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드머 토픽] 소울 음악을 향한 또 하나의 시선, Blue-eyed Soul 1부
- rhythmer | 2010-06-08 | 5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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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드머의 새로운 객원 필자 이용석 님의 R&B 기획기사, 그 첫 번째 주제는 바로 블루-아이드 소울의 역사입니다. 총 3부작으로 연재될 예정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블루-아이드 소울(Blue-eyed Soul)’이란 어쩌면 경솔한 단어일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소울 음악이라는 역사 자체가 백인, 흑인 그 인종에 상관없이 뮤지션, 프로듀서, 어레인져 등이 함께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무대 위에 파란 눈을 한 백인 아티스트 하나만을 지칭하는 듯한 ‘블루-아이드 소울‘이란 용어는 어찌 보면 소울 음악에 대한 무례일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좁은 의미기 아닌,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이 용어 자체를 ‘백인 뮤지션이 중심’이 된 음악이라고 생각해보면, 위와 같은 이견은 어느 정도 침식될 수 있을지 모른다.Timi Yuro, The Righteous Brothers
이 역사의 시초는 6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명반을 만들어내며 흐름을 이끈 선구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아마 그 선구자들 중 가장 첫 번째로 뽑을 수 있는 이가 바로 L.A.의 티미 유로(Timi Yuro)일 것이다. 이탈리안 집안에서 자란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끼를 보여 가족이 경영하던 레스토랑 무대에서 종종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렇게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실력과 무대 경험을 쌓고 자연스럽게 뮤지션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녀는 활동 초반 당시 로이 해밀턴(Roy Hamilton)의 “Hurt”를 리메이크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고, “What’s A Matter Baby”와 같은 곡을 히트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가족에 집중하기 위해 잠시 활동을 중단하고 80년대에 윌리 넬슨(Willie Nelson)과 함께 잠깐 복귀하였는데, 안타깝게도 이때 후두암이 발병하여 무대 위에 그녀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녀가 L.A.에서 두각을 나타낼 무렵, 같은 시기에 빌 메들리(Bill Medley)와 바비 햇필드(Bobby Hatfield)가 더 패러무어스(The Paramours)라는 그룹명으로 데뷔 앨범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그들은 더 라이쳐스 브라더스(The Righteous Brothers)라는 이름으로 그룹명을 바꾸었는데, 일설에 따르면, 공연 중에 한 흑인 관객이 “That’s Right-eous, Brothers!(친구들 연주 좀 할 줄 아는군!)”라고 칭한 게 이유였다고 한다. 그들은 초반에 남부 캘리포니아 파세디나 출신의 로큰롤 그룹인 돈 앤 듀이(Don & Dewey)의 “Koko Joe”와 “Justine”를 리메이크 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이후, 필 스펙터(Phil Spector)가 합류한 이후에는 직접 자신들의 곡인 “You’ve Lost That Lovin’ Feelin”이나 “Unchained Melody” 같은 명곡들을 탄생시키면서 이 분야의 전설적인 그룹으로 자리매김 하게 된다.
Chips Moman와 American Sound Studio, 그리고 Dusty Springfield블루-아이드 소울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자 반환점이 되어준 곳이 멤피스에 있는 칩스 모맨(Chips Moman)의 아메리칸 사운드 스튜디오(American Sound Studio)였다. 조지아 출신 촌뜨기였던 칩스는 50년대 후반에 스택스(Stax)의 전설적인 훵크 주자 부커 T. 존스(Booker T. Jones)와 그룹을 결성하여 얼마간 함께 음악 활동을 이어나갔는데, 이 인연을 바탕으로 그는 64년도까지 스택스에서 일하기도 했으며, 이후, 그 경험과 자산을 바탕으로 이 스튜디오를 설립하였다. 그의 스튜디오는 대부분 과거 컨트리 백인 연주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이 스튜디오에서 제임스 앤 바비 퓨어러파이(James & Bobby Purify), 조 텍스(Joe Tex), 로이 해밀턴, 오스카 토니 주니어(Oscar Toney Jr.) 등등의 뮤지션들과 함께 작업하였다.
한편, 당시 이미 몇 장의 앨범을 발매한 더스티 스피링필드(Dusty Springfield)도 이곳에 오게 된다. 그녀는 자신을 상업적으로만 취급하는 모타운과 결별하고 애틀랜틱 레이블과 새로이 계약을 체결한 상태였다. 애틀랜틱 레이블은 그녀를 당시(68년도) 한창 주가가 오르고 있던 멤피스에 있는 이 스튜디오로 보냈다. 이들은 멤피스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작업했다고 하여 단순하게 앨범명을 [Memphis In Soul]로 정하기도 했는데, 훗날 이 앨범은 해당 계통의 가장 중요한 앨범이자 훌륭한 앨범으로 등극하게 된다. 이 앨범의 면면을 살펴보면 세션에서부터 프로듀서까지 흑인들의 손이 거의 닿지 않는걸 알 수 있다. 세션으로는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과거 컨트리 백인 연주자들이 참여하였으며, 프로듀서로는 ‘R&B’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하며 이 장르의 주춧돌을 닦아 놓은 저널리스트이자 프로듀서인 제리 웩슬러(Jerry Wexler), 그리고 이후에 EMI 레이블의 부사장까지 역임하게 되는 터키 출신 프로듀서 아리프 마르딘(Arif Mardin), 1930년대에 스테레오 방식과 8트랙 방식을 최초로 도입한 역사적인 엔지니어 톰 다우드(Tom Dowd)가 참여하였다.
Rare Earth, Teena Marie, Bobby Caldwell비슷한 시기에 모타운은 레어 어스(Rare Earth)라는 백인 소울/훵크 그룹과 계약을 맺게 된다. 그리고 이 당시 모타운은 새로운 하위 레이블을 하나 더 설립하였는데, 이름은 없는 상태였다. 이 소식을 들은 레어 어스의 멤버들은 베리 고디(Barry Gordy)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새로운 레이블의 이름을 자신들의 그룹명인 ‘레어 어스’로 짓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게 되는데, 고디는 이를 괜찮게 생각하여 승낙하게 된다. 그리고 레어 어스는 자신들의 이름이 들어간 새 레이블의 첫 번째 뮤지션이 되었으며, 이 레이블은 R. 딘 테일러(R. Dean Taylor)나 더 프리티 띵스(The Pretty Things) 같이 모타운에서 활약한 수많은 블루-아이드 소울 뮤지션들의 성지가 되기도 하였다. 레어 어스는 모타운의 전설적인 프로듀서 노만 화이트필드(Norman Whitfield)가 프로듀싱한 여섯 번째 앨범 [Ma](1973)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고, 잦은 멤버 교체와 멤버 간 소송 사건에도 현재까지도 그룹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때 모타운 사운드의 정체성을 확립해준 홀란드-도저-홀란드(Holland-Dozier-Holland) 트리오는 모타운을 떠나 핫 왁스 레코즈(Hot Wax Records)라는 레이블을 설립하면서 더 플래밍 엠버(The Flaming Ember)라는 백인 남성 그룹을 영입해 괜찮은 성과를 거두었으나 아쉽게도 이들은 앨범 한 장을 발매하고 더는 주목을 받지 못했다.
70년대 중반에는 티나 마리(Teena Marie)가 모타운과 계약하며, 씬에 등장하였다. 훵크의 전설인 릭 제임스(Rick James)가 프로듀싱한 그녀의 데뷔 앨범 [Wild And Peaceful]는 사실 다이아나 로스(Diana Ross)를 위해 만들어진 앨범이었지만, 릭 제임스가 마음을 바꿔 티나 마리에게 앨범을 줬다고 한다. 또한, 그녀가 뮤지션으로서 막 활동을 시작했을 무렵 라디오 프로그래머들은 음악만 듣고서는 티나 마리가 전혀 백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아프리칸-아메리칸(African-American)이라고 잘못 소개한 적도 있다고 한다. 때문에 일설에 따르면, 그런 오해를 종식시키고자 두 번째 앨범부터는 그녀의 사진을 앨범 커버로 삼았다고. 이런 경우는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78년도에 "What You Won't Do For Love"를 히트시켜 유명해진 뉴욕 멘하탄 출신의 바비 콜드웰(Bobby Caldwell) 또한, 현재까지도 종종 많은 이가 아프리칸-아메리칸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굉장히 흑인스러운 보컬과 음악을 구사한 뮤지션이었다. 특히, 그의 음악은 후배 뮤지션들에게도 굉장히 많이 재조명되었는데, 대표적으로 “What You Won't Do For Love”를 샘플링한 알리야(Aaliyah)의 "Age Ain't Nothin' But A Number"와 투팍(2Pac)의 “Do For Love”, 그리고 “My Flame”을 샘플링한 노토리어스 B.I.G(The Notorious B.I.G.)의 “Sky’s The Limit” 등을 꼽을 수 있다.
The Soul Survivors, Johnny Daye또한, 필리 소울 씬에서도 더 소울 서바이버스(The Soul Survivors)라는 백인 남성 밴드가 등장했다. 이들은 전설적인 2인조 프로듀서 갬블 앤 허프(Gamble & Huff)의 도움을 받아 “Expressway To Your Heart”라는 곡을 빌보드 4위까지 올리고 100만 장 넘게 앨범을 판매하는 등 굉장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초창기 성공을 이어가지 못하고 몇 장의 앨범을 끝으로 자취를 감추었다(이들은 최근 미국 동부 지역의 클럽 등지에서 공연을 하며 다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질세라 스택스 레이블 또한, 피츠버그에서 ‘하얀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이라고 불리던 자니 대이(Johnny Daye)라는 뮤지션을 영입해 부커-T 앤 더 MG’s(Booker T & the MG's)의 멤버인 스티비 카퍼(Stevie Copper)가 작곡한 “What I'll Do for Satisfaction”와 “Stay Baby Stay”라는 곡을 히트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성공에도 그는 단 한 장의 정규 앨범도 발매하지 못한 채,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라져 버렸다. “What I’ll Do for Satisfaction”은 훗날 자넷 잭슨(Janet Jackson)이 그녀의 커리어에 있어서 가장 성공한 앨범인 [Janet]에서 “What’ll I Do”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하기도 하였다.
초기 블루 아이드 소울 뮤지션들의 면모를 자세히 살펴보면, 해당 뮤지션의 음악적인 부분보다는 레이블 중심의 상업적인 부분이 부각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음악적으로 부족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다만, 세대가 지날수록 다양한 레이블이 생겨나고 대중과 접할 수 있는 여러 수단이 생겨나면서 해당 뮤지션들의 음악적 독립성이 점점 커지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백인 뮤지션 들만의 음악이 점차 윤곽이 잡히게 되었고 흑인들은 할 수 없는 그들만의 음악이 탄생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2부에서 계속
기사작성 / 이용석(Contributor), 편집 / 리드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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