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드머 토픽] 찬란했던 LaFace의 영광과 몰락 2부 '몰락의 순간들'
- rhythmer | 2014-05-21 | 7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
1990년대를 지배하던 라페이스(LaFace)는 소속 아티스트가 많지 않았지만,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불행을 겪었다. 이들 중 그 어떤 것도 직접적으로 라페이스가 매각되는 이유를 제공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불행들이 라페이스가 비운의 레이블이라는 이미지로 각인되는데 일조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영광의 순간들에 이어 이제 비운의 역사를 돌아보자.
LaFace, 몰락의 순간들
Damian Dame의 사망라페이스의 첫 아티스트였던 데미안 데임(Damian Dame)은 아이러니하게도 라페이스의 그 어떤 아티스트보다 빨리 커리어를 마감할 수 밖에 없었다. 듀오 모두 2집을 내기 전에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1994년 6월 27일 데 데임(Deah Dame)은 자동차 사고로 가족들을 남겨둔 채 갑작스럽게 35세로 생을 마감했다. 1995년 데미안(Demian)은 충격으로 라페이스를 떠나 칩 레코드(Chip Records)라는 소규모 레이블에서 데 데임에게 헌정하는 솔로 앨범 [Damian 199sex]를 발표했는데, 안타깝게도 데미안 또한, 1996년 6월 27일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당시 29세). 놀라운 건 데미안이 데 데임의 사망 후, 정확히 2년이 지난 날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데 데임과 인연에 의해서였을까?
TLC를 둘러싼 악재재능 있는 말괄량이 소녀들이었던 TLC는 한 순간에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대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큰 성공은 때론 축복이 아닌 재앙이 되기도 하는데, TLC도 마찬가지였다. 데뷔 앨범 [Ooooooohhh... On the TLC Tip]으로 엠씨 해머(MC Hammer)와 전국 투어를 다니던 도중, 티-보즈(T-Boz)가 갑자기 쓰러졌다. 그 원인은 티-보즈가 선천적으로 가진 유전병, 겸형 적혈구 빈혈증(Sickle cell anaemia)에 의한 것이었다. 약간의 격렬한 움직임에도 심각한 빈혈을 일으키는 병으로 장기 파손이나 생명의 위협까지 일으킬 수 있는 이 병은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 하지만 데뷔 전 칠리(Chilli)가 프로듀서 댈러스 오스틴(Dallas Austin)과 사귀다 발각되자 매니저인 페블즈(Perri "Pebbles" Reid)가 칠리를 내쫓고 새로운 멤버를 뽑으려던 전례가 있어, 티-보즈 자신도 내쳐질 것이 두려워 병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건강은 회복했으나 엠씨 해머의 전국 투어엔 더 이상 참여할 수 없었다.
레프트 아이(Left Eye)의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성격 때문에 TLC는 또 한 번의 큰 악재를 맞게 된다. 데뷔 앨범 직후 레프트 아이는 미식축구 팀 애틀랜타 팰컨스(Atlanta Falcons)에서 뛰던 와이드 리시버 안드레 리슨(Andre Rison)과 사귀게 되어 그의 집에 살게 되었다. 하지만 그 나이 대의 운동 선수들이 많이 그렇듯, 그도 줄곧 다른 여자들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레프트 아이는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 하고 욕조에서 그의 소지품을 모조리 태우다, 안드레 리슨의 2층짜리 집 전체를 전소시켜버린다. 이때가 1994년 6월 9일, 결국, 레프트 아이는 10,000달러의 벌금과 5년 간의 구류 및 재사회화 과정을 선고 받게 된다. 벌금 탓에 레프트 아이의 금전적 부담도 컸지만, 2집 [CrazySexyCool]의 녹음이 막 시작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2집에서 레프트 아이의 비중은 크게 줄어들게 된다.
TLC와 Toni Braxton의 파산
TLC와 토니 브랙스턴(Toni Braxton)은 라페이스를 대표하는 여성 알앤비 아티스트의 얼굴들이었다. 이들은 그래미 상과 복수의 플래티넘을 달성한 앨범이 2개씩 있었으며, 동시대 다른 여성 알앤비 아티스트들 중 가장 성공한 이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에겐 또 다른 공통점이 있었으니, 둘 모두 커리어의 정점에서 파산 신청을 했다는 것이다.
라페이스의 수장 엘에이 리드(Antonio "L.A." Reid)의 아내 페블즈는 TLC를 빨리 데뷔시켜 돈을 벌기 위해 헐값에 가까운 계약을 그들에게 던져주면서 "계약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는 식의 태도로 반강제적인 계약을 받아냈다. 계약의 세부 내용은, 일주일에 25달러의 식비를 포함한 경비 수당을 받고, 앨범 판매량의 최대 7%(플래티넘 달성 시 최대 8%)를 나눠 갖는, 일반적인 메이저 아티스트들이 맺는 계약의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TLC는 직접적으로 돈을 지급하길 거부하는 페블즈의 행동에 수상함을 느끼고 직접 변호사와 상담해 실제 계약 내용과 경비를 계산했다. 약 8달러짜리 앨범을 천 만 장 넘게 팔았던 TLC는 라페이스에 지금까지의 모든 비용을 지불하고, 레프트 아이의 방화에 대한 벌금과 티-보즈의 병 치료에 필요한 돈까지 모두 고려했을 때 약 20만 달러(현재 가치로 한화 약 3억 2,600만원)의 빚을 진 것으로 드러났다. 앨범 판매로 개인에게 돌아간 수익은 총 15,000달러에 불과했고, TLC라는 이름 세 글자를 사용하기 위해 페블즈에게 한 글자당 100만 달러를 지불해야 했다. 결국, 그녀들은 1996년 그래미 상을 수상한 직후 기자회견에서 자신들이 파산했음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파격을 감행한다. 이후 페블즈를 떠나 새로운 매니저 빌 디긴즈(Bill Diggins)를 고용하고, 3집 [FanMail] 발매 전 라페이스와 앨범 판매량의 18%를 받기로 하는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며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TLC의 계약이 완전한 부정 계약이었다면, 토니 브랙스턴의 계약은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1994년부터 앨범 판매량의 15%를 받기로 계약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토니 브랙스턴은 TLC보다 더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스타였고, 솔로 아티스트였다. 본인이 행사에서 입는 의상이나 경비, 매니저와 변호사에 드는 돈을 고려 했을 때, 1998년 초를 기준으로 약 280만 달러의 빚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레이블과 매니저 모두 토니 브랙스턴의 정확한 경비 사용에 대해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참사였다. 1997년 12월, 토니 브랙스턴은 라페이스에 계약이 부당하다는 내용으로 고소를 신청한다. 15%라는 비율이 대략 연간 20만 장에서 50만 장 정도를 파는 평균적인 메이저 아티스트의 비율에 불과하고, 베이비페이스(Babyface)와 엘에이 리드가 라페이스의 대주주로서 가져가는 수익 외에 프로듀서로서 추가적으로 앨범 판매량의 5%를 가져가는 것이 부당하다는 내용이었다. 라페이스는 이에 계약금 천 만 달러에 19%짜리 계약을 제시했지만, 이 역시 빚을 갚을 순 있으나 '토니 브랙스턴이 토니 브랙스턴으로서 살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라며 거절했다. 라페이스는 이에 그녀를 맞고소했고, 어쩔 수 없게 된 그녀는 파산법 7장에 근거하여 파산을 신청했다. 이 일련의 법정 공방 속에서 결국, 법원은 라페이스의 계약이 부당하다며, 토니 브랙스턴의 손을 들어 주었다.
비록, 서로 연관이 없는 두 번의 파산 신청이었지만, 라페이스를 대표하는 아티스트들이 파산을 한 번도 아닌 두 번이나 신청했다는 점은 라페이스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었다. 특히, 페블즈는 이후 TLC와 계약 문제로 엘에이 리드와도 불화를 일으킨 끝에 결국, 이혼하게 된다.
행방불명 된 Az Yet1996년 데뷔 앨범 [Az Yet]으로 성공적인 한 해를 보냈던 애즈 옛(Az Yet)은 이듬해 잠깐의 활동 끝에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사라져버렸는데, 더해서 정말 수상하기 짝이 없는 행보를 보인다. 소리소문 없이 라페이스를 나와 드림웍스(Dreamworks)와 계약한 애즈 옛은 마찬가지로 특별한 활동 없이 지내다 2002년 레이블을 떠난다. 별 다른 소식이 없다가, 2004년에 갑자기 새로운 애즈 옛을 결성한다고 하며 [That Be U]라는 EP를 발매한다. 특이한 점은 이 새로운 그룹에는 애즈 옛을 맨 처음 결성한 세 명이 아닌 추가로 들어왔던 멤버인 대릴 앤서니(Darryl Anthony)를 중심으로 완전히 새로운 멤버들로 구성됐다는 것이다. 그후 다시 잠잠하던 그룹은 2007년에 원래 멤버였던 션 리베라(Shawn Rivera), 디온 앨런(Dion Allen), 케니 테리(Kenny Terry), 마크 넬슨(Marc Nelson)이 다시 뭉쳐서 지금까지 간간이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이 수상한 행보의 이유는 2006년이 되어서야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밝혀졌다. 원년 멤버인 션 리베라와 디온 앨런에 의하면, 애즈 옛이 라페이스에 들어가게 된 계기는 베이비페이스의 장모였던 재클린 맥쾀(Jacqueline McQuam)이 그들의 데모 테이프를 들고 왔기 때문인데, 이에 잭클린 맥쾀이 그룹의 매니저가 되었고, 베이비페이스의 관리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라페이스가 당시 애틀랜타와 로스 앤젤레스(Los Angeles)에 사무실이 각각 있었고, 이 둘간의 알력 다툼, 더 나아가서는 엘에이 리드와 베이비페이스 간의 알력 다툼까지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애즈 옛이 실제로 관리를 받은 것은 로스 앤젤레스의 베이비페이스에 의해서였지만, 라페이스에서 싱글과 앨범을 발매할 지 결정할 권리는 본 사무실인 애틀랜타의 엘에이 리드에게 있었다. 하지만 베이비페이스는 애즈 옛을 '자기의 그룹'이라고 생각했고 '엘에이 리드의 그룹'이라고 불리길 싫어했던 것이다. 자신들의 목소리가 사라진 애즈 옛에겐 라페이스에서 낸 앨범으로 얻은 명성이 큰 소용이 없었다.
더욱 충격적인 건, 계약 단계에서 추가로 영입한 대릴 앤서니는 사실 베이비페이스가 임의로 데리고 온 사람이고, 음악적으로 애즈 옛에서 한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2004년에 발매한 [That Be U] 또한, 전 곡이 션 리베라, 케니 테리, 디온 앨런 등, 세 명의 목소리로 세션 작업이 됐고, 저들은 그냥 그 곡 위에 립싱크를 했을 뿐이라고 한다. 이 모든 사건의 시발점은 결국, 엘에이 리드와 베이비페이스 간의 힘겨루기였던 것이다.
Organized Noize의 탈퇴, 그리고 Goodie Mob의 분열
라페이스에 아웃캐스트, 구디 몹(Goodie Mob) 등등, 던전 패밀리(Dungeon Family)의 대부분이 소속된 건 순전히 오거나이즈드 노이즈(Organized Noize) 덕분이었다. 오거나이즈드 노이즈는 엘에이 리드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았고, 그들은 던전 패밀리의 재능있는 아티스트들을 하나 둘씩 라페이스와 계약시켰다. 하지만 오거나이즈드 노이즈가 계약시킨 어린 아티스트들이 성공한 후, 그들 스스로 레이블과 직접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오거나이즈드 노이즈의 영향력은 약해졌다. 무엇보다 자신들의 계약과 얽힌 금전적인 문제로 라페이스와 마찰을 빚던 도중, 예전의 '큰 형님' 행세를 하려 하다 되려 후배 아티스트들과 사이가 안 좋아지는 걸 인식한 후, 1997년 초, 그들은 라페이스를 떠나게 된다. 이는 후배 아티스트들을 위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이것이 그들에게, 특히, 구디 몹에게 다른 방향으로 작용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씨로 그린(Cee-Lo Green)은 구디 몹의 4명 중에서도 눈에 띄는 존재였다. 아웃캐스트의 앨범에 처음으로 단체 피처링한 "Git Up, Git Out"에서도 씨로의 벌스는 소스(The Source)지에서 '이번 달의 라임'으로 선정되었고, 그의 노래 실력 또한 다른 세 멤버가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씨로는 항상 솔로 커리어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던 도중 오거나이즈드 노이즈가 라페이스를 떠나고 던전 패밀리와 라페이스 간의 결속이 약해지면서, 그는 외부로 눈을 돌렸다. 훗날 날스 바클리(Gnarls Barkley)를 결성할 DJ 데인저 마우스(DJ Danger Mouse)와 함께 의기투합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결국, 1999년 말, 씨로는 구디 몹을 떠나 솔로 커리어를 시작한다. 구디 몹의 중심이었던 씨로가 떠난 뒤, 그룹의 실적은 매우 저조해졌고, 아리스타와 계약이 파기되면서 떠돌이 신세가 되어 버린다. (물론, 최근에는 다시 네 멤버가 뭉쳐서 앨범까지 발매했다.)
OutKast, LaFace와 Rosa Parks의 소송
1999년 발매된 아웃캐스트(OutKast)의 3집 [Aquemini]는 아웃캐스트 음악의 색깔이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앨범이었지만, 싱글 성적이 썩 좋지는 않았고, 그나마 제일 성공한 곡은 “Rosa Parks”였다. 로사 팍스(Rosa Parks)는 이른바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Montgomery Bus Boycott)'으로 불리는, 흑인은 버스 뒷좌석에만 앉는 것이 허용되던 인종차별의 시대에 처음으로 앞 자리에 앉아 저항한 장본인이다. 1999년 3월, 로사 팍스는 자신의 이름을 무단으로 상업적인 목적아래 사용한데다가 곡의 내용 또한 부적절하다며 아웃캐스트와 라페이스를 고소했다.
사실 아웃캐스트의 “Rosa Parks”는 로사 팍스와 큰 관련이 없는 곡이다. 빅 보이(Big Boi)의 말에 따르면 비트를 먼저 받고 난 뒤 후렴구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고(Ah-ha, huss that fuss/Everybody move to the back of the bus), 무엇에 대해 얘기할 곡인지 정하지도 않은 채로 제목을 “Rosa Parks”라 해버렸다고 한다. 자유로운 작업을 통해 은유가 폭발하는 가사를 만드는 아웃캐스트의 방식에 의해 만들어진 제목인 것이다. 결국, 그 곡은 자신들의 남부 힙합이 지금까지의 힙합을 흔들 정도로 신나고 대단한 음악을 하겠다는 내용이 됐고, 로사 팍스에 대한 직간접적인 비유는 앞서 언급한 후렴구의 한 라인에 불과했다. 실제로 지방 법원에서는 1999년 기각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로사 팍스의 변호사와 그녀의 보호자, 재단이 금전적인 이득을 노리고 계속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고, 결국, 라페이스와 아웃캐스트는 6년 여 간의 시간 동안 이 큰 의미 없는 소송에 돈과 시간을 투자해야만 했다. 6년이 조금 지난 2005년 4월 15일이 되어서야 이 소송은 아웃캐스트와 라페이스가 로사 팍스 측에 공개되지 않은 액수의 합의금을 주고, 로사 팍스 재단의 봉사 프로그램에 동참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Shanice의 임신, 그리고 탈퇴
주로 신인 아티스트를 슈퍼스타로 키워오던 라페이스가 섀니스(Shanice)를 영입한 건 흥행 보증수표를 얻기 위해서였다. 섀니스의 보컬은 알엔비 여성 보컬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였고, 베이비페이스와 작업만으로 [Shanice]는 평균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0년 2월 14일, 그녀는 불현듯 코미디 배우 플렉스 알렉산더(Flex Alexander)와 결혼하고, 곧 임신을 하게 된다. 당장의 활동을 기대했던 라페이스는 섀니스의 임신 사실에 격노했고, 결국, 2년 남짓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앨범 하나만을 남긴 채 섀니스는 라페이스를 떠나게 된다.
Left Eye의 사망
TLC의 그 어떤 멤버보다도 음악적 욕심이 많았던 레프트 아이는 휴식과 음악적 영감을 얻기 위해 주기적으로 온두라스에 방문하곤 했다. TLC로서 음악 활동을 뒷전으로 하고 온두라스에 요양하러 가는 레프트 아이 탓에 처음에는 내부 갈등이 많이 있었지만, [FanMail] 활동과 함께 그런 그녀를 서서히 나머지 멤버들도 이해해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레프트 아이가 마음의 안식처로 삼았던 온두라스에서, 2002년 4월 25일 갑작스러운 자동차 사고로 그녀는 사망했다. 또 다른 차를 피하려다 차가 여러 번 굴렀는데, 옆 자리에 있던 여동생 레이나 로페즈(Raina Lopes)는 무사했고, 안전 벨트를 매지 않았던 레프트 아이는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부주의한 성격이 또 한 번의 화를 일으킨 것이다. 비록, 레프트 아이의 사망은 라페이스의 매각 이후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파산 후 활동을 재개하던 TLC에게 마지막으로 내려진 철퇴라는 점, 그리고 라페이스의 불행이 죽음에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났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글: 오규진, 감수 및 편집: 강일권7
-
-
- 할로윈1031 (2014-05-22 13:28:12, 175.202.126.***)
- 데스로우 못지않은 막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