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드머 토픽] Earth, Wind & Fire 공연 후기: 감동의 40년산 소울 그루브
- rhythmer | 2009-12-24 | 1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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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앤비/펑크(Funk)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있는 전설적인 그룹 어스, 윈드 앤 파이어(Earth, Wind & Fire/이하 ‘지풍화’)의 내한공연이 있던 날, 난 정신이 반쯤은 나가 있었다. 온종일 머릿속에서 지풍화의 명곡 메들리가 울려 퍼지는 바람에 도무지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던 것은 물론이요, 공연 시간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흥분으로 호흡은 가빠졌고, 가슴이 벅차올라 터질 것만 같았다.
울렁대는 가슴을 부여잡고 간신히 공연장에 입성하여 지정된 좌석에 앉아있기를 십여 분, 드디어 밴드의 오프닝 연주가 시작됐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의 형님들이 “Boogie Wonderland”의 그루브를 몰고 무대에 등장하자 앉아있던 관객들이 함성을 지르며 한꺼번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역시 한국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도는 세계 최고다! 지풍화도 단번에 그걸 느낀 게 분명했다. 1시간 40여 분의 공연이 끝날 때까지 열정적인 연주와 열렬한 율동, 그리고 완벽한 보컬은 에너지를 잃은 적이 없으니까…. 난 잠시나마 예순이 넘은 그들의 나이를 걱정했던 불경스러움을 자책해야 했다.
내가 태어난 시대('70) 롤러장을 수놓았다는 명곡 “Boogie Wonderland”를 시작으로 77년 히트곡 “Jupiter”와 “Serpentine Fire”가 이어지는 초반부터 관객들은 이미 넘실대는 펑키한 그루브에 흠뻑 취해가고 있었다. 감미로운 코러스가 함께하는 느긋한 바운스 넘버 “Sun Goddess”, 그룹에게 첫 번째 빌보드 차트 1위의 영광을 안겼던 “Shining Star” 등이 계속됐고, “Kalimba Story”에서는 필립 베일리(Philip Bailey)가 제목에 등장하는 아프리카의 ‘엄지손가락 피아노’ 칼림바를 높이 들고 흥겨운 리듬 속에 청아한 울림을 조화시켰다.감미로운 소울 넘버가 다수 포진된 공연의 중반부는 보컬과 화음에 집중하며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Brazilian Rhyme”은 귀를 간질이는 코러스와 스캣이 어우러지는 가운데 살랑거리는 그루브를 전했는데, 듣는 순간 이 곡을 샘플링한 라스코(Roscoe)의 “Smooth Sailin’”이 오버랩되는 흥미로운 경험까지 할 수 있었다. 힙합팬들에게는 이번 공연이 주옥 같은 힙합 명곡들의 원곡을 라이브로 감상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추가된 셈이었다. 다음 곡인 “That's The Way Of The World”의 아름다운 선율에 모두가 젖어들 무렵, 드디어 “After The Love Has Gone”이 흘러나오며 이 날의 하이라이트 중 한 신을 장식했다. 필립 베일리의 경이로운 팔세토 보컬이 시작되자 장내 곳곳에서는 감격에 겨운 탄성이 흘러나왔고, 난 멤버들이 연출하는 화음에 도취되어 그저 두 손을 꼭 모은 채, 온몸에 돋는 소름을 만끽했다. 그리고 “After The Love Has Gone”의 깊은 여운은 역시 베일리의 가성이 압권인 “Reasons”가 이어받았다.
계속해서 “In The Stone”과 “Got To Get You Into My Life” 등이 이어지며, 공연은 서서히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그때까지도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명곡들인 “September”, “Fantasy”, “Let’s Groove”는 나오지 않았다. 100% 셋 리스트에 있을 것이 분명한 이 세 곡들 중에서 과연 어떤 곡이 대미를 장식하고, 앙코르 곡이 될 지 예상하고 있는데, 익숙한 색소폰과 키보드 라인이 흘러나왔다. 그건 분명 “Fantasy”이었다. 일렁이는 베이스와 기타 리프 위로 베일리의 가성이 포개지는 순간의 그 감동이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인 한글로도 그 순간의 감동을 다 표현하지는 못할 것 같다. 자, 그리고 곡이 끝나는 순간 반전이 일어났다. “September”와 “Let’s Groove”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 것이다. ‘아 이런 짓궂은 형님들 같으니...'. ‘Do you Remember?’라는 가사와 함께 곡이 시작되자 장내는 순식간에 광란의 디스코 클럽으로 변했다. 20대부터 60대까지, 힙합 패션부터 정장까지, 모든 이가 온몸을 들썩이며, 지풍화가 전해주는 에너지를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아마 지난 17일의 코엑스 대서양홀은 이 날 전국에서 가장 핫!한 클럽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피날레 퍼포먼스는 “Mighty Mighty”까지 이어졌고, 앙코르 무대인 “Getaway”를 끝으로 국내 공연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의 공연은 막을 내렸다.
매번 좋은 공연을 보고 나면, 쉽게 그 자리를 뜨지 못했지만, 이번엔 더욱 그랬던 것 같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활동하고 있던 아티스트들을, 그것도 올해로 자그마치 결성 40주년이나 된 이 전설적인 거성들의 연주와 보컬, 그리고 몸짓 하나하나는 눈 앞에서 보고 있으면서도 보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비록, 그룹의 리더인 모리스 화이트(Maurice White)가 건강상 문제로 함께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이 날의 공연은 2000년대 들어서 감상했던 수많은 공연 중 가장 소울풀하고 가슴 벅찬 공연이었다.
공연을 앞두고 주위에서 가장 많이 들린 이야기가 지금이 아니면 지풍화의 공연을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상대적으로 낮은 외국 뮤지션들의 내한공연 횟수와 이들의 나이가 맞물렸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들은 이날 무대에서 분명히 언급했다. ‘이곳에 한 번도 와본 적 없었지만, 또 오게 될 것 같다.’라고. 난 그 말을 믿는다. 이 날 쉬는 시간도 없이 무대 위를 방방 날아다니던 노장들의 모습을 본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그 외 기억의 단편들-“Kalimba Story”의 무대가 끝나고 랄프 존슨과 보컬 및 퍼커션을 맡은 B. 데이비드 와잇월스(B. David Whitworth)이 펼친 퍼커션 배틀은 충만했던 리듬감은 물론, 두 베테랑의 리듬 대결을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 돋는 장면이었다.
-공연의 중반부쯤, 필립 베일리는 스타일리스틱스(The Stylistics)의 명곡 중 하나인 “Betcha by Golly, Wow”를 불렀는데, 색다르면서도 죽여줬다. 국내에서는 잘 알려진 곡이 아니라 그런지, 관객들의 반응은 다소 조용했지만, 아마 이 곡을 알고 있던 이들은 분명히 깊은 여운을 느꼈으리라….
-내가 있던 자리에서 대각선으로 보이는 자리에 (내 학창시절을 함께한 라디오 프로의 주인공!) 배철수 씨가 있었는데, “Fantasy”-“September”-“Let’s Groove”로 이어지는 순간에 절제하는 듯했지만, 미치도록 흥에 겨운 게 분명한 어깨의 들썩거림이 잊히지 않는다.
-여전히 죽지 않은 실력으로 신들린 드러밍을 보여준 랄프 존슨(Ralph Johnson)이 멤버 한 명 한 명을 소개하던 코너에서 마지막, “the original Earth, Wind & Fire members”라는 말과 함께 자신을 포함한 필립 베일리와 버딘 화이트(Verdine White/베이스)를 소개할 때는 하마터면, 눈물을 찔끔 흘릴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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