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백인들이 문화적인 측면에서 흑인들을 부러워했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비싼 스포츠카를 몰며 으스대는 모습. 입에는 늘 비속어와 약(drug)을 달고 살며, 걸핏하면 총으로 사람을 쏴죽이겠다고 협박한다. 바로 힙합 속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이미지다. 사실 지금의 힙합은 엔터테이먼트 사업으로, 랩과 퍼포먼스에서 드러나는 랩퍼의 이미지는 그들의 실제 삶과 100% 동일하진 않다. (예동현 필자의 ‘힙합 속 구라의 역사’ 글 참조)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이런 쇼를 하는 것일까? 바로 돈이 되기 때문이다. 흑인음악, 그리고 그들의 문화는 오래전부터 그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생각보다 많은 백인들이 흑인음악을 즐기고 있는데, 세계적으로 보면 흑인음악을 듣는 백인을 비롯한 비흑인의 숫자는 전체 흑인인구를 넘어선다. 한 가지 불편한 점은 그들이 소비하는 흑인문화라는 것이 고정관념에 근거한 백인들의 시선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흑인 뮤지션은 이에 개의치 않고 쇼를 하며 자신을 팔고 있다. 그런데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러한 엔터테이먼트 사업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자 함이 아니다. 가치판단 전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척(?) 하는 흑인음악이 어찌하여 비단 흑인뿐만 아니라 백인에게도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는 지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백인은 흑인을 동경하고 있다(?)

 

지금은 흑인대통령 오바마가 연임을 하고 있는 미국이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 내 흑인들은 백인보다 열등한 민족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보수주의자는 이러한 생각에 변함이 없는 듯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백인들이 문화적인 측면에서 흑인들을 부러워했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첫 번째 역사적 근거는 ‘민스트럴 쇼(Minstrel Show)’다. 민스트럴 쇼는 19세기 중엽 이래 1910년대까지 미국에서 활발히 상영된 노래와 춤, 스케치 등으로 엮은 독특한 뮤지컬 쇼로 백인 가수가 얼굴을 검게 칠하고 흑인의 민요나 흑인풍의 가곡을 노래하는 것이 인기였던 쇼다. (한국으로 치자면 이봉원과 장두석이 했던 시커먼스를 떠올리면 되겠다.) 흑인 분장을 한 민스트럴 쇼는 흔히 반-흑인적인 패러디로 인식되는데, 최근의 학자들은 당시 흑인분장을 했던 백인배우들과 인터뷰를 근거로 민스트럴 쇼가 잠시나마 백인이 흑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장이었다고 주장한다.

 

민스트럴 쇼가 흥행했던 19세기는 아직 노예해방이 되기 전으로, 당시 모든 흑인은 노예였다. 그럼에도 백인이 흑인을 동경했다니 대체 무슨 소리일까? 노예계급이었던 흑인의 삶이 고단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때의 백인들의 삶이라고 해서 힘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당시 미국에는 유럽 각지에서 이주해온 하층민 백인들이 아주 많았으며, 그들은 흑인 노예 못지않은 강도 높은 노동을 해야만 했다. 모두가 그렇다고 할 순 없지만, 대부분 흑인 노예들은 정해진 시간과 정해진 양의 노동을 하면, 대개 저녁에는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알다시피 노예는 인간이기 전에 재산으로 간주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재산이기 때문에 생계에 대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에 반해 하층민 백인들은 생계를 위해 끝없는 노동을 해야만 했다. 그러던 와중에 당시 민스트럴 쇼의 배우들과 같은 일부 백인들은 흑인노예들이 오히려 자신들보다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저녁마다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는 그들의 삶을 동경하며 그들을 연기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는 게 민스트럴 쇼에 대한 새로운 학설이다.

 

*혹시라도 있을 오해를 없애기 위해 첨언하자면, 이 학설은 노예제도의 정당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장치가 아님을 밝힌다. 오히려 이 사실을 통해 미국 남북전쟁의 주요 쟁점이었던 노예해방이 흑인들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목적보다 더 값싼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민스트럴 쇼 영상

 

그러나 그렇다고 백인들이 흑인들의 노예 신분을 부러워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 부러워했던 것은 흑인들의 여유롭고 원초적인 삶이었다. 이러한 흑인의 유희적인 모습에 대한 백인들의 동경은 1960년대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로 대표할 수 있는 로큰롤 열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미국 국력이 역사상 최고에 달했던 시기임과 동시에 존 F. 케네디의 암살이 일어났던 1960년대는 미국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¹현대 대중사회와 소비자본주의에 대한 반발로 이루어진 미국 대중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던 1960년대의 운동지도자들은 사회를 변혁하기 위해 투쟁해야 할 대상이 바로 문화의 영역에 있다고 주장했다. 1960년대의 청년들은 백인적인 것을 분리, 경쟁, 개인주의, 획일성을 표상하는 것으로 인식한 반면, 흑인적인 것은 백인의 서구문명이 잃어버린 자연성과 공동체 정신을 간직한 것처럼 보았다. 그런 점에서 백인 로큰롤이 흑인성을 전유하는 것은 백인과 흑인, 그리고 우월과 열등한 위계를 전복하면서 독특한 반사회적 미학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백인 10대들은 흑인음악을 듣고, 흑인음악을 연주하면서 소외와 고립을 극복한 ‘화이트니그로(White Negro)’가 되고 싶었다. 그들은 억압적인 기성사회로부터 이탈하여 자신만의 국가를 만들고자 하였다. 대항문화는 바로 그 ‘국가’의 문화였으며, 로큰롤은 문화혁명의 가장 강력한 첨병이 되었다.

 

거리의 백인들

 

하지만 흑인들의 문화가 단지 예능적인 측면에서 백인들의 동경을 사고 있는 것만으로는 오늘날과 같이 그들의 문화가 백인사회에 깊숙이 침투한 현상을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동질감을 획득하지 못한 문화는 일시적인 유행에 그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날까지도 문화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흑인들의 지위가 백인보다 높지 않다는 것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흑인문화가 백인들로부터 소비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미국의 많은 백인들의 삶이 흑인들과 별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백인 사회에서도 수많은 인종들이 존재하는데, 그중에서도 아일랜드인과 유대인은 피부색이 하얬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미국사회에서 흑인 못지않은 차별을 받아왔다. 앵글로-색슨족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회에서 켈트족의 후예인 아일랜드인은 쾌락을 추구하고 지능적이지 못하다는 편견, 그리고 유대인은 골상학에 근거하여 아프리카에서 넘어온 흑인에 가깝다는 이유로 백인 사회에서 차별을 받아왔는데, (흔히 미드에서 ‘천박한 아일랜드 놈들!’이라는 대사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미국에서 오랫동안 백인 하층민들의 삶을 담당했기에 흑인들과 교류 역시 빈번했다. 이들은 다른 백인 인종과 비교해서 흑인들과 상당히 자연스럽게 어울렸으며, 백인 여성과 흑인 남성 간의 혼인도 그리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흑인문화의 주요 백인 소비자들이었다. 그들의 성장과 동시에 블랙 엔터테인먼트 또한 성장해나갔다. 아일랜드인과 유대인들이 현재도 미국사회의 백인하층민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지금 역시 흑인들의 노랫말 속 삶과 별 다를 바 없는 백인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블랙 엔터테인먼트의 주요 소비자다. 비스티 보이즈(Beastie Boys), 하우스 오브 페인(House Of Pain), 그리고 에미넴(Eminem). 미국사회의 맥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우리나라 입장에선 백인 랩퍼의 등장이 굉장히 대단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이들의 등장은 알고 보면, 당연한 순서일지도 모른다. (참고로 하우스 오브 패인은 아일랜드계 미국인, 비스티 보이즈는 유대계　미국인이다.)


(좌) House Of Pain, (우) Beastie Boys

흑인문화의 많은 부분은 사실 백인이 소비한다.

 

흔히 인종 음악으로 인식되는 흑인음악이 오랫동안 그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을 살필 때 백인들의 소비가 있었음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흑인들의 음악이었던 블루스와 재즈를 대중음악으로 만든 것도 백인이었다. (물론, 흑인들의 창작물을 빼앗아서 아무렇지 않게 자기들 것인 양 발표했던 것도 백인이었다.) 그리고 흑인들에게 음악은 그들의 몇 안 되는 돈벌이 수단이었고, 이것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많은 흑인들은 백인고객들의 입맛에 맞는 음악을 만들고 연주했고, 지금의 힙합계 역시 백인들을 상대로 한 비즈니스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들 때문에 흑인음악의 진정성을 의심할 필요까진 없다. 이 글은 몇 가지 단편적인 사실들을 통해 엔터테인먼트 측면에서 백인들이 흑인음악을 어떻게 소비하는지 생각해보자는 취지에서 쓴 것으로, 위의 사건들이 흑인음악 전부를 대변하진 않는다. 그리고 모든 백인들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흑인음악을 소비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다만, 이런 맥락을 통해 ‘왜 유일하게 미국에서만 흑인음악이 장르 음악이 아닌, 팝계를 대표하는 음악으로 자리 잡고 있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일부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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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 심재겸, “하얀피부 검은가면:1960년대 미국 화이트팬더당과 ‘문화혁명’(『대중음악 』 제 10호,2012.11.). p.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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