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너무 빨리 잊어버린 '앨범'의 가치와 무게에 대하여
- rhythmer | 2015-06-19 | 31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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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많은 이가 앨범의 가치는 떨어졌다는 걸 기정사실로 한다. ‘싱글의 시대’라는 말이 나온 지도 오래다. 그리고 아쉽지만, 적어도 한국 음악 시장에서 이는 상당 부분 맞는 얘기다. 음악 감상의 패러다임이 변화함에 따라 앨범의 상업적인 가치는 하락했고, 이 같은 현상은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대중음악의 흐름을 이끌고 있는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을 대하는 뮤지션과 매체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온도 차는 확연히 다르다. 제작이 점점 움츠러들면서 ‘앨범’, 정확하게는 ‘풀렝스(Full-Length) 앨범’이라는 포맷 자체의 가치 또한, 곤두박질친 한국 음악계와 달리 저들은 지금도 많은 양의 앨범을 찍어내고 평가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소장과 수익의 가치는 떨어졌을지언정 앨범이 지니는 무게감은 유효하다.특히, 힙합 음악계에서 이를 잘 체감할 수 있다. 뮤지션들은 앨범 판매만으로 수익을 내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음에도 스스로 브랜드를 높이고 활동의 기반으로 삼는 데 여전히 앨범을 이용하고 있다. 단지 그 배포 방식이 100% 유료였던 것에서 무료 공개를 포함하여 다양하게 바뀌었을 뿐이다. 그 결과 한국의 많은 이가 무의식적으로 인지하는 것과 달리 오히려 한 해 동안 발표되는 앨범의 양은 이전보다 많아졌다. 그리고 담론의 대부분은 앨범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미국 시장과 한국 시장을 일대일 비교하는 건 무리다. 무료 앨범, 혹은 믹스테입(Mixtape)을 통해 음악적으로 인정받고 인지도를 높이게 되면, 굳이 여러 현실적인 부분과 타협 없이도 공연을 비롯한 유명 레이블과 여러 아티스트의 작업에 참여하며 수익을 낼 수 있는 미국과 달리 한국에선 기껏해야 일부 장르 팬의 지지를 얻는 게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적어도 한국의 영세한 규모의 레이블이나 뮤지션이 (EP 포함) 앨범을 제작한다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현실은 뼈저리게 공감할만하다. 내가 정말 안타까운 건 창작 집단보다도 한국의 음악 산업 관계자들 대부분과 매체, 그리고 장르 팬들이 앨범을 대하는 태도다. 뮤지션들이 앨범을 만들고 내는 것에 회의적이게 된 데에는 언급한 이들의 책임도 크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현재의 한국 힙합 씬을 들여다보자. 음원 사이트의 최신 앨범란을 보면, 하루에도 평균 10개가 넘는 결과물이 쏟아지지만, 이중 앨범이 차지하는 비율은 현저히 낮다. 어느샌가 힙합 사이트의 게시판에서 앨범에 대한 이야기는 몇몇 자극적인 싱글이나 방송에 출연한 랩퍼들의 이야기에 밀려났다. 심지어 이전에는 거론조차 하지 않았던 자격 미달 랩퍼들을 둘러싼 논쟁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는다. 물론, 대중이든 마니아든 그때그때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고 누군가가 잘못됐다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다만, 현 한국 힙합의 상황은 무게추가 너무나도 기형적으로 기울어 있다는 게 문제다. 좋지 못한 제작 여건과 장르 팬의 지지마저 사라지면서 앨범 제작의 필요성에 회의적이 되니 발표되는 양은 계속 줄어들고, 나오는 앨범이 별로 없다 보니 그나마 형성되던 일부 담론마저 사라져간다. 그야말로 악순환의 연속이다. 이런 상황에서 앨범의 가치를 지켜주고 끊임없이 상기해줘야 할 마지막 한계선은 결국, 평론가와 매체다.국외의 경우를 살펴보면, 이는 더욱 극명하다. 피치포크(Pitchfork), 롤링 스톤(Rolling Stone) 같은 종합 장르 매거진부터 힙합디엑스(HipHopDX), XXL, 소울트랙스(Soultracks), 올힙합(Allhiphop) 등의 장르 매거진 모두, 리뷰의 중심이 되는 건 싱글이 아닌 앨범이다. 가장 업데이트 주기가 빠르고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뉴스란 역시 특별한 이슈가 결부되거나 슈퍼스타급이 아닌 이상, 싱글에 대해선 다루지 않는 편이다. 이건 그들이 앨범이라는 포맷의 무게감과 한 뮤지션을 논하는 데에 앨범이 중요하다는 걸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그런데 한국은 어떠한가? 어느 순간 평단과 매체는 '트렌드를 무시해선 안 된다.'라는 미명, 또는 업데이트 양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방편 아래 싱글 이야기, 혹은 리뷰를 쏟아내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앨범과 싱글의 무게를 동일시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일조하고 있는 탓에 문제라 생각한다.
일례로 네이버 오늘의 뮤직에서 '이주의 발견-국내' 코너를 보자. 나 역시 '해외' 부문의 필자로 참여 중인데, 원래 앨범만을 선정하던 이 코너에 언젠가부터 '국내' 부문에서는 싱글 리뷰도 올라오기 시작했다. 참고로 이 코너는 국내든 국외든 선정부터 내용까지 모두 필자의 권한이다. 간혹 네이버가 다뤄야하는 음원을 정해주는 걸로 오해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 철저하게 필자 개개인의 주관 아래 이루어진다. 한 주간 발표된 음원 리스트가 전해지면, 그중에 각각 4개의 결과물을 선정하여 쓰는데, 이 리스트에는 싱글과 앨범이 뒤섞여 있다. 그러나 '이번 주 국내 앨범 추천 플레이리스트를 소개합니다.'라는 부연 설명이 말해주듯 어디까지나 해당 코너의 핵심은 '앨범'이다(한국에서는 '싱글 앨범'이라는 말이 종종 쓰이는데, 이는 잘못된 용어다. 싱글은 그냥 싱글이다.).
그럼에도 일단 싱글을 배제하고, 앨범만을 대상으로 선정하는 해외 부문과 달리 국내 부문에서는 싱글과 앨범을 동일한 비중과 분량으로 다루고 있다. '앨범을 소개'하는 코너에서 음악 전문가들마저 그 경계를 너무 무책임하게 허물어트리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봐야하지 않을까? 난 싱글과 앨범을 다루는 비중은 대개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며, 앨범을 낸 아티스트와 그렇지 않은 아티스트 역시 차별을 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린 앨범 한 장보다 좋은 싱글 하나가 더 낫다.'라고 할지라도 말이다.무엇보다 이렇게 많은 이가 무의식적으로 앨범을 경시하는 풍조 속에서 '잘 만든 앨범'이 갖는 가치마저 퇴색하고 있다. 뮤지션의 인지도나 뒤태에 목숨 거는 연예매체들이야 그렇다 치고 전문가나 장르 팬들까지도 이 부분에 무감각해지다 보니 랩퍼들은 점점 더 좋은 앨범을 만드는 데 신경 쓰기보다 가끔 피처링이나 싱글을 내면서 인맥 쌓기와 방송 타기에 열을 올리는 형국이다. 인정받는 앨범 한 장 없는 랩퍼들이 여기저기서 한국 힙합을 대표하는 인물로 포장되거나 베테랑 행세를 하고, 몇 년에 이르는 활동 기간에 단 한 장의 앨범조차 내지 않은 랩퍼들이 싱글 몇 개와 방송 출연으로 행사 페이를 올리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 씁쓸한 일도 드물다. 비단 힙합 씬뿐만 아니라 한국대중음악계 전체에 퍼진 문제라 더 암담하다. 그저 노래 좀 잘하고 오래 활동했다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쉽게 '전설'이란 칭호를 남발하고 있는가. 걸작 없이도 스타는 될 수 있지만, 거장이나 전설이 될 순 없다.
나스(Nas)가 한때 부진한 커리어의 연속이었음에도 많은 이의 기대와 관심을 계속 잡아 둘 수 있었던 게 '93년 클래식 [Illmatic] 덕이었다는 것, 투팍(2Pac)과 노토리어스 비아이쥐(The Notorious B.I.G.)가 전설로 추앙받는 이유가 단지 요절해서가 아니라 걸작을 남겼기 때문이라는 것, 이젠 사업가로서 이미지가 더 강한 제이지(Jay Z)가 디디(Diddy)를 비롯한 다른 힙합 산업계의 거물들과 달리 계속 아티스트로서도 존경받는 배경에 [The Blueprint]라는 역작이 있다는 것 등등, 베테랑들의 사례를 차치하더라도, 오늘날 힙합 씬에서 ‘잘 만든 앨범’은 단순한 랩스타를 넘어 진정한 아티스트로 인정받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건이다.
가까운 예를 들어볼까?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가 시대의 아이콘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건 “Bitch, Don’t Kill My Vibe” 같은 싱글이 아니라 두 장의 죽여주는 앨범 덕이며, 빅 크릿(Big K.R.I.T.)이 인정받는 것도 ‘90년대 남부 힙합의 계승자라는 캐릭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걸출한 앨범으로 증명한 덕이다. 또한, 제이콜(J. Cole)과 빅 션(Big Sean)은 이미 많은 돈을 버는 스타가 됐음에도 지난 앨범에 가해진 비판에 신경 쓰며, 끊임없이 걸작에 대한 욕구를 내비치고 있다. 이렇듯 지금도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앨범을 만드는 일'이고, 평단과 장르 팬이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중심에 놓이는 것 역시 '앨범'이다.싱글을 무시해야한다거나 배제해야한다는 얘기가 절대 아니다. 싱글은 아주 오래 전부터 아티스트와 앨범에 대한 기대치를 높이는 매개체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리고 갈수록 앨범의 가치는 더 희석될 것이고, 어쩌면 앨범이라는 단위 자체가 재정의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땅에선 너무 빨리 앨범의 소중함과 가치를 잊어가는 듯하여 매우 섭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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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건화 (2015-06-27 15:35:57, 114.204.19.***)
- 디지털 음원 시대에서 어쩌면 너무 당연한 귀결 같습니다..
앨범을 구매하지 않아도 들을 수 있고, 선택 취사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한 방송에서 양희은 씨가 자신이 앨범을 내게 된 계기를 이야기를 하셨는데..
한 선배가 가수는 앨범을 내야 된다?? 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앨범을 내고 정식??으로 가수로 데뷔하게 되었다는..
디지털 싱글이든 미니 앨범이든 넘쳐나는 시대에 가수라는 타이틀을 달고 정규 앨범이 없는 것은.. 그리고 오랜 생활에도 정규 앨범이 꾸준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 갑의 위치로 올라가는 한국 힙합씬의 현재라고 생각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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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hopenhauer (2015-06-20 17:30:33, 121.88.163.***)
- 역시 한국힙합신 최후의 지성이자 양심인 강일권님 답게 좋은 칼럼을 써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도대체 왜 앨범한장(full-length)이 싱글에 비해 우월한 예술적 가치를
갖는지에 대한 논의도 이어지면 더욱 설득력 있을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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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lanq (2015-06-19 23:55:43, 110.10.227.***)
- 100% 공감가는 글이네요 저는 장르팬으로서 음악은 무조건 앨범단위로 듣는편인데 주변 지인들이 음악을 추천해달라그럴때 제가 '앨범'을 추천해주면 거기서 좋은곡은 뭐냐고 타이틀곡은 뭐냐고 앨범전체다 듣기엔 지루하다 이런말들을 많이 하는데 그런말을 들을때마다 앨범의 가치가 너무많이 퇴색된건 아닌가하는...생각이들어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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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sym (2015-06-19 23:13:57, 1.232.141.**)
- 전에 친구한테 일매릭 추천하려고 풀앨범
유투브 링크해서 줬더니 다음날 뭐가 이렇게 기냐고 말했었는데 이글 보여줘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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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지훈 (2015-06-19 19:42:35, 1.241.216.***)
- 2012년 즈음에 록 밴드 부활이 신보 앨범 [Purple Wave]를 들고 나왔을 때, 김태원 아저씨가 하셨던 말이 생각나네요.
안녕하세요, 김태원입니다. 요즘 같이 EP가 범람하는 시대에 저희는 정규 앨범을 발매했습니다. 어쩌구저쩌구...
한국에서 발매되는 full-length 앨범의 수량이 얼마나 많이 줄었는지를 돌이키게 만드는 발언이었습니다. 그리 의미심장한 멘트는 아니지만 이상하게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네요.
돌이켜 보니 국내에서 EP인지 maxi single인지 구분하기도 모호한 미니 앨범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지게 된 것도 꽤 오래된 것 같습니다. 저도 full-length 앨범을 선호하는 입장이어서, 어째서 앨범의 가치가 이렇게 허무하게 떨어지게 되었나 싶고 회의감도 많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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