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인디음악인의 죽음에 우리가 분노하는 이유
- rhythmer | 2011-03-07 | 11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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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은 원래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이진원 씨의 사망 소식을 접했던 당시 정치/문화 비평지 [시도와 가능성](4호)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그러나 독립 예술인이 처한 부당한 현실에 대한 언론과 세간의 관심이 또 한 번 냄비 끓듯 불타올랐다가 흐지부지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워 일부분 수정을 거쳐 리드머로 옮깁니다.사람이 한번에 생각할 수 있는 최대량이 140자라도 되는 양, 140자에 생각을 담아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방식으로 온라인 세상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는 트위터(Twitter)는 추모의 모양새마저 바꾸고 있다. 지극히 개인적이어야 할 법한 추모의 공기는 스스로 택한 사람들에서부터 자신을 택한 사람들까지 모든 이가 연결되어 공유되는 트위터와 만나 적극적으로 변화했다.
원맨밴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을 이끌던 이진원씨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이런 특성과 만나 트위터에서 유례없는 인디음악인에 대한 추모 열기를 만든 것은 물론, 비현실 어딘가에 존재할 법한 인디(Independent) 음악인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꺼내 보이며 공론화하는 현상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분노가 되었다. 그렇다면 그 분노의 시작점은 어디일까?
사실 우리가 인디음악인의 삶의 질 자체를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음악을 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며, 변호사가 되기 위해 사시에 합격하거나 부동산을 개업하려고 공인중개사 자격을 얻거나 하는 식의 절차마저 없다. 그냥 내가 이 글을 쓰다가 "난 지금부터 인디뮤지션이다!!"라고 선언하고 기타라도 튕기면 곧 인디음악인이 된다. 음악 하는 사람에 대한 존경(Respect)은 한번 다 젖혀놓고 말해보자는 것이다. 결국, 인디음악인이 사회 안에서 문화 노동자, 혹은 문화 생산자로서 제대로 보상받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 도달했다. 조금 허탈하지만, 결국, 답은 돈이고 핵심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음원 수익분배의 불합리함이다.
이 문제에 대해 더 다가가기 전에 여기서 음악이라는 위대하고 아름다운 이름 아래서 다소 ‘찌질’해 보일지라도 대중음악인과 인디음악인을 철저하게 분리해야겠다. 퉁 쳐서 말하자면, 대중음악인은 대중이 원하는 음악을 추구하며 여러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대중음악 시장의 한 부분으로 투신한다. 음원 수익분배의 불합리함은 개선해야 할 대상이지만, 대중음악인에게는 일단 시장 참여자로서 미리 계산하고 감내해야 할 전제이다. 그 전제가 포함된 나름의 체계화 된 수익구조 안에서 게임의 룰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많은 대중음악인이 음악 외에 따라야 할 것들을 대신해 줄, 그 방면에 도가 튼 ‘기획사’ 혹은 ‘소속사’라고 불리는 대행업체에 적을 두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반면, 인디음악인은 자신을 위한 음악을 한다(고 믿는다). 개인적인 작업이기에 결과물이 완성되기까지 그들이 음악 외에 머리를 굴려야 할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그것이 독립적이라는 말뜻 그대로의 인디음악 판을 규정짓는 매력이자 규칙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그들이 결과물을 들고 자랑스럽게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발생한다. 앞서 말한 음원 수익분배의 불합리함은 그들에게 그저 감내해야 할 것도, 미리 계산기 두드려 가며 다른 수익 활동으로 극복해야 하는 버릴 수 없는 업보도 아니다. 그냥 그대로 직면한 불합리한 현실일 뿐이다. 아무런 준비 없이 온전히 그 불합리함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거부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 중 낭만적인 이들은 음악인의 운명 혹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의 대가 정도로 애써 자기 합리화하니, 인디음악인들의 상실감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열 받는 상황이 사람들의 분노를 설명할 수 있을까? 내가 걸린 감기가 남의 죽음보다 심각하다는 말도 있다. 사람들은 생각만큼 다른 이들이 직면한 부당한 현실에 행동하지 않는다. 특히나 왠지 현실과 동떨어져 사는 듯한 예술가들의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반대로 소비자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자.
대중음악 소비자와 인디음악 소비자의 차이는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달렸다. 대중음악인은 자신의 것을 들고 소비자를 찾아간다. 그들은 소비자의 취향에 맞추어 만든 완성도 높은 음악을 들려주며 음악을 판다. 공급자가 적극적이다. 반면에 인디음악의 소비자는 스스로 공급자를 찾아간다. 예상 밖 발견의 기쁨, 남의 개인적인 작업물을 견디어 낸 후 비로소 느끼는 희열이 인디음악을 듣는 큰 목적들이기 때문이다. ‘네가 나에게 이 음악을 들려주었으니 돈을 지불한다.’가 아니라, ‘내가 돈을 지불할 테니 너만의 음악을 들려달라.’는 식이다. 소비자가 적극적이다. 단순히 원하는 음원을 얻은 대가로 지불되면 잊히는 돈이 아니라 그 안에 많은 목적성이 부여될 수밖에 없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돈을 스스로 꺼내 전달했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존경을 표하는 최고의 방법이지 않은가. 말장난 같지만, 모든 것은 태도의 문제이다.
똑같은 액수라도 인디음악인에게 향하는 것은 순수한 지지와 존경을 담고 있다. 그런데 다른 이익관계자들은 그것을 매우 심각하게 훼손한다. 분노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중간에서 적정의 수수료를 챙겨야 할 그들이 소비자들의 지지와 존경의 표시로 인정받아야 할 액수까지 수수료라는 딱지를 붙이고는 챙겨가고 있다. 특정 목적을 위해 지불된 자신의 돈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누군가에게 대부분 강탈된다는데 누가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나 싶다. 누구나 잘못 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대중음악인들은 적당히 쉬쉬하고 인디음악인들은 싸울 엄두를 못 내고 있던 부당한 음원 수익분배의 현실은 자신의 피 같은 돈이 빼앗겼다고 판단하고 분노하기 시작한 인디음악 소비자들에 의해 뒤늦게라도 제대로 공론화되고 뜯어 고쳐질지도 모르겠다. 아니 희망하고 지지한다.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이 남긴 인디음악인의 서글픈 현실을 그려낸 자의식 가득한 주옥같은 곡들은 이진원씨의 죽음을 통해 또 다른 생명력을 얻었다. 그의 노랫말 하나하나는 앞서 말한 분노를 시작하게 했고, 또 최대치로 끌어 올렸다. 이진원 씨의 안타까운 죽음은 물론 목적성이 없었지만, 그가 남긴 음악들은 인디음악 소비자의 분노와 만나 그가 겪었을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싸움의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그리고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움직임의 혜택은 모든 음악인, 예술인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더욱더 분노하자. 달빛요정이 하늘에서 자신의 음악이 헛되지 않았음에 웃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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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jyd (2011-03-08 12:24:22, 118.42.85.**)
- 좋은 대안이 나와서 어서 빨리 개선되었으면 합니다
제2의 달빛씨나 최고은씨가 나오지 않기를..
가장 중요한건 '관심' 같습니다
냄비현상에 허위터로 글 몇자 싸는걸로 '나도 무언가 했음' 이런 마인드는 아닌거 같습니다지속적인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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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경빈 (2011-03-07 22:33:22, 125.177.51.**)
- 잘보고 공감하고갑니다 그리고 R.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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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anon (2011-03-07 21:41:08, 128.135.108.**)
-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인디 음악이라는 것은 또 다른 특별한 상품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상품성이라는 것은 결국 곧 소비자의 인디 음악에 대한 인식의 결과일 터인데,인디 문화라는 상품이, 기존의 인디 문화 소비자외의 소비자, 즉 비-인디문화 소비자에게 얼마만큼이나 노출이 되고 그 존재감을 알리는지에 대해 줄곧 즐겨 생각해 보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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