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드머 뷰] ‘블랙 팬서’, 슈퍼히어로와 블랙 프라이드의 강렬한 결합
- rhythmer | 2018-02-18 | 31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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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남성훈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2008년 개봉한 [아이언 맨, Iron Man]부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역사를 매번 갱신하며 롱런 중이다. 그리고 2018년은 이 시리즈에게 더 없이 중요한 해가 될 것이다. 10주년 기념작인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Avengers: Infinity War]가 대기 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초전격인 [블랙 팬서, Black Panther]의 흥행세가 심상치 않다. 개봉 첫날 하루 만에 7천5백만불(한화 약 809억 2,500만 원)을 벌어들이며, 예상을 훨씬 웃도는 성과를 내고 있다. 북미의 미디어에서는 [블랙 팬서]를 일종의 현상으로 분석하는 글이 연일 게재될 정도다. 한국에서도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캐릭터란 약점을 극복하고 개봉 첫 주 흥행 1위에 올랐다. [블랙 팬서]를 다룬 다양한 분석글과 감상평 역시 올라오는 중이다.
특히, 최근 할리우드 블럭버스터의 큰 경향이기도 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을 잣대로 영화의 가치를 드높이거나 반대로 폄하하기에 이번 [블랙 팬서]는 더 없이 좋은 시료로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 흐름 자체가 [블랙 팬서]를 바라보는데 적합한지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백인/비백인 비중과 주체적 여성 캐릭터의 등장을 주요 쟁점이자 ‘정치적 올바름’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블랙 팬서]가 정작 품고자 한 것들을 쉽게 희석시킨다. 따라서 이를 기반으로 한 비평과 논란 자체도 핵심에서 벗어나 겉도는 부분이 많아 보인다. 국내와 국외의 온도차가 발생하는 주요 지점이기도 하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블랙 팬서]가 내포한 가치는 현재 할리우드에서 진행 중인 ‘정치적 올바름’과 긴밀하게 엮여 있지 않다. 물론, 큰 틀에서는 모두 포용할 수 있겠지만, 앞서 말했듯이 희석 탓에 의미가 훼손되는 비중이 더 크다. 백인 남성 중심의 할리우드에서 진보적 가치의 수용을 통한 자기반성으로부터 본격화된 ‘정치적 올바름’으로 [블랙 팬서]를 읽어내기엔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블랙 팬서]를 이해하려면, 1950년대부터 흑인 지식인과 문화예술인을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는 블랙 프라이드(Black Pride) 운동에 집중해야한다.
수많은 인종차별이 존재하는 미국 사회에서 흑인이 타 인종과 그 궤를 달리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와 제도적으로 차별과 억압을 받다가 정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블랙 프라이드 운동의 핵심은 바로 ‘흑인으로서의 자존감 세우기’였다. “흑인은 아름답다(Black is Beautiful)”와 같은 표어나 미국시민권운동(Civil Right Movements)의 성가로 불렸던 “We’re Winners”, “Say it loud - I'm Black and I'm Proud” 노래들도 마찬가지였다. 인류가 최초로 탄생했다는 아프리카 대륙 출생이란 정서적 가치를 드높이는 것 또한 중요한 매개로 자리잡았다. 아프리카를 ‘마더랜드(Motherland)’로 부르며 수많은 흑인 인권 운동가와 (힙합 아티스트 포함) 문화예술인이 애정을 내비친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블랙 팬서]의 핵심은 바로 블랙 프라이드 운동 속 ‘마더랜드’다. 비공개 프로덕션 시기에 [블랙 팬서]의 프로젝트명이 ‘마더랜드’였다는 사실은 이런 핵심적 가치를 더욱 부각한다. 영화에서 주 배경인 아프리카의 와칸다 제국은 겉으로는 세계 최빈국이지만, 사실은 엄청난 기술력과 부를 가진 슈퍼국가로 그려진다. 거대하고 구체적으로 그려지는 마더랜드 신화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는 영화가 직접적으로 흑인 사회를 향해 있으며, 블랙 프라이드 운동과 그 핵심인 자존감 세우기와 결부되어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영화 속의 수많은 디테일이 이를 방증한다.
1955년부터 시작하여 15년에 걸친 흑인민권운동은 큰 결실을 얻었지만, 밝은 미래를 보장하진 못했다. 1980년대 이후, 거주지역에 마약이 유입되고 범죄 방조와 경제적 제재로 인한 몰락을 직면한 흑인 사회엔 아쉬움과 허탈감이 만연했다. 이 같은 정서가 악역 킬몽거의 동기로 부여됐다는 점은 대표적인 예다. 여성캐릭터들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1980년대 마약과 범죄로 인해 급속도로 몰락하던 흑인 거주지역에서 흑인 여성의 입지는 어떤 지역보다 취약했다. 그 시기에 형식적으로 완성되어 가던 랩/힙합 장르 음악에서 유독 여성비하적인 표현이 고착화된 것도 이 같은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동시에 흑인 여성을 위로하거나 힘을 주는 랩/힙합 곡이 지속적으로 등장한 것도 같은 이유다.
특히, 10대 여학생의 자존감을 살려주고 롤모델을 제시하는 것이 ‘블랙 페미니즘(Black Feminism)’의 핵심이었다. 마더랜드인 와칸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10대 흑인 여성들에게 꿈을 향해 나아가라고 독려하는 롤모델 같은 캐릭터다(실제로 SNS를 통해 흑인 10대들이 캐릭터 포스터에 자신의 얼굴을 합성하는 릴레이를 펼치는 중이다). 모두 주체적인 인물에 전문가적인 냉철함까지 지니고 있으니 더할 나위 없다. 영화 전체가 미국 흑인 수난사에 바치는 헌사인 것이다. 더불어 주인공의 동생 슈리(Shuri)를 통해 흑인들의 오랜 염원인 흑인 제임스 본드가 등장하는 007을 보여주는 방식도 큰 재미다.힙합 음악을 중요하게 사용한 것 역시 [블랙 팬서]가 블랙 프라이드 서사를 표방했다는 사실을 잘 드러낸다. 1992년을 배경으로 한 장면에서 급진적인 힙합 그룹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의 걸작 [It Takes a Nation of Millions to Hold Us Back]의 포스터를 크게 비춘다든지, 비극적인 흑인사를 기반으로 깊이 있는 메시지가 담긴 음악을 꾸준히 발표 중인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에게 영화 음악을 맡긴 것도 같은 맥락이다. 켄드릭 라마는 여러 공연을 통해 아프리카의 마더랜드 이미지를 끌어온 바 있다.
[블랙 팬서]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속하여 타 영화와 영향을 주고 받겠지만, 한편으론 최대한 거리를 두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유독 주인공인 블랙 팬서가 등장인물 중 가장 매력이 없는 점도 그렇다. 이것이 오히려 블랙 프라이드 마더랜드 신화를 부각하고, 독자적인 영화로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같은 [블랙 팬서]를 최근 몇 년 사이 할리우드의 경향인 ‘정치적 올바름’의 몇 가지 항목으로 평하고 넘어가는 것은 너무 안이하다. [블랙 팬서]는 수 십 년간 이어 온 블랙 파워/블랙 프라이드 운동의 잔상과 방향성이 노골적으로 투영되고 작동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또한, 기존의 정서적인 틀에서 찾던 마더랜드의 가치를 블록버스터 슈퍼 히어로 영화의 형식을 통해 몇 단계는 격상시키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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