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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TC.] skit (어느 하얀 방)
    김예본 | 2012-04-22 | 5,717 Reads | 0 Thumb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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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킷 (어느 하얀 방)

    긴 잠을 잔 것 같아. 눈을 떠보니 사방엔 새하얀 물건들 천지 뿐.
    여긴 어디지? 침대에서 일어나 지독한 알코올 냄새에 눈살 한 번 찌푸린 후. 
    일어나려니 몸이 움직이질 않아. 내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야.   
    머리가 좀 띵하다만 최대한 내 똑똑한 머리로 기억을 더듬어 보자.
    아, 생각 났어. 분명 얼마 전 헤어진 여자친구 집에 찾아가서 다리를 잡고
    난리법석에 눈물 콧물에 걔네 아빠가 날 내쫓은 짓을 했던 거. 
    또.. 어머니가 돌아가셨었지. 내가 한바탕 소리 지르고 나온 날이었지.
    꽤 울었던 거 같은데 지금은 이상하게 왜 전혀 하나도 슬프지가 않은건지. 
    이상해. 모두 멈춰버린 듯해. 아님 내 뇌만 멈춘 거 같애.
    느껴지는게 없고 의구심만 들어. 없단 말야. 딱히 화나는 것도, 딱히 슬퍼할 것도.
    그 때 문을 열고 들어 온 이 한 남자. 흰색 가운을 입고선 내 모습을 한참.
    쳐다보다가, 말을 걸어봐 살짝. 그 전에 내가 궁금한것들을 물어나보자.

    여긴 어디죠? 당신은 누구죠? 이 새하얀 방에 난 왜 누워있던거죠?
    사실 이 모든 것들은 그리 궁금하진않아. 제일 물어보고 싶은 질문은 바로 이거야.
    왜 아까부터 화날법도 한 이 상황에 난 왜 이렇게 평온한건지.
    술기운인지 뭐 때문인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 로봇이 되어버린건지.

    "화나셨나요? 앞 뒤 안 맞는 이 상황에 마음이 좀 답답하신가요? 
    아무렇지 않나요? 대답해봐요. 그래야 내 수술이 성공했는지 알아야 하니까."
    화도 안나. 얼굴은 찌푸러지지만 난 감이 안와. 난감한 이 상황.
    내 앞에 남자에게 말하자마자, 만족한 듯한 미소로 나에게 몇 장의 종이를 건낸다.  

    "계약서?" 천천히 읽어본다. 내 이름이 써진 곳에 표기된 글씨는 임상실험자.
    다음 장을 넘겨, 다다음장을 넘겨. 첫번째 글자부터 마지막 글자까지 읽어 본 후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아. 난 좆된 거 같아. 입 밖으로 말이 안나와.
    그럼 난 어떻게 된거야. 이 종이들에 써진 그 내용 그대로 되어버린 거란 말야?

    "정답. 넌 성공했어. 너가 바라던 그대로 넌 이뤄냈어.
    앞으로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홀로 걸어가겠지 울지 못하는 한마리 부엉새처럼.
    이미 느끼고 있으면서. 뭘 더 걱정해? 너가 바란 모습 그대로야.
    여자친구와 어머니의 죽음의 고통을 없애달라며 울부짖던 너가 원했던 거자나." 

    오 난 이걸 바란게 아냐. 이런 결과였다면 애초에 난 안했을꺼야.
    아무것도 느껴지질 않아. 내 어릴적의 기쁨이나 슬픔 그 추억들 모두 아련함조차 없어.
    '그립다'라는 단어만 머리에 떠올릴 뿐 내 가슴은 그 어느 단어를 떠올린들 그대로야. 
    며칠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그때, 그때로만.

    자기 일은 아니라는 듯, 혹은 자기 할 일은 모두 다 끝났다는 듯이발길을 재촉하는 저 남자,
    남겨진 건 최초로 감정을 잃어버린 사람, 바로 나야.
    P-TYPE 은 행복하다는 게 뭔진 몰라도 행복하다고 말했지만 그와 정반대인 난
    행복함을 느낄 수 조차 없어 머리로만 알고 있는 그 단어의 느낌이 나에겐 없어.
    으. 울고 싶은데 눈물이 안나와. 내 맘은 말라비틀어진 황무지마냥 밖으로 나갔어.
    보이는 사람들의 미소와 우울함과 외로움이 너무 부러워.
    바닥을 걸을 때마다 타일에 맞춰 내 발걸음을 옮겨 감당이 안되는 방랑벽
    내 맨몸을 던지지만 돌아올때는 거울에 감정이 마취된 내 자신과 발맞춰.
    날 돌려줘 날 돌려놔줘 이런 걸 바랜 게 아니야. 난 행복하고 싶어 슬퍼하고 싶어.
    행복하게 해줘 슬퍼하게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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