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랩퍼와 엠씨(MC), 그 사이의 가는 선
- rhythmer | 2014-03-19 | 30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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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강일권
한때 내가 힙합과 관련하여 가장 쓸모없는 논쟁 중 하나라고 생각했던 게 바로 '랩퍼(Rapper)'와 '엠씨(MC, Emcee)'의 경계를 나누는 거였다. 미국에서 움튼 힙합이라는 낯선 문화가 한국에도 이식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90년대 중·후반), 비록, '라임 VS 메시지'나 '힙합 VS 록' 떡밥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름 뜨거운 키보드질을 유도했던 주제다. 쟁점은 주로 당시 활동하던 교포 출신 랩퍼들과 일부 언더그라운드 랩퍼들의 주장에서 비롯됐다. 랩퍼와 엠씨를 엄연히 구분해야 한다는 측과 그럴 필요가 없다는 측의 의견은 대략 '랩퍼는 단순히 랩을 하는 사람이고, 그 안에 더 심오한 메시지와 탁월한 라임을 담아내는 게 바로 MC다!'와 '호칭에서 차이일 뿐, 랩퍼와 엠씨는 결국, 같은 말이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었는데, 당연히 난 후자 쪽이었다. 전자는 호칭의 역사적 사실과 뿌리를 뒤흔들 정도로 비약이 심한 데다가 결정적으로 이것은 랩퍼와 엠씨의 차이가 아니라 리릭시스트(Lyricist)의 조건을 논하는 데 알맞은 것이었기 때문이다.물론, '랩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만 가진 랩퍼와 달리 엠씨에는 방송이나 공식적인 행사의 진행자를 일컫는 원래의 'Master of Ceremonies' 말고도 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라킴(Rakim)이 정의했던 'Move The Crowd', ' Microphone Controller', 'Mic Checka'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랩퍼의 기본적인 성향(예: 힙합 씬 초기 파티에서 DJ의 플레이에 맞춰 사람들의 호응을 유도하는)이나 행위에서 비롯된 의미들일 뿐, 메시지, 혹은 라임의 질적 높낮이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지금 와서 얘기지만, 당시 전자를 주장했던 이들 중엔 엠씨라는 용어의 기원 자체를 모르고 뱉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럼에도 랩퍼와 엠씨를 기필코 구분하려 했던 일부의 심리는 어느 정도 호소할만한 지점이 있었는데, 한국 가요계에서 랩이 소비되는 행태에 대한 반감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현진영 등의 음악이 인기를 끌면서 가요계의 복병이 된 랩은 곧 많은 가요 속에 스며들었다. 특히, 아이돌과 댄스 음악 그룹 내에선 랩을 담당하는 멤버 구성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는데,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장르적인 접근이 아닌, 매우 민망한 연유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기획사 입장에서 외모, 또는 춤은 되지만, 노래 실력이 떨어지는 (그러나 꼭 필요한) 멤버가 있을 시 랩은 그야말로 거저먹기에 딱 좋은 파트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시절 TV에선 랩을 맡은 멤버들이 '노래를 못 해서 랩 해요.'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고, 심지어 그걸 희화화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하얀 마음의 소유자였던 나조차도 그걸 볼 때마다 '뭔 수정과의 잣 같은 소리야!'라며 분노를 터트렸을 정도니 그래서 랩퍼와 엠씨를 구분해야 한다는 일부 의견을 가슴으로 이해 못 한 바는 아니다.
어쨌든 원론적으로 랩퍼와 엠씨가 같은 의미라는 건 변함없다. 힙합의 전설 중 한 명인 쿨 쥐 랩(Kool G Rap)이 리드머와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에서도 엠씨를 랩퍼의 또 다른 이름 정도로 해석하는 게 적절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공원에 갔더니 몇몇 형제들이 디제잉(DJing)을 하고 있었고, 어떤 형제들이 마이크를 쥐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그게 내가 처음으로 엠씨가 '엠씨잉(MCing)'이라는걸 하는 걸 본 거였어... 그걸 그때는 '엠씨잉'이라 불렀거든. 랩핑 대신에 엠씨잉."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랩퍼와 엠씨의 경계까진 아니더라도 랩퍼 안에서 엠씨를 구분하는 건 썩 괜찮지 않나 싶어진다. 랩 하는 사람을 일컬을 때 랩퍼가 힙합 문화 밖에서도 쓰는 일종의 보편어라면, 엠씨는 힙합 문화 안에서만 사용하는 일종의 은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엔 장르 간의 경계가 사정없이 무너져 내리는 추세가 이어지면서 꼭 힙합음악이 아니어도 랩이 주가 되는 경우가 더러 생기고 있다. 빌보드를 평정했던 싸이(Psy)의 "강남 스타일"이나 이젠 댄스-팝으로 완전히 전향하다시피 한 핏불(Pitbull)의 음악 등이 대표적이다. "강남 스타일"은 물론, 현재 빌보드 차트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는 핏불의 "Timber"가 '랩 송 차트(Hot Rap Songs)'에는 올라 있지만, 알앤비/힙합 관련 차트에는 없다는 사실이 좋은 예일 것이다. 이들은 랩을 하지만, 힙합 뮤지션은 아니며, 그렇기에 랩퍼라고 불리지만, 엠씨라고 불리진 않는다. 랩 록(Rap Rock)의 대명사였던 키드 록(Kid Rock)의 예도 마찬가지다. 그는 (힙합 음악에도 영향받은) 록 뮤지션이자 랩퍼이지만, 힙합 뮤지션은 아니다. 빌보드 차트가 애초에 랩과 힙합을 따로 분리한 건 로린 힐(Lauryn Hill)의 앨범처럼 '꼭 랩이 주가 되지 않아도 음악적으로 힙합'이라 부를 수 있는 결과물 때문이었는데, 이러한 분류가 결과적으로 작금의 음악 성향과 흐름에도 딱 들어맞게 되었다는 건 재미있다.
물론, 거듭 강조하지만 난 랩퍼와 엠씨의 원론적인 의미를 나누거나 두 용어 간에 우열을 따지는 건 여전히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만, 유독 힙합 밖에서 랩이 많이 소비되는 (아이돌 그룹, 랩 발라드 등) 한국대중음악계의 현실 속에서 심적으로나마 이러한 구분을 해보곤 한다. 비록, 이제는 저 옛날처럼 '노래 못 해서 랩 해요.'라는 무개념 발언이 나오진 않지만, 랩이 간직한 멋과 맛이 거세된 채 소비되는 건 그 수준에서 차이만 조금 있을 뿐이지, 1990년대 가요계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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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진영 (2014-08-11 17:42:08, 112.216.28.***)
- 많은 걸 생각하게 해주는 글이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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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iveMeTheCrown (2014-06-02 01:43:14, 112.156.224.**)
- ICE-T가 여러 아티스트를 만나며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하던 어느 다큐를 봤는데 누가 그랬드랬죠, "뱉기만 하는 놈은 랩퍼고, 대중을 움직이는 것은 MC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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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비 (2014-03-21 02:31:42, 58.230.106.**)
- 영화 ART OF RAP 에서 Big Daddy Kane이 MC와 랩퍼에 차이에 대해서 얘기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라임을 할 줄 알면 랩퍼고, MC는 라임을 할 줄 아는 건 물론이고 사람들 마음을 휘어잡는 사람들이다. 뭐 대충 이런 뉘앙스 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걸 그저 한 사람의 생각으로써 보기에는 너무 공신력있는 사람 아닐까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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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deon (2014-03-20 17:56:17, 121.161.107.**)
- 흑인음악 팬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법한 고민인데 잘 풀어주셨네요. 어차피 힙합이 뿌리가 아닌 이 곳 한국 대중음악계에서는 랩이라는 요소의 한계점이 명확한것 같습니다. 씁쓸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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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로윈1031 (2014-03-20 02:48:36, 125.139.11.**)
- 좋은글 아주 잘봤습니다!. 저도 당연히 여기고 있던 부분이고 많은분들도 그럴텐데 이렇게 꺼내어서 정확히 얘기해보는 경우는 없었던거 같네요.
이게 리드머의 장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정의를 하는게 살짝 위험해 보일수도 있지만 필진분들의 좋은의도로 애정이 담긴 글을 쓰시는게 느껴져 이런글은 언제든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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