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드머
스크랩
  • [칼럼] 디스는 문화가 아니다
    rhythmer | 2014-08-18 | 57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1년 전 이맘때 즈음 벌어진 '컨트롤 대전'부터 최근 그룹 에이코어 멤버 케미의 박봄 디스 사건까지, 디스(dis, 혹은 diss/'disrespect의 준말')는 이제 우리나라에서 담배 이름만큼이나 유명해졌다. 여러 비판과 논란을 부르고 있는 엠넷의 랩 예능 프로 [쇼미더머니]에서도 '눈물', '가사 까먹기', '머더뻐커' 등과 함께 디스는 매우 중요한 키워드다. 문제는 왜곡된 정보와 인식이 만연하다는 것. 일례로 당장 포털 사이트에 '디스'를 검색하면 지식백과 부문 가장 첫 줄에 나오는 '시사상식사전'의 정의부터 한숨짓게 한다. 여기선 디스를 '힙합의 하위문화 중 하나'로 요약하고 있는데, 이는 실제 많은 힙합팬들이 인식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부터 확실히 하고 넘어가자.

     

    디스는 문화가 아니다. '힙합 문화의 일부'라는 말도 틀린 것이다.

     

    여기저기서 '디스 문화'라는 말을 종종 쓰곤 하는데, 일단 'diss culture'라는 말 자체가 없기도 하거니와 생각해보라. 남을 까는 게 문화라니아무리 공격성과 비판성이 강한 힙합 음악이라지만, 힙합 뮤지션들이 디스를 문화로 인식하거나 정의하진 않는다. 무엇보다 디스가 힙합 씬에서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코카콜라 대 펩시콜라, 버거킹 대 맥도날드 등은 대표적인 광고계의 디스전이며,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여야 간 비방도 디스나 다름없다. 게다가 그 시작을 따지자면, 'Hija'로 대표되는 중세시대의 풍자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단지 디스가 힙합 장르 내에서 가장 빈번하고 활발히 이루어지기 때문에 랩/힙합의 대표적인 키워드 중 하나가 된 것뿐이다. 랩은 '개성을 중시하고 할 말은 하는 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더불어 자신감이 미덕인' 미국 사회의 분위기가 가장 원초적이고 예술적이며, 상업적으로 표면화된 음악 장르라 할 수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디스를 받아들이는 가장 바람직한 자세는 이러한 랩/힙합 음악의 특성에 대한 선이해 후, 엔터테인먼트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사진: 버거킹의 맥도날드 디스 광고 중 하나

     

    많은 이가 디스전을 이야기할 때 투팍(2Pac) 대 노토리어스 비아이쥐(The Notorious B.I.G/이하 '비기')로 대변되는 '90년대 동부와 서부 힙합 씬 간의 전쟁을 회고한다. 최초 친구였던 이들이 오해와 한 여자 때문에 벌인 디스는 투팍이 연고지와 음악 스타일을 서부로 갈아타고 뒤늦게 데뷔한 비기도 랩스타가 되면서 곧 동부 힙합과 서부 힙합 씬 전체의 대립으로 번졌다. 당시 투팍과 비기의 측근 랩퍼들은 물론, 각 지역을 대표하는 많은 랩퍼들이 디스곡과 언론 플레이를 쏟아냈는데, 결국, 팍과 비기 모두 정체불명의 괴한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을 끝으로 이 희대의 음악전쟁이 종식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디스전이 마치 세계 역사 속 위대한 전쟁의 하나인 것처럼 기록, 혹은 기억되는 건 많은 힙합팬이 이른바 '진정성'의 환상만을 가장 크게 대입하는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대 디스전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고 진지했으며, 위험했다. 그런데 진정성 못지않게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지점은 바로 동부와 서부의 대립이 낳은 힙합 음악의 질적 성장과 상업적 성과다. 개인적인 분노가 바탕이 됐지만, 음악 스타일의 대결로 확대됐고, 이는 뮤지션들이 가사와 프로덕션적으로 지역색을 견고히 함과 동시에 질적으로 더욱 심혈을 기울이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그 결과 힙합 장르의 엄청난 대중적, 상업적 성공을 불러왔다. 이뿐만 아니다. 상대에게 지지 않기 위해 평소보다 더 가다듬고 뱉는 랩핑은 수많은 이에게 청각적 희열을 선사했고, 서로를 공격하는 가사 속에서는 그 시절 힙합이 흑인들의 사회 속에서 의미하던 바를 비롯하여 내포하고 있던 문제점까지 공론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를 비롯하여 유명한 디스전은 전부 그럴듯한 명분과 그 명분을 설득력 있게 포장할만한 음악과 (뮤지션들의) 실력이 뒷받침되었다는 점이다. 서부 갱스터 랩계의 양대 산맥이었던 데스로우(Death Row) 대 루스리스(Ruthless), 2000년대 최고의 디스전으로 회자하는 나스(Nas) 대 제이지(Jay Z),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가 여러 명의 랩퍼들을 향해 도발했던 '오리지널 컨트롤 대전', '미국판 감성 랩(Emotional Rap)'을 둘러싼 푸샤 티(Pusha T) 대 드레이크(Drake)의 대결 역시 그렇다  


     

    그러나 동부와 서부 간의 끝내줬지만, 비극적이었던 전쟁이 끝난 이후 일어난 디스전들이 엔터테인먼트적인 노림수에 기인한 경우가 많았던 건 사실이다. 이 부분은 아이스 큐브(Ice Cube)를 위시한 몇몇 랩퍼들도 밝힌 바인데, 실제 많은 디스에서 이전보다 명분이나 동기가 부족했고, 때문에 나스와 제이지 건에 관해서도 '둘이 짜고 친 고스톱인 것 같다.'라는 의견이 상당히 힘을 받을 정도였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미국 본토에서 발발하는 많은 디스전과 이를 바라보고 즐기는 음악 팬들의 상황은 마치 미국 프로레슬링 'WWE'와도 같다. 랩퍼들은 각자의 스탠스와 캐릭터를 바탕으로 라임과 플로우를 기술 삼아 서로 공격·방어하고, 링의 내부와 외부에서 끊임없이 상대를 비방하며 쟁점을 만들어내는 랩퍼들의 대결에 사람들은 그것이 짜인 각본이거나 중2병에서 비롯된 유치한 싸움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편을 나누고 열광한다. 그리고 랩퍼들과 기획사 역시 이러한 음악 팬들의 반응과 심리를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힙합 디스전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주목해야 할 건 음악 팬들이 이러한 디스전에 '엉터리'라며 손가락질하기보다 기꺼이 즐기고 있다는 점이다. 저들이 싸우는 이유가 정당한지 그렇지 않은지, 가치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는 더 이상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바로 디스를 주고받는 랩퍼들의 실력이 뒷받침되고 태도, 혹은 행보가 흥미로운 배경을 만들어 준 덕이다. 미국까지 갈 것도 없다. 한국에서 일어난 전례 없는 대규모 디스전 '컨트롤 대전'이 화제를 모은 것도 그 불길 속에 뛰어든 랩퍼 중 대부분이 출중한 실력을 지닌 이들이었고, 그 실력을 기반으로 뱉은 결과물의 완성도가 탁월하여 디스의 배경이 된 드라마의 극적인 감흥이 배가 된 덕이다.


     

    이쯤에서 근래 한국힙합 씬에서 벌어지고 있는 디스와 공개되는 디스곡들의 수준을 돌아보자. 정규 앨범은 차치하고 믹스테입 한 장 분량의 결과물도 낸 적 없는 이가 대뜸 디스곡부터 들고 나오고, 앨범을 냈더라도 아직 실력이나 행보 면에서 스스로를 증명하기에도 벅차 보이는 이들이 (그들만 잔뜩 진지한) 디스전을 펼치는가 하면, 평소 신파 감성의 발라드 랩을 하던 이들이 갑자기 '열혈 힙합 뮤지션'으로 빙의한 디스곡을 내기도 한다.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다는 표현이 딱 맞아떨어지는 경우다. 그렇다 보니 지금의 디스전들은 상업적인 효과 면에서도 철저하게 실패하고 랩퍼들의 유리 멘탈만 확인시켜준 채, 많은 힙합 팬들의 냉소를 자아내고 있다.

     

    힙합 역사 속에서 디스는 아무리 전략적이더라도 자신의 실력과 행보에 자신 없는 랩퍼들에겐 그림의 떡과도 같았다. 분명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좋은 홍보 도구가 되지만, 상대에게 패배하거나 밑천이 드러나는 순간 신인이라면, 정식 데뷔도 하기 전에 커리어를 접을 수도, 베테랑이라면, 그동안 쌓아온 커리어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디스는 랩 게임 안에서도 만반의 준비와 배경이 필요한 게임이다. 그러므로 음악과 행보 면에서 인정받지 못한 상태로 준비되지 않은 자가 무작정 하는 디스는 민망함만 부를 뿐이며, 그런 랩퍼는 자신이 'Wack'임을 공식 인증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디스가 만약 진짜로 문화였다면, 실력이 어떻든, 명분이 어떻든, 행보가 어떻든, 누구도 함부로 돌을 던질 수 없을 것이다. 그 나름대로 문화를 향유하는 행위로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어쩌겠는가.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디스는 문화가 아닌 것을….  

    57

    스크랩하기

    • Share this article
    • Twitter Facebook
    • Comments
      1. 할로윈1031 (2014-08-25 17:31:37, 110.12.77.**)
      2. 하위문하는 배틀이죠. 누가 사전에 저런글을 등록했는지 참나.
    « PREV LIST 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