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드머 뷰] 복고 바람 속 범람하는 '레전드'들
- rhythmer | 2012-12-06 | 15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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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드가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이건 꼭 메이저 시장의 오래된 가수들 얘기만은 아니다. 한국힙합 씬에도 별다른 작업물이나 뚜렷한 성과 없이 1세대라는 타이틀을 두르며 등장할 때마다 전설인 것마냥 보도자료를 뿌리는 수많은 랩퍼들이 존재한다.'
80년대 초에 태어나서 90년대 음악을 향유하고 자란 필자가 어린 시절 가장 즐겨 듣던 음악은 7•80년대 가요와 팝 음악이었다. 고교 시절에는 들국화와 조덕배에 심취한 까닭에 또래 친구들에겐 자연스레 꼰대나 애늙은이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스무 살이 되어 술집을 드나들 수 있을 때 PC 통신에서 음악을 즐겨 듣던 지금 내 나이 또래의 형들과 메모지에 신청곡을 적어 보낼 때 나는 에릭 클랩튼(Eric Clapton)의 “Layla”를 신청했고, 형들은 어린 나에게 이 곡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자연스레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과 패티 보이드(Pattie Boyd), 에릭 클랩튼의 삼각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대견하다며 칭찬 아닌 칭찬을 받기도 했다. 지금처럼 인터넷 정보가 없던 시절 나는 음악사에 일어난 일들과 옛 과거의 음악은 책과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접했다. 당시 평론가들이 쓴 책이나 기고 글들, 성우진 팝 평론가가 라디오 방송에서 소개해주는 음악들이 나에겐 소중했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성우진은 신해철이 진행하는 라디오에 나와 에릭 클랩튼의 “Layla”를 틀며, ‘에릭이 패티 보이드에게 사랑의 기차를 타려고 말하는 곡이죠. 레일 놔’라는 꽃 같은 드립을 시전해 보이기도 했다.*Layla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으로 패티 보이드의 애칭. 조지 해리슨의 부인이던 패티 보이드에게 에릭 클랩튼이 선사한 곡의 제목.
이처럼 책과 라디오 방송 등을 통해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음악들을 찾아 들었지만, 그 시대를 직접 살아오며 그때 그 음악들을 실시간으로 접해온 나이 많은 선배들의 배경지식을 따라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게 부러웠다. 나는 찾아 들어야만 알 수 있는 7•80년대 음악들을 나이 많은 누나, 형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고 그때의 분위기를 향유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어린 나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말했듯이 나는 90년대 음악을 향유하며 접해온 세대다. 가요톱텐에서 트로트와 발라드가 양분해가며 1위를 하던 시절에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은 국내 음악사를 바꾸어 놓았다. 차트에서 발라드의 인기는 식어 갔고 트로트는 아예 종적을 감추었다. 차트는 매일 새롭게 태어나는 댄스가수들이 몫이었다. 그리고 의문이 들었다. ‘7•80년대의 음악은 이토록 아름답고 훌륭한데 90년대의 이러한 댄스음악들이 먼 훗날 다시금 불리고 기억될까?’ 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복고 바람이 무척이나 거세다. 한 케이블 방송의 드라마 제목이었던 [응답하라 1997]의 영향이었을까? H.O.T와 젝스키스가 다시 언론에 오르내린다. 윤계상의 탈퇴 이후, 다시 뭉치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던 아이돌 그룹 GOD도 한 케이블 방송을 통해 한자리에 모였다. 음악 방송에서는 90년대 가수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주었고, 90년대 댄스음악만 틀어주는 술집이 생겨났다.
그리고 90년대 복고 바람이 거세지며 언론에 함께 오르는 단어가 생겼다. 바로 ‘레전드(Legend)’다. 전설. 음악사에 어디서 어디까지 어떤 영향을 끼쳐야 레전드라고 불릴 수 있나 하는 법 따위는 없다. 방송사와 가수들은 스스로에게 훈장을 부여하듯 레전드라는 이름을 달고 지금 세대들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일화들과 그 시절의 인기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레전드라는 이름으로 공연을 펼친다. 그야말로 레전드가 범람하는 세상이다. 이쯤 되니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한국인지 그리스인지 헷갈려온다.
물론, 90년대는 그 어느 때보다 국내 음악 시장이 호황을 누리던 시기다. 스케줄이 많아 헬리콥터를 타고 이동했다는 어느 가수의 일화도 거짓은 아니다. 100만 장을 팔아 치우는 가수가 한해에도 몇 명이 탄생했고 손익분기점으로 10만 장을 논하던 세상이다. 만 장을 팔면 많이 팔리는 요즘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시절이긴 하다. 하지만 20여 년이 지난 옛일들을 지금에 적용하며 레전드라는 거창한 타이틀로 자신을 신격화하는 모습은 그 시절 그들을 보고 자란 나에게는 과하다는 생각이다.
지금 스스로 레전드라는 이름으로 다시금 등장한 가수 중에는 송라이팅 능력이 안 되는 가수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작곡가가 붙여준 멜로디에 작사가가 붙여준 노랫말을 녹음하며 가수라는 직업을 달았다. 물론, 레전드라는 타이틀에 꼭 송라이팅 능력을 갖춘 뮤지션만 들어가야 하는 법은 없다. 악보를 볼 줄 모르는 무수한 명 보컬들이 음악사에는 많이 존재해왔다. 하지만 보컬 측면만 보더라도 지금 레전드라는 타이틀을 달고 활동하는 사람들은 그저 옛 과거에 비해 식어버린 현재의 인기를 자위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수의 삶을 살던 사람들이 인기가 식으면 몇몇은 평범한 삶을 사는 반면, 몇몇은 사업을 하다 망하기도 하고 몇몇은 연기자로 직업을 바꾸기도 한다. 그리고 몇몇은 꼭 후배양성이라는 걸 한다. 십여 년 전 성수동에 있던 모 스튜디오에서 녹음과정을 모니터링할 기회가 있어 죽을 치던 적이 있었다. 지금이야 개인의 홈 스튜디오를 비롯한 많은 녹음실이 생겨났지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성수동 스튜디오는 국내 3대 스튜디오에 들어가던 곳이었다. 소문답게 녹음실은 고가의 장비와 뛰어난 엔지니어가 포진되어 있었다. 한참 녹음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한 댄스가수 출신의 남성이 선글라스를 낀 채 스튜디오에 들어와 거들먹거리며 말을 했다. ‘아, 얘네 노래 좀 시켜 보려고 하는데 녹음 한번 떠보면 안 될까?’ 그는 키가 큰 늘씬하고 예쁘장하게 생긴 여성 두 명을 데려와 노래를 시켜보았다. 예정에 없던 녹음이었지만, 그가 가진 이름값 때문이었을까? 어린 엔지니어는 하던 작업을 멈추고 그녀들을 위해 마이크를 세팅해주었다.
그날 내가 지켜본 댄스가수 출신의 그는 아마 후배양성을 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날의 오디션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그가 키운 후배 가수는 없지만, 그는 요새 레전드라는 타이틀로 공연을 준비 중이란다. 내가 접한 그날의 그를 봤을 때 레전드라기보다는 그윽한 꼰대의 향기를 접할 수 있었다. 레전드가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이건 꼭 메이저 시장의 오래된 가수들 얘기만은 아니다. 국내 힙합 씬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킹, 퀸, 왕, 황제 폐하 정도야 가사의 특성상 차치하더라도 별다른 작업물이나 뚜렷한 성과 없이 1세대라는 타이틀을 두르며 등장할 때마다 전설인 것마냥 보도자료를 뿌리는 수많은 랩퍼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러한 이들 중 대부분은 한국힙합 씬에 이바지한 부분이 아주 미세하다. 이제 막 힙합 음악을 접하기 시작한 어린 친구들은 보도자료를 보며 그들이 옛 시절에 대단한 무언가를 이루었다고 착각할지도 모르겠다는 염려가 든다.
문득, 들국화의 보컬 전인권이 한 방송에서 국내 100대 명반을 꼽을 때 왜 항상 자신들의 앨범이 1위를 차지하느냐는 질문에 했던 대답이 떠오른다. 그 대답은 이랬다.
‘호랑이는 자기가 호랑이인 줄 몰라요. 남들이 호랑이라고 불러주니깐 호랑이인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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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우경 (2013-07-12 13:29:38, 211.55.75.***)
- 에릭크랩튼 얘기는 몇주전 일요일 아침방송 서프라이즈에 나오던데요. 대역배우들의 명연기가 일품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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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정식 (2013-01-22 10:27:44, 121.173.199.**)
- 쥑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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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unenee (2012-12-07 22:51:19, 180.69.111.**)
- 요즘 TV에서 레전드레전드하면서 막 소란스럽게 나오는게 싫었는데, 딱 이 글을 보게되서 좋네요. 부디 '레전드'라는 타이틀이 꼰대 이미지가 아닌 글자 그대로 인식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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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deon (2012-12-06 22:20:23, 112.161.19.***)
- 전인권씨가 방송에서 저 말을 하실 때 뭔가 탁 치는 그런 게 있더라구요
요즘 현실을 잘 찝어내신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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