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ll] 2011년의 앨범들 (1)
- euronymous | 2011-12-26 | 16,730 Reads | 5 Thumb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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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풀이로 적어 보는 '2011년의 앨범들'입니다.
쭉 보시면, 음악 듣는 제 입맛을 대강 파악하실 수가 있을 겁니다.
사실 이런 거 쓰는 재미는 앨범과 관련해 짤막하게 제 느낌을 적는 것에 있지요.
지금도 그 재미를 기대하며 쓰고 있습니다.
국내외 각각 25장씩 골랐고,
'반가웠던 앨범들'이라는 이름으로 특별히 20장을 따로 추렸습니다.
다 뻔한 앨범들이긴 하지만... 그래도 연말이니 이런 진부한 목록도 너그럽게 보아 주시리라 믿습니다.
첫 번째는 국외 편입니다. 순서는 앨범의 가치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The Roots - Undun
류현진 투수는 7이닝 2실점만 하고 내려가도 컨디션이 안 좋았다는 소리를 듣는다. 루츠도 마찬가지다. 워낙 잘하는 인간들이니 매번 놀라운 앨범을 들고 나오긴 하지만 언젠가부터 무덤덤해지기 시작했다. 사실 그게 루츠라는 집단의 가장 무시무시한 점이긴 하다. 도대체 이들의 아이디어는 언제 바닥날 것인가?
Evidence - Cats & Dogs
화려하지 않은데도 멋진 게 아니라 화려하지 않아서 더 멋지다. DJ Premier가 없었다고 해도 이 앨범은 충분히 들을 만했을 것이다. 껄렁껄렁 느릿느릿 여유 부리며 다니지만 알고 보면 할 건 다 하는 우등생의 성적표 같은 앨범. 에비던스 이 형님도 참 대단한 형님이다.
Destroyer - Kaputt
좋은 멜로디 만들 줄 아는 인디 밴드로만 남을 줄 알았는데 새 앨범으로 전혀 다른 각을 잡고 나왔다. 원래 연초에 나온 앨범은 연말쯤 되면 질리기 마련인데 이 앨범은 아직도 들을 때마다 새로운 감동을 준다. 좋은 멜로디와 좋은 무드를 동시에 원하는 리스너들을 위한 최상의 선물.
Shabazz Palaces - Black Up
음악 듣고서 놀랐고, 오래 전 Digable Planets를 이끌던 Butterfly가 이 집단에 소속돼 있다는 걸 알고 또 놀랐으며, 발매 레이블이 다름 아닌 Sub Pop이라는 걸 알고 세 번째로 놀랐다. (서브팝은 Nirvana와 Soundgarden이 데뷔 시절에 둥지를 틀었던 시애틀의 언더그라운드 레이블.) EL-P와 J Dilla가 과거에 이미 수차례 보여주었듯 랩 뮤직의 표현 방식은 아직도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나는 이 앨범 덕분에 새삼 되새겨 볼 수 있었다.
Youth Lagoon - The Year Of Hibernation
소리는 들리는데 듣고 나면 왠지 아무것도 없었던 것만 같다. 소리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소리의 울림(혹은 떨림?)을 전하는 것이 목적인 앨범이 아닐까? 여백이 가득한 음악이다 보니 음악 속에 먼 기억 같은 것들이 저절로 찾아와 깃든다. 술 마시며 듣는 것보다 맨 정신으로 듣는 게 더 좋은 드문 앨범.
Mic Stylz - It's About Time
생각해 보면, 90년대엔 무겁고 거친 하드코어 먹통 힙합 뮤직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시무시한 형님들의 압도적인 랩과 비트 말고도 좀 더 어깨에 힘을 빼고 힙합 본연의 흥겨운 그루브와 후리한 라이밍에 충실했던 앨범들이 또 얼마나 많았나! 90년대의 향수라는 점에선 작년의 Celph Titled & Buckwild를 떠올리게 하지만 랩과 비트를 버무리는 방식은 분명 다르다. 올해의 숨은 진주 같은 앨범이라 하고 싶다.
Thundercat - The Golden Age of Apocalypse
내가 꼽는 2011년 최고의 앨범. 必聽. 이상 끝.
Blu - NoYork
2011년 최고의 핵폭탄. 가리온이 한국 힙합의 최전선이라면, 이 앨범은 미국 언더그라운드 씬의 최전선이라 할 만하다. 빠져드느냐 혐오하느냐, 둘 중 하나.
Tom Waits - Bad As Me
내가 워낙에 탐 웨이츠의 팬이다 보니 딱히 할 말은 없고... 이번 앨범도 역시 탐 웨이츠 그 자체다. 그 누가 이렇게 노래하고 연주할 수 있을까? 부디 잔병치레 없이 장수하시기를 빌 뿐이다. 썬더캣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이 앨범을 올해 최고의 앨범으로 꼽았을 것이다.
The Stepkids - The Stepkids
앨범 나오기 전부터 화제였고, 앨범이 나온 뒤에도 지금껏 화제가 되고 있는 문제의 밴드. 이렇게 옛 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할 줄 아는 온고지신의 뮤지션을 만날 때마다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체 뭘 듣고 자라면 이런 음악을 만들 수 있을지? 난 이 친구들이 Maroon 5 만큼이나 떴으면 좋겠다.
Madlib - Medicine Show No.9 : featuring Frank Nitti
힙합계의 호메로스 매드립의 12장짜리 대서사시 Medicine Show, 그 아홉 번째 조각이자 Frank N Dank의 Frank Nitti과 함께 한 콜라보레이션 앨범. 사실 Medicine Show 시리즈는 어느 한 장만 따로 언급해서는 안 된다. 모자이크든 콜라주든 그 일부만으로 작품을 평가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이 앨범은 최고다.
Fucked Up - David Comes to Life
올해 여름은 이 앨범 덕분에 시원하게 보냈다. 물론 무작정 무식하게 질주하기만 하는 앨범은 아니다. 곡마다 구성을 어떻게 짜야할지 꼼꼼하게 고민하며 골치를 썩였을 밴드 멤버들의 모습이 앨범을 듣다 보면 자연스레 떠오른다. 참 헤비하면서도 영리한 앨범.
Danny Brown - XXX
힙합 앨범 자켓 치고는 참 심심하다 싶었는데 내용물은 장난이 아니었다. Tyler의 데뷔작보다도 내겐 더 충격적이었던 앨범. 이 앨범 그냥 지나치면 올해의 가장 신선한 달걀 노른자를 안 먹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
Battles - Gloss Drop
이 앨범에 대해 뭐라 언급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썼다 지웠다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대 밴드들이 하지 않는 방식으로 기타와 베이스와 드럼을 연주한다. 그뿐이다. 나는 Battles라는 이름이 박힌 CD는 앞뒤 가리지 않고 다 산다.
DJ Quik - Book of David
Dre가 전세계 힙합팬들을 농락하며 주춤거리는 동안 퀵이 이런 앨범을 들고 나왔다. 원래 옛날부터 한가닥 하는 형님이었지만 이번 앨범을 통해 어느새 Dre와 비슷한 경지에 올라서 버린 것 같다. 아니, 이미 퀵은 Dre를 추월했을지도? 이 앨범보다 더 잘 만들 자신이 없으면 Dre는 Detox 따위 그만 집어치우는 게 낫다.
DJ Bobo James a.k.a Dev Large - OOPARTS(LOST 10 YEARS ブッダの遺産)
일본 힙합계의 큰형님 Dev Large가 오랜만에 낸 정규 앨범. Muro나 Dev Large 같은 형님들을 보면 '재즈 힙합'이니 '멜로우 힙합'이니 하는 일본식 흐름에서 멀찍이 비켜 서 있는 듯한데 그건 역시 DJ들의 본업인 diggin'의 힘이 아닐까 싶다. 힙합은 비트와 샘플링의 기계적인 조립이 아니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새삼 일깨워 주었던 앨범.
Neon Indian - Era Extrana
Alan Palomo라는 친구는 과연 제정신으로 이 앨범을 만들었을까? 80년대를 주름 잡았던 신스팝 뮤지션들이 이 앨범을 듣게 된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에이~ 우린 이 정도로 약에 쩔지는 않았다고!" 이런 앨범은 맨정신으로 들으면 재미 하나도 없다.
M.E.D - Classic
Stones Throw에서 기대할 수 있는 딱 그만큼의 음악들이 담겨진 앨범. Stones Throw의 '그만큼'에 언제나 만족하곤 하는 내겐 좋은 선물이었지만 '그만큼'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에겐 그냥 스쳐 지나가는 앨범이 될 수도 있겠다. 매드립도 매드립이지만 Oh No가 정말 멋졌던 앨범.
Declaime - Self Study
알게 모르게 디스코그래피가 꽤나 많이 쌓인 디클레임의 부부 듀엣(?) 앨범. 디클레임의 아내인 Georgia Anne Muldrow가 곡을 만들고 디클레임이 랩을 했다. '듣보잡' 둘이 뭉쳐서 그런지 앨범 역시 '듣보잡'의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만... 이 앨범 놓치고 새해를 맞이하다간 정말 큰일 난다. 디클레임은 둘째 치더라도 난 Georgia Anne Muldrow 이 여자가 좀 많이 주목 받았으면 좋겠다.
Benny Tones - Chrysalis
그래도 아직은 BBE다. 이런 앨범들을 일 년에 두어 장씩이라도 발매해 주는 게 어디냐! 작년의 괴물 신인 Electric Wire Hustle에 이은 BBE의 또 다른 야심작.
We Made God - It's Getting Colder
해외 웹진에선 이들의 음악을 Sigur Ros + Deftones로 표현하던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더라. 한없이 질질 끄는 듯한 Post Rock에 싫증이 났다면, 동시에 뭔가 새롭고도 헤비한 기타 사운드를 찾고 있다면, 이 앨범이 제격이다.
Dirty Beaches - Badlands
내가 들어본 올해 앨범들 중 두 번째로 황당했던 앨범이다. 도대체 이건... 지독한 잡음과 노이즈 속에서 천연덕스럽게 흘러나오는 올드 팝송의 멜로디라니! 그런데 어느새 이 앨범을 되풀이해서 듣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서 나는 내가 혹시 음악적 변태가 아닐까 잠깐 생각했었다.
Liturgy - Aesthethica
내가 올해 들은 앨범들 중 가장 황당했던 앨범. 아, 진짜 도대체 이건 정말... 음악도 음악이었지만 이런 음악이 Thrill Jockey 레이블에서 발매되었다는 사실은 완전 코메디였다. 그 옛날의 헤비메탈이 시간이 흐르고 흘러 결국 여기까지 온 게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Post Metal이란 것이 평범한 헤비메탈과 뭐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한 사람은 일단 이 앨범부터 들어보기 바란다. 말은 길었다만... 요 몇 년 사이에 들었던 메탈 앨범들 중 개인적으로 가장 황홀했다.
Elzhi - Elmatic
Slum Village의 멤버 엘지의 Illmatic 헌정 앨범. 원래는 인터넷에 무료로 뿌려졌는데 나중에 CD로 나오면서 자켓도 바뀌었다. Illmatic에 수록된 클래식들을 엘지가 라이브 밴드와 함께 자기 식대로 소화해 낸다. '나는 랩퍼다' 같은 경연 프로그램이 혹시라도 생긴다면 이런 앨범이 아주 좋은 사례가 될 듯. 단순한 리메이크 앨범이 아니라 엘지의 정규 작업물이라 해도 될 정도로 랩도 연주도 집중도도 상당하다.
Betty Wright & The Roots - Betty Wright The Movie
많은 이들이 Undun에 열광하고 있을 때 내 관심은 오히려 이 앨범에 쏠렸다. 루츠를 백밴드로 삼고 스눕, 릴 웨인, 조스 스톤 같은 게스트들을 맞이해 제작한 베티 라이트 누님의 새 정규 앨범! 존 레전드와 함께 한 앨범도 그렇고 Undun도 그렇고 베티 라이트 누님과 함께한 이 앨범도 그렇고... 그동안의 행보를 되짚어 보면 루츠가 과연 무엇을 꾀하고 있는지 뭔가 윤곽이 잡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이 앨범이야말로 2011년의 대미를 장식한 화룡점정이 아닐까 한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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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숭털 (2012-01-04 22:00:56, 122.32.69.**)
- 정말 잘 봤습니다. 국내편은 언제 나오나요 ㅠ 목 빼고 기다리고 있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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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enta (2012-01-01 18:38:38, 110.8.224.**)
- 아이슬란드 밴드 we made god
올려주신곡 무슨 한국어를 씨부리기에
뭔가 했더니
오대수가 올드보이의 오대수라는군요ㅋㅋㅋ
쨌든 흥미가 가는 밴드라는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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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ordupdope (2011-12-27 12:14:47, 110.11.169.***)
- 좋은 글 감사합니다^^ 추천해 주시는 음악들 잘 듣고 있습니다.
혹시 블로그는 따로 안 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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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peye (2011-12-27 03:14:52, 168.120.97.***)
- 캬~죽여주네요..
새벽에 다시 한번 2011년을 돌아보는 계기가ㅎㅎ
언제나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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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차 (2011-12-26 20:52:18, 116.39.14.**)
- 좋은글 정말 잘보고 가요. 다음글도 기대 하겠습니다.
요즘 글도 잘 안 올라오는데 euronymous님이 리드머의 산소호흡기 역활을 하시는듯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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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sty (2011-12-26 18:04:44, 112.145.2.***)
- 탐 웨이츠 죽이네요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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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lanq (2011-12-26 16:09:37, 219.241.47.***)
- 잘보고 갑니다ㅋ euronymous 님은 음악적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으신거같네요 끝없는 디깅만이 살길인거같습니다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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