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드머 뷰] Bob Marley, 버려진 자식으로 태어나 전설이 되어 죽다
- rhythmer | 2016-05-23 | 12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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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강일권
1974년의 어느 날, 자메이카 오디언가에 있는 라디오 방송 스튜디오에선 매우 급박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야구 방망이까지 동원한 한 무리의 사내들이 디제이를 둘러싼 채, 위협적인 분위기를 조성 중이었고, 그중 한 명은 밥 말리(Bob Marley)였다. 그는 디제이에게 새로 녹음한 "Road Block"이란 곡을 틀지 않으면, 죽일 수도 있다고 협박하던 참이었다. 말리의 밴드 웨일러스(The Wailers)는 자메이카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음에도 정작 자메이카의 방송국들은 그들의 음악을 틀지 않았다. 그래서 이에 분노를 느낀 말리와 동료들이 직접 행동을 취한 것이었다. 결국, "Road Block"은 방송을 탔고, 그해 여름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이 살벌하고도 비도덕적인 일화는 밥 말리가 자신의 목표와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라면, 얼마나 저돌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던 인물이었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예다. 그리고 당시의 자메이카는 온전한 정신만으로는 버티기 어려울 만큼 대혼란의 시기였다. 정당들은 나라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정치적 교전 상태에 들어갔고, 게토 지역에선 연일 크고 작은 폭력 사건들이 터졌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밥 말리는 쉼 없이 음악을 만들고, 기득권 매체들의 부당한 무시로부터 지켜냈으며,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고통을 담아 써내린 가사적 세계관을 더욱 견고히 해나갔다. 특히 ‘74년은 "I Shot the Sheriff", "Stir It Up", "So Jah Seh", "Natty Dread" 등의 명곡을 발표하며 승승장구하던 웨일러스 (1기)가 실질적으로 해체한 해이자 전 세계인의 송가라 해도 과언이 아닐 "No Woman, No Cry"가 처음 나온 해이기도 하다. 그렇게 그는 한창 저항의 시대를 몸소 겪어내고 있었다.
밥 말리가 저항적인 노랫말을 쓰기 시작한 건 주변 환경과 성장 배경 요인이 결정적이었다. 그 중심엔 아버지를 향한 애증이 자리한다. 영국 출신의 아버지와 아프리카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가 자신과 어머니를 버렸다는 생각에 분노를 품고 자랐는데(1978년에 있었던 한 인터뷰에선 ‘백인 남자가 흑인 여자를 건드렸다.’라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쓴 바 있다.), 그 과정에서 말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건 부모가 아닌 킹스턴의 빈민가에서 함께 부대끼며 자란 또래 아이들이었다. 말리의 곡 속에서 다뤄지는 고통의 근원이 항상 유년기의 심상과 맞닿아있었던 것도 그런 연유다. 스티븐 데이비스(Stephen Davis)가 쓴 [Bob Marley] 평전에서 가족과 친구들이 밝힌 바에 따르면, 세계적인 명성과 이른바 문화적 권력이라는 것이 말리 개인을 압박하던 시절에도 아이들과 있을 때면, 가장 편안하고, 가장 개방적이며, 가장 그다웠다고 한다.한편, 폭력과 범죄에 노출된 상황에서 자라며, 말리는 몸을 보호하기 위해 거리 싸움을 익혔다. 이내 무시 못할 싸움 기술을 보유하게 된 그에겐 라스타파리언(Rastafarian)의 리더였던 레너드 "더 공" 하웰(Leonard “The Gong” Howell)에 대한 헌정의 의미를 더해 ‘터프 공(Tuff Gong)’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오늘날 레게 음악의 성지로 남아있는 밥 말리의 터프 공 스튜디오의 이름이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킹스턴의 슬럼가 트렌치타운(Trench Town)에서 굳세게 유년기를 보낸 밥 말리가 음악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 데에는 자메이칸 대중음악의 선구자 중 한 명인 조 힉스(Joe Higgs)의 공로가 컸다. 1963년, 힉스는 말리와 그의 죽마고우 버니 웨일러(Bunny Wailer a.k.a Neville Livingston)에게 보컬 교육을 실시했고, 나아가 또 다른 재능, 피터 토시(Peter Tosh)를 소개해주기에 이른다. 곧 밥, 버니, 피터는 의기투합하여 그룹을 결성했고, 그렇게 탄생한 게 바로 밥 말리 앤 더 웨일러스다. 당시만 하더라도 커티스 메이필드(Curtis Mayfield)를 비롯한 미국 소울 아티스트들의 음악에 영향받았지만, 가사적으론 자메이카 내부의 빈곤과 게토 젊은이들의 심경을 담아내며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리듬 앤 블루스(Rhythm And Blues)의 영향 아래 생겨나 한동안 자메이카 음악 씬을 이끌어온 스카(Ska)와 그로부터 변형된 락 스테디(Rock steady)의 시대를 지나 ‘70년대 들어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레게 신화의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그룹 이름과 얽힌 흥미로운 설이 있다. 공식적인 그룹 이름은 ‘더 웨일러스’이며, ‘밥 말리 앤 더 웨일러스’란 표기는 말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다른 이들이 붙인 거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밥 말리는 훗날 한 인터뷰에서 자신은 단 한 번도 그룹명을 ‘밥 말리 앤 더 웨일러스’라고 공표한 적이 없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이후, 만들어진 앨범들도 계속 같은 이름 아래 발표됐다.그러던 1974년, [Natty Dread] 앨범을 끝으로 원년 멤버인 피터 토시와 버니 웨일러가 밴드 내 비중 문제에 불만을 품고 팀을 탈퇴하자 말리는 빠르게 새로운 라인업을 구성하고 앨범 준비에 나선다. 그의 아내 리타 말리(Rita Marley)를 비롯한 마샤 그리피스(Marcia Griffiths), 주디 모왓(Judy Mowatt) 등으로 이루어진 그룹 아이 쓰리스(I Threes)가 정식 합류한 것도 이때다. 이 외에 오랜 기간 합을 맞춰온 칼톤 바렛(Carlton Barrett)과 애스톤 바렛(Aston Barrett)은 물론, 신진 기타/퍼커션 주자인 얼 “친나” 스미스(Earl "Chinna" Smith) 등이 가세한 밥 말리의 새로운 웨일러스는 [Rastaman Vibration], [Exodus], [Kaya], [Survival] 등의 앨범을 연속 히트시키며, 전 세계에 레게 음악의 위상을 알렸다.
단지 상업적인 히트만 돋보인 건 아니었다. 단 한 순간도 무뎌지지 않았던 말리의 급진적이고 날카로운 비판 정신은 혼돈의 자메이카를 살아가는 젊은층을 넘어 미국과 유럽의 수많은 음악팬들의 가슴에 커다란 울림을 선사했다. 특히, 시스템에 대한 저항을 부르짖는 동시에 라스타파리아니즘(Rastafarianism)에 기반을 둔 평화와 사랑의 가치를 표현한 말리의 음악은 당대 지독한 사회, 계급적 탄압 아래 놓였던 블랙 커뮤니티에도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괴한의 총격 세례 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대에 서는 카리스마를 뽐내며, 영원불멸할 것 같았던 그도 악성 종양의 공격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처음 말리의 몸에서 암세포가 발견된 건 1977년도였다. [Exodus]를 발표하고 유럽 투어 중이던 그는 발가락에서 암세포가 발견되는 진단을 받았음에도 투어를 강행하며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종양은 야금야금 몸을 잠식했고, 결국, 1980년 9월,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공연을 마친 다음 날, 공원에서 운동하던 말리는 발작과 함께 쓰러지고 만다. 그땐 이미 커다란 악성 종양이 뇌까지 퍼진 상태. 이 같은 결과에 충격을 받은 말리는 뒤늦게 치료에 힘써보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1981년 5월 11일, 겨우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가 아들인 지기 말리(Ziggy Marley)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돈으로도 생을 살 순 없어(Money can't buy life).”였다고 한다.밥 말리가 세계대중음악사에 남긴 업적과 ‘60년대 이후 세대들에게 남긴 상징은 실로 굉장하다. 사회적 이슈에 민감하게 움직이고, 분노와 저항을 담아내던 힙합 뮤지션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울음으로 시작한 노래를 통해 그는 고통 속에 우는 이들을 어루만져주었고, 듣는 이를 눈물짓게 했다. 버려진 자식으로 태어나 전설이 되어 죽은 남자, 밥 말리가 이끄는 모진 세상으로부터의 대탈출(Exodus)은 앞으로도 영원히 진행 중일 것이다.
※본 글은 대한항공 엔테테인먼트 매거진 비욘드 115호에 게재한 글을 일부 수정 및 보강하여 게재하는 바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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