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드머 뷰] ‘크리드(Creed)’의 재발견, 복싱 영화이자 힙합 영화
- rhythmer | 2017-06-05 | 12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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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정용 풋볼리스트 기자(Contributor)
영화 [크리드](2015)는 록키 발보아의 후계자를 등장시켜 40년 묵은 [록키] 시리즈에 새 가능성을 불어넣은 영화다.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고른 호평을 이끌어냈지만, 국내에선 극장 개봉 없이 DVD로만 발매됐기 때문에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 특히, [크리드]가 블랙뮤직 리스너들에게 더 재미있는 영화라는 점은 아는 사람이 드물다.
[크리드]는 블랙뮤직을 많이 활용하는 수준을 넘어 영화의 주제의식과 밀접하게 연결시켰다는 점에서 훌륭한 음악영화라 할만하다. 더 루츠(The Roots), 믹 밀(Meek Mill), 차일디시 갬비노(Childish Gambino) 등을 좋아한다면 더더욱 [크리드]를 주목해야 한다.
1. [크리드]의 음악 감독이자 힙합 프로듀서, 루드비히 괴란손(Ludwig Göransson)
고전적인 록키 시리즈는 [록키 V]를 끝으로 생명력을 잃었고, 늙은 록키의 이야기 [록키 발보아]는 마지막 힘을 짜낸 후일담이었다. [크리드]는 록키의 제자를 등장시키며 시리즈를 새로 시작한다. 록키의 라이벌이자 친구였던 아폴로 크리드의 아들이 새 주인공이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모두 잃은 ‘크리드 2세’는 아도니스 존슨이라는 이름의 회사원으로 살아가지만, 크리드에게 물려받은 파이터의 본능을 잠재우지 못한다. 결국, 록키의 제자로 들어간 아도니스는 아버지의 이름과 화해하고, 훌륭한 복서로 자신다운 삶을 시작한다.
[크리드]는 일종의 흑인 영화로 볼 수도 있다.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를 만들었던 라이언 쿠글러(Ryan Coogler) 감독과 배우 마이클 비. 조던(Michael B. Jordan)은 할리우드에서 가장 촉망받는 흑인 감독과 젊은 스타 배우다. 이 콤비는 예술 영화였던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와 상업 영화인 [크리드]에 이어 마블 히어로 영화 [블랙 팬서]와 크리드 속편 등 흑인만 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함께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 때부터 호흡을 맞춰왔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한 명 더 있다. 스웨덴 출신 음악 감독 루드비히 괴란손이다. 괴란손은 차일디시 갬비노의 모든 앨범을 프로듀스한 인물이기도 하다. 영화 음악을 힙합처럼, 힙합 앨범을 영화 OST처럼 만들며 두 가지 작업을 성공적으로 병행해 왔다. 그는 [크리드]에서도 다양한 힙합을 활용해 영화의 감흥을 한층 끌어올린다.
2. 더 루츠, 존 레전드, 믹 밀… 음악으로 필라델피아를 소개하는 법
[크리드]에서 복싱만큼 중요한 것은 도시다. 아도니스는 LA 출신이다. 하지만 그는 록키의 땅으로 유명한 필라델피아로 이주해 복서로 자리매김한다. 마지막 경기 장소는 상대 복서 콘랜의 고향인 영국 리버풀이다. 특히, 필라델피아는 록키 동상이 세워져 있고, [록키]에서 실베스터 스탤론(Sylvester Stallone)이 올랐던 계단이 최고 관광 명소일 정도로 시리즈와 인연이 깊은 지역이다. [크리드]에도 록키 동상이 그대로 등장한다.
아도니스가 필라델피아로 갓 이주했을 때, 영화가 필라델피아의 전경을 보여주면, 힙합이 본격적으로 깔리기 시작한다. 더 루츠와 존 레전드(John Legend)가 함께 만든 노래 “Fire"다. 필라델피아를 대표하는 두 뮤지션의 음악을 통해 영화는 필라델피아의 공기를 빠르게 흡수한다. 이들의 목소리를 아는 관객은 자막 없이도 여기가 필라델피아라는 걸 눈치챌 수 있다. 아도니스가 새 아파트에서 짐을 푸는 동안 흘러나오는 블랙 쏘웃(Black Thought)의 랩은 앞으로 필라델피아 블랙뮤직이 영화의 중요한 부분으로 쓰일 거라는 예고다.
뒤이어 등장하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필라델피아를 대표하는 래퍼 믹 밀(Meek Mill)이다. 아도니스가 새 체육관에 처음 들어설 때, 복서들은 “Check”을 틀어놓고 훈련 중이다. 힙합은 어느 음악 장르보다 지역성을 강조하는 특징이 있다. 믹 밀의 랩에도 자신이 필리(Phily) 출신이라는 점이 여러 차례 강조돼왔다. 음악으로 지역을 보여주는 두 번째 장면이다.
주인공의 연인으로 등장하는 비앙카가 뮤지션이라는 점도 영화의 음악을 더 주목하게 만든다. 비앙카는 필라델피아에 실재로 존재하는 유명 공연장 일렉트릭 팩토리에서 곧 공연할(영화 후반부에 백스테이지 장면이 등장한다) 인디 뮤지션이다. 그는 “레전드, 질(스콧), 루츠처럼” 그 무대에 설 거라고 이야기한다. 앞서 들려온 “Fire"가 우연히 선곡된 노래가 아니라는 걸 비앙카의 입을 통해 확인시켜주는 장면이다. 비앙카를 연기한 테사 톰슨(Tessa Thompson)은 가수 겸 뮤지션으로서 OST 3곡을 직접 불렀다. 읊조리듯 부르는 톰슨의 보컬과 잘 어울리는 감성적인 트랙들이다(비앙카의 밴드 멤버 중 한 명으로 괴란손이 카메오 출연하기도 했다.).
3. 록키와 아도니스의 특별한 관계를 힙합으로 설명하는 방식
영화에서 힙합은 록키와 아도니스의 관계를 긴 말 없이 설명해주는 효과적인 장치이기도 하다. 아도니스의 부탁을 거절하던 록키가 마침내 트레이너를 맡기로 했을 때, 첫 훈련 몽타주에 깔리는 노래가 나스(Nas)와 올루 다라(Olu Dara)의 “Bridging the Gap"이다. 나스가 친아버지이자 블루스 뮤지션인 올루 다라와 함께 부른 노래는 제목부터 세대 차이를 넘어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아버지를 잃은 아도니스, 아들이 멀리 떠나버린 록키는 서로 대안 가족에 가까운 관계를 형성하는 중이다. 나스 부자(父子)의 노래는 지나칠 정도로 장면과 잘 어울린다. 가사에 담긴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더라도, 고전 블루스 스타일의 비트에 나스가 올드스쿨 스타일로 뱉는 투박한 랩은 구닥다리지만, 정겨운 록키의 훈련법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록키가 아침 훈련을 위해 아도니스를 깨우는 모닝콜 음악도 절묘한데, 해럴드 멜빈 앤 더 블루 노츠(Harold Melvin & the Blue Notes)의 “Wake Up Everybody"가 쓰였다. 필라델피아의 전설적인 고전 R&B 밴드가 1975년에 발표한 곡이다. 첫 번째 [록키]가 개봉하기 딱 1년 전이라는 점에서 선곡 의도가 분명해 보인다. 고전 R&B 음악에 맞춰 어설프게 리듬을 타는 록키를 보고 아도니스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같은 블랙뮤직이라도 록키와 아도니스 사이에는 40년의 세월이 있다는 걸, 그리고 둘 사이가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이 곡은 더 루츠와 존 레전드가 2010년에 리메이크해 다시 유명해졌다. 영화 속의 음악 흐름을 따라오고 있는 관객이라면, 원곡을 처음 들어봤더라도 리메이크된 버전을 들어봤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전 장면에서 흘러나온 블랙 쏘웃과 레전드의 목소리가 떠오르면서 영화에 통일성이 생긴다. 40년 전의 필라델피아에 바치는 아주 은근한 오마주인 셈이다.
마침내 리버풀에서 최후의 대결이 다가온다. 영화는 상대 복서 콘랜이 리버풀 출신이라는 점을 부각하기 위해 프리미어리그 명문 구단 에버턴을 끌어들인다. 경기 장소도 에버턴의 홈 구장으로 유명한 구디슨 파크다. 관중석을 메운 관중들은 복싱이 아니라 축구를 보러 온 사람들처럼 한 목소리로 응원가를 합창한다.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경기와는 음악부터 다르다. 최후의 대결이 시작될 때 아도니스의 입장 테마곡은 투팍(2Pac)의 “Hail Mary"다. ‘할리우드’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LA 출신 아도니스에게 딱 맞는다. 한편, 콘랜의 테마곡은 크렙트 & 코난(Krept & Konan)의 대표곡 ”Don't Waste My Time"인데, 이쯤 되면 이 곡을 처음 들은 관객이라도 래퍼가 영국 출신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4. 샘플링과 리믹스 작법을 활용해 감정을 끌어올리다
[크리드]가 힙합을 활용하는 방식은 단지 인용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영화의 아름다움을 한층 끌어올리는 건, 스코어와 삽입곡의 경계를 없애버리는 괴란손의 독특한 음악이다. 보통 영화음악은 ‘배경음악’인 오리지널 스코어와 삽입곡으로 구분된다. 음악을 강조한 영화라도 대부분 마찬가지다. 힙합 프로듀서이기도 한 괴란손은 다른 노래의 아카펠라만 따서 자신이 만든 비트(스코어)에 붙여버리는 등, 고정관념을 깨는 영화음악을 만들었다. 힙합 프로듀서다운 작업 방식이다. 그래서 [크리드] OST는 종종 비트메이커의 믹스테입 같은 느낌을 준다. 그 결과 힙합 리스너들에겐 익숙하지만, 영화음악으로선 신선한 앨범이 됐다.
괴란손의 이 같은 실험이 씬을 제대로 살린 대표적인 예가 아도니스의 질주 장면이다. 아도니스는 록키에게 배운 대로 거리를 뛰며 훈련한다. 그때 필라델피아 특유의 바이크 라이더들이 아도니스를 호위하듯 달린다. 아픈 록키의 집 앞에 도착한 아도니스는 창밖을 내다보는 록키에게 고함을 지르고, 바이크들이 아도니스를 호위하듯 주위를 감싼다. 그가 ‘필리 보이’로 다시 태어났다는 걸 보여주는 상징적인 순간이다.
이 감동적인 장면은 [크리드]의 메인 테마 선율로 시작한다. 오케스트라와 합창이 선율을 이끌어갈 때까지 평범한 영화음악처럼 들린다. 그런데 아도니스가 거리로 뛰쳐나가는 순간, 믹 밀의 노래 “Lord Knows" 중 첫 번째 벌스가 겹쳐 나오기 시작한다. 믹 밀의 타이트한 랩과 라이더들의 모습이 조화를 이루며 점점 긴장감이 상승하다가, 아도니스와 록키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부터 즈네이 아이코(Jhené Aiko)의 허밍으로 노래가 바뀐다. 또 다른 삽입곡 “Waiting for My Moment"에서 아이코의 노래 부분만 따 와 입힌 것이다. 힙합 디제이가 리믹스를 하듯 만들어낸 곡은 영화 장면에 정확히 대응한다. 여러 곡을 조금씩 조합한 트랙이다 보니 괴란손은 단 6분짜리 씬을 위해 40분이 넘는 음악을 만들어야 했고, 작업 시간은 100시간이 넘었다. 괴란손은 “음악이 이야기를 전달해야 한다”는 지론대로 철저하게 장면에 맞춰 음악을 편집했다.
(이 문단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보좌하는 음악은 곧 시리즈 전체에 바치는 감동적인 오마주다. 콘랜과의 대결이 마지막 라운드로 접어들 때, 록키 시리즈의 유명한 테마곡들이 드디어 등장한다. 누구나 한 번 들으면 ‘록키 음악’이라고 알아차릴 수 있는 빌 콘티(Bill Conti)의 “Gonna Fly Now”다. 듣는 순간 피를 끓게 하는 이 곡이 흘러나오고 잠시 후, 808 드럼이 합세해 ‘힙합 버전 록키 주제가’가 만들어진다. 뒤이어 역시 명곡인 "Going The Distance"(여러 차례 샘플링 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한국에선 인순이의 “열정”, MC스나이퍼의 “Better Than Yesterday"가 이 곡을 샘플링 했다)가 따라 나온다. 마지막은 이번 영화의 테마 선율이 따라붙는다. 명곡 여러 개를 섞고 드럼을 조금 더해 새로운 트랙으로 만드는 건 전형적인 힙합 디제이의 수법이다. 괴란손은 일종의 ‘록키 리믹스’를 마지막 무기로 선보인 것이다.스코어와 삽입곡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크리드] 음악의 특징은 엔딩 타이틀이 올라갈 때까지 유지된다. 처음엔 평범한 엔딩 타이틀처럼 메인 선율로 시작한다. 그러다가 그 선율에 힙합 드럼을 깔아 비트로 만든 뒤 아이코와 갬비노(본명이자 배우일 때 쓰는 이름인 도널드 글로버로 참여했다)의 노래를 덧붙여 자연스럽게 보컬이 있는 노래로 전환한다. 여기선 거리 질주 장면에 나왔던 아이코의 노래를 더 길게 들을 수 있다. 마지막엔 빈스 스테이플스(Vince Staples)가 등장해 영화의 주제와 어울리는 랩 벌스를 선사한다.
[크리드]는 운명적으로 복싱을 하게 된 젊은이와 복싱으로 돌아온 늙은 스승의 감동적인 이야기다. 동시에 필라델피아라는 지역에 대한 이야기이고, 40년 된 시리즈에 오마주를 바치는 이야기라는 성격도 있다. 괴란손이 힙합에 기반을 두고 만든 음악은 두 가지 특징을 모두 극대화한다. 힙합은 가장 지역적인 장르고, 샘플링을 통해 선배들에게 오마주를 바치는 것도 익숙한 장르다. [크리드]와 잘 어울릴 수밖에 없다.
스코어에 대해서는 한 번 더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음악은 주 선율 하나를 다양한 악기, 다양한 구성으로 변주하며 만들어진다. 괴란손이 [크리드]에서 주 선율을 다루는 방식은 약간 독특한데, 이 점 역시 힙합 프로듀서답다. 808 드럼을 비롯한 힙합에 쓰이는 악기들이 등장할 뿐 아니라, 힙합 비트를 만들 때처럼 멜로디에 이펙트를 걸어 다양한 정서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또한, 스코어 앨범의 마지막 트랙 “Creed Suite”의 끝 부분엔 느리고 펑키한 버전의 변주가 잠깐 나오는데, 나중에 나온 갬비노의 대표곡 “Redbone”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괴란손은 인터뷰에서 “대규모 오케스트라와 함께 작업했지만, 동시에 내가 가진 프로듀싱 기술과 샘플을 활용해 실험적인 시도를 했다.”라고 밝힌 바 있다. 독특하고 매력적인 OST가 그렇게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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