 또한 징후의 포착과 정체성의 낙인, 말살에 의한 오인의 정당화(또는 말살을 위한 오인)이란 3단계 순환 도식으로 진행된다. 북한이 연방제 통일을 주장하는데, 남한의 누군가가 단계적 평화 통일 노선에 동의한다. 그러면 '종북'이란 딱지를 붙인다. 사실은 그가 김씨 왕조를 추종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의 정치적 입지와 사회적 이름은 벌써 오염됐으니까. 일베 게시판에 '민주화' 버튼이 달려있는데, 아이돌 가수 전효성이 라디오 방송에서 민주화란 말을 뱉는 실수를 한다. 그러면 '일베돌'이라 확정하고 분노의 돌팔매질을 거행한다. 정말로 일베에 가입했는지는 인터넷 브라우저 사용 기록을 털지 않고는 알 수 없다. 아무래도 좋다. 그녀는 이미 '퇴출' 당했으니까.

    2.

    2014년 12월 30일, 페이스북 페이지 ‘유머저장소’에 하나의 동영상이 게시된다. 지하철역에서 남성 두 명이 몸싸움을 벌인다. 하나는 장년으로 보이며 하나는 나이가 어려 보인다. 장년 남성은 어린 남성을 우악스런 완력으로 제압하고 경찰서에 신고 전화를 건다. 게시글에는 "둘이 지하철역에서 어깨를 부딪혔는데 고등학생이 '눈깔 똑바로 뜨고 다녀 XX아' 라고 말해서 벌어진 사태라네요"라는 설명이 달렸다. 누리꾼들은 어린 남성의 ‘싸가지’를 욕하며 장년 남성의 침착함을 추어올렸다. 동영상은 인터넷 사랑방 곳곳에 옮아갔고, “버릇없는 ‘고딩’을 제압하는 ‘아저씨’의 위엄”같은 ‘어른의 서사’로 승화하며 소비되기도 했다. 동영상에는 왜 시비가 일었는지, 어떻게 다툼으로 전개됐는지, 누가 잘못을 했는지 알려주는 어떠한 정보도 없었다. 그러나 중요할까? “싹퉁 머리없는 요즘 애새끼들”이라는 선결 확정된 ‘마녀’의 이미지를 향해 통쾌한 성토의 봇물은 터져나갔으니까.

    12월 31일, 사건 당사자와 경찰이 언론을 통해 사건의 진상을 알린다. ‘어린 남성’은 고등학생도 아니었고, 결혼까지 한 성인이었다. 상호 시비로 인한 다툼이었으며, 장년 남성이 ‘어린 남성’ 뒤통수를 치며 드잡이 질이 개시됐다. 누리꾼은 멋쩍게 웃었지만, “xx남, xx녀 동영상‘ 사건은 재연될 것이다. 여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왜냐하면 익명의 개체가 눌러 붙은 무정형의 군중은 책임을 지지 않으며, 집단 가학의 짜릿한 손맛은 아무리 맛봐도 허기지니까.

    지난 2015년 2월 15일에는 이재명 성남 시장이 자신의 페이스북 공식 페이지에서,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을 쓴 박유하 세종대 교수를 ‘저격’했다. <제국의 위안부>는 일제 강점기 일본군 전선에 동원된 조선인 위안부 성격 규정에 관해 논쟁적 주장을 던진 문제작이다. 박유하 교수는 위안부가 일본 제국이 저지른 직접적 범죄가 아니며 민간 브로커에 의한 인신매매에 가깝다 주장한다. 우리는 저 문제적 저작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반대하거나 찬성할 수 있다. 실제로 <제국의 위안부>는 그 선구적 문제의식에 동의하는 서평가들에게도 균형 감각이 결여돼있다 비판 받았다. 그러나 이재명 시장은 합리적 어조로 입장을 드러내기보다, 선정적 어투로 정의감을 전시했다. “이 여자.. 아직도 교수직 유지하고 있는가요? 어쩌다 이런 사람과 하나의 하늘아래서 숨쉬게 되었을까..ㅠ 청산해야할 친일의 잔재들..”

    아마도 이재명 시장은 <제국의 위안부>를 읽어보지 않았다. 책은 읽어보고 비난하냐는 일부 누리꾼 항의에 “서울 안 가 봤으면 "전차가 타이어로 달린다"는 말에 반박하지마라?”고 대꾸한 것을 보면 그렇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박 교수가 ‘친일의 잔재’라 확신하며, 저술의 대가로 교수직을 그만둬야한다 과감하게 제창하는 것일까? 아무튼 책에 실린 정확한 논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군중의 가슴엔 불현듯 성난 불길이 활활 타올랐으니까.

    이 시장은 <제국의 위안부> 전체 내용이 아니라 ‘일부 표현’에 이의 제기한 것이라 상관없다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왜 “청산해야할 친일의 잔재”라 박 교수 ‘정체성’을 규정짓고, 같은 하늘 아래 숨 쉴 수 없다는 ‘전면적’ 단죄를 행했을까. 학술 결과물에 부분적으로 이견을 표하는 방법이 정말로 그것 밖에 없었을까?

    해당 포스팅에는 무려 7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절대다수가 박 교수를 향한 원색적 비방, 모욕, ‘이년’ ‘저년’ ‘일베’ ‘쪽바리’ ‘쓰레기’ ‘매국노’를 넘어 차마 지면에 옮길 수 없는 ‘쌍욕’으로 점철돼있다. 이 시장은 2월 18일까지 재차 6개의 박 교수 비판 포스팅을 게시했다. 사안은 17일 서울동부지법의 가처분금지신청 일부인용 판결과 어울려서 일렁였다. 아마도 이 시장은 당파적 지지자들에게 결연한 민족정기로 ‘친일 독재’를 질타하는 '깨어있는 시장'이라 신뢰를 다질 것이다. 또한 뜨거운 사회 쟁점 위로 목청껏 존재감을 드리웠다. 이 모든 사태는 이재명 시장이 최초의 포스팅 업로드 버튼을 누를 때 예고된 것이다.

    3.

    역사적 마녀 사냥은 십자군원정 실패와 13세기 태동한 화폐경제에 따라 중세적 질서가 위협받자, 그를 극복하기 위해 이단 신앙에 공격을 가하며 전개되었다. 공동체의 균열에 동요하던 피지배 구성원들 불만을 증오로 전치하는 희생양으로 마녀가 지목되었다. 위험한 타자를 솎아냄으로써 공동체의 안녕을 수복하는 환상이 신민을 위무하였다. 마녀의 몸을 불사르는 화형식의 아찔한 스펙타클은 당대 대중이 열광하는 최고의 엔터테이먼트였다.

    마녀 사냥은 낙인과 배제의 무한한 연쇄작용을 일으킨다. 그러나 아무리 뿌리 뽑고 몰아내도 마녀는 결코 공동체에서 소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냥의 제의를 주관하는 '힘'을 얻기 위해 사냥감을 만들어내는 것이 이 이념적 살풀이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종종 눈 먼 열정에 들뜬 군중을 충동질하거나, 군중의 손에 의해 스스로 집행된다. 공동체 바깥의 야만과 폭력, 적대와 내통하는 공동체 안 편의 얼룩을 닦아내려는 공포와 강박에 탯줄을 댄 열정이다. 불의를 심판한다는 정의로운 명분 아래, 군중은 거리낌없이 불의를 휘두른다. 종국에는 다수의 편에 서서 외로운 사냥감의 생사여탈을 결정짓는 힘의 스펙타클에 도취할 것이다. 마녀 사냥은, 지배적 체제와 다수결 도덕원리가 마련한, 일탈에의 충동과 부정한 정념을 해소하는 도덕적 해방구다.

    2013년 개봉한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의 <더 헌트>는 작은 단위 공동체가 어떻게 개인을 철저하게 소외하고 파괴하는지 집요하게 응시한 역작이다. 주인공 루카스는 친구 딸 클라라를 성추행했다 누명을 쓴다. 의심과 미움은 삽시간에 마을 전체로 번진다. 루카스는 잔혹한 따돌림에 처절하게 쫓긴다. <더 헌트>를 가장 의미심장하게 독해하는 방법은 장면과 장면 사이 공백, 영화에 등장하는 일단의 ‘점프 컷’에 주목하는 것이다. (자세한 독해 방법론은 졸고를 참조하시길 : http://blog.naver.com/yke0123/40193678994) 즉, 영화는 자신이 본 것만큼 보여주지 않았고, 관객은 본 것만큼 보지 않은 것이 있다. 만약에, 루카스가 클라라를 추행한 것이 사실이라면 어찌할 텐가? 단지, 영화가 ‘보여주지’ 않았을 뿐이라면?

    이러한 도전적 해석은 현대판 마녀 사냥에 관해 보다 근본적인 숙고를 밀어붙이는 길을 터준다. 그의 진정한 실체가 가련한 희생양이 아니라 정말로 용서받지 못할 ‘마녀’라고 하자. 사적 심판과 사적 처벌, 군중의 조리돌림이 공적 판결을 대신할 수 있는가? 루카스의 삶이 망가져 갈수록 주민들은 괴물이 된다. 아무리 정의로운 사냥이라 해도 사냥은 결국 야만이다. 우리가 경계할 것은 죄 없는 자를 핍박하는 눈먼 광기만이 아니다. 사냥터에 도열해 죄지은 자를 솎아내며 공동체의 결속에 가담하고 다수의 전능함을 고양하는 ‘-1’의 ‘깨어있는 진실’이다. 군중은 분노와 유대감을 원한다. 당신도 언젠가 ‘우리’에서 열외 되지 않는다고 과연 누가 보증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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