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phop] Bun B [Trill O.G]의 마이크 다섯 수령에 대한 단상
- 김봉현 | 2010-09-15 | 9,620 Reads | 1 Thumb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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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만점의 가벼움
래퍼 번 비(Bun B)의 세 번째 솔로 앨범이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오직 하나. 미국의 힙합 월간지 소스(The Source)에서 만점(마이크 다섯 개)을 받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갈수록 영향력과 공신력을 의심받고 있지만 여전히 소스는 힙합 씬에서 가장 중요한 평단이기에 논란은 불가피하다. 더군다나, 릴 킴(Lil Kim)의 앨범 이후 5년 만에 나온 만점이다.
(당연히) 릴 킴의 경우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미안하게도 이번 경우 역시 납득할 수 없다. 물론 듀오 UGK의 일원으로서 20여 년 동안 서던 힙합(southern hiphop)을 우직하고 설득력 있게 고집해온 번 비의 행보를 존중하지 않기란 굉장히 힘들다. 실제로도 많은 힙합 뮤지션이 그에게 리스펙ㅌ을 보내고 있고, 제이. 콜(J. Cole)은 아예 ‘Bun B For President’라는 곡을 발표해 번 비의 이번 앨범을 홍보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앨범이 힙합 씬의 가장 중요한 평단에게서 만점을 받았다는 사실은 또 다른 문제다. 단도직입적으로 여러 가지 면에서 동의할 수 없다. 대략 다음과 같은 근거들로.
일단 번 비 개인의 커리어 내에서 살펴보자. 첫 번째 솔로 앨범 [Trill](2005)은 서던 힙합을 기반으로 하드코어, 클럽, 팝-프렌들리 등 다양한 스타일을 접목한 양질의 곡으로 채운 앨범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솔로 앨범 [II Trill](2008)은 [Trill]의 기조를 이어받았지만 조금 더 화려하고 풍성한 사운드를 담고 있었다. 두 앨범은 서로 조금 달랐지만 모두 서던 힙합을 대표할만한 작품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Trill” 시리즈 중 마지막 작품인 이 앨범은 전작의 클래스를 따라가지 못한다. 대부분이 이미 보여준 것이고 완성도 면에서 과거의 것에 미치지 못한다. 하던 것을 또 하면 안 된다는 법은 없다. 다만 같은 것을 또 했지만 예전만 못할 경우가 문제될 뿐이다.
[Trill O.G.] 수록곡을 통틀어 “과거를 보아 예측 가능했고 그 예측이 맞아떨어진” 곡 중 번 비의 전작이나 UGK의 그것에 비할 때 더 멋지거나, 신선하거나, 혹은 더 감동적인 곡이 과연 몇이나 있는가? 선동적인 ‘Just Like That’은 곡 자체로는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5년 전에 ‘Draped Up’이 이미 그만한 그리고 그와 비슷한 감흥을 선사했고, 서던 힙합 특유의 느릿느릿한 그루브를 담아낸 ‘Ridin Slow’만한 곡은 UGK의 앨범을 찾아보면 시쳇말로 널리고 널렸다. 서던 힙합의 여러 전형(그것이 비트든 가사든)을 답습하는 것에 가까운 적지 않은 곡은 이제 조금 지겹다.
물론 [Trill O.G.]가 전작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부분도 있다. 그것을 에둘러 “동시대성”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전히 서던 힙합의 기조를 품고 있지만 부분적으로 변화를 모색한 흔적 말이다.
먼저, 싱글로 내세운 ‘Trillionaire’에 동시대 가장 “HOT”한 보컬리스트 티-페인(T-Pain)을 초대했지만 그 판단부터 착오였다. 티-페인의 시대는 이미 끝물이다. 2008년까지만 해도 그는 오토 튠과 기막힌 멜로디 메이킹으로 씬을 지배했다. 그러나 최근의 결과물을 들어보면 감각이 둔화된 것이 확실하다. ‘Trillionaire’도 예외는 아니다. 밋밋한 멜로디, 그저 그런 비트에 “밑바닥부터 치고 올라와서 내가 이렇게 성공했다!”고 외치는 자수성가(?)형 가사도 큰 감흥이 없다. ‘Trillionaire’는 음악적으로 실패했다.
한편 드레이크(Drake)의 참여는 예견된 일이었다. 이미 둘은 서로를 칭찬하거나 옹호한 일이 있고 심지어 번 비는 이 앨범에 수록할 비트를 드레이크에게 양보한 적이 있다. “신구”의 협업 자체는 권장할 일이다. 그러나 드레이크와 그의 홈타운-프로듀서 보이-원다(Boi-1da)의 스타일을 무려 앨범의 2곡에 그대로 빼다 박아놓은 것은 그다지 권장할 일이 아니다. “화학적 결합” 대신 번 비는 드레이크의 밥상에 숟가락만 얹어놓았다. 그것도 드레이크와 보이-원다의 수많은 기존 작업물과 잘 구분도 안 되는 복제 트랙들에 말이다.
디제이 프리미어(DJ Premier)의 참여는 어떤가. 거창하게 그의 음악적 변천사라든지 그가 걸어온 길을 언급할 필요도 없다. 최근 몇 년 사이 발표한, 즉 전성기에 비해 폼이 확연히 떨어진 그의 결과물과 비교해보아도 과연 ‘Let Em Know’는 훌륭한 트랙인가? 특유의 날카로운 샘플 커팅과 배치, 긴박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드럼과 베이스로 대표되는 프리미어의 미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평범하고도 평범한 트랙이?
뭐, 자유주의(?)에 입각하자면 이 모든 것은 번 비의 자유다. 그러나 그렇게 완성된 이 앨범이 “클래식”이라는 평가를 받는 지금의 상황은 “잘못”에 가깝다. 나는 소스의 “취향”을 존중할 수 없다. 취향 이전에는 “기준”이 있고 그 기준이라는 것은 “다양성”이나 “다름”으로 모두 커버 가능한 것이 아니다.
소스가 내세운 만점의 근거는 “모든 래퍼가 대중에게 자신을 특별하게 보이기 위해 기믹(gimmick)에 집착하면서 오히려 그것들이 너무 뻔해졌다. 하지만 번 비는 그렇지 않다”는 것으로 대략 요약된다. 그러나 백번 양보해 이 말을 곧이곧대로 인정한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과거의 자신에게 지고, 동시대의 재능들에게 가장 훌륭한 소리를 이끌어내지도 못했으며, 흐름을 선도할 진보적이고 파격적인 면모를 갖추거나 혹은 비슷한 시기의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음악적 완벽함을 증명하지도 못한 이 앨범에 “클래식” 칭호라니, 언제부터 이 세 글자의 무게가 이리도 가벼워졌나. 참을 수 없는 만점의 가벼움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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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파인 (2010-09-18 10:11:17, 121.135.199.***)
- 솔직히 매거진의 평점에 대한 기준이나 신뢰도가 예전에 비해
많이 무뎌진게 사실이죠 이제 앨범을 살때 소스지의 마이크 갯수를 보고
사는일은 없으니까요.. 불과 10여년 전만해도 절대적 신뢰를 가지고
음반을 구입하곤 했는데 말이죠...
언급한 10여년전의 에디터들이 아직 남아서 평점을 매긴거라면
좀 의아하거나 아니면 이들도 이제 듣는귀가 바뀐거구나 싶을테지만
글쎄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길수도 있는것 같습니다.
소스지가 예전만 못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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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동 (2010-09-17 03:15:25, 121.130.120.***)
- 이번 앨범은 모로봐도 별 셋에서 셋반이 적당합니다. 물론 꽤 좋지만 죽이는 곡은 거의 없고 전체적인 완성도도 이전보다 떨어지고...소스 마이크의 만점이 열개가 아닌 이상에야 이건 좀 아니라능...뭐 번 비 짬밥을 보니 주긴 줘야겠는데 기회를 놓쳐서 걍 최근작에 던진 느낌이 강해요. 스콜세지가 좋은 친구들, 카지노, 택시기사 이런 명작들 찍어놓고 아카데미에서 무시받다가 나중에 서로 눈치보다가 디파티드로 겨우 합의본듯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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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토피 (2010-09-16 16:51:37, 43.244.41.***)
- II Trill 의 느낌을 이어가는 앨범이기는 한데 좀 약했던 것 같아요. 봉현님 말씀대로 대부분이 이미 전작에서 보여준 것인데 포스가 더 강해지지 않아서 조금 실망했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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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 (2010-09-16 11:04:58, 74.100.101.***)
- source 는 이제 한물 갔죠.저도 4.5정도까진 이해 할수 있어도 5 아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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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훈 (2010-09-16 01:05:31, 114.207.217.***)
- 위에 문단에 리스펙트가 오타 났네요
이 앨범은 번비 여태 커리어랑 비교하면 최악이고
번비의 좋은 앨범들과 비교해서 구린게 아니라 진짜 그냥 그대로 진짜 별로인 앨범이라고 저도 생각했었는데
시원한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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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okohama PMX (2010-09-15 23:45:01, 221.143.249.***)
- 아까는 띄어쓰기 때문에 약간 보기 불편했는데 이번에 편하게 되었네요 ㅎ 번비 앨범은 저도 참 좋게 들었어요(블루프린트 3 정도로) 랩도 뭐 항상 좋고 피쳐링도 좋고 근데 정말 5개정도는 아닌듯.4개 정도가 적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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