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드머
스크랩
  • [리드머 토픽] Bad Boy Records 20년, 영욕의 역사를 함께한 12인
    rhythmer | 2014-08-20 | 12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그 모든 것은 배드 보이 레코즈(Bad Boy Records)에서 시작되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마치 힙합과 그 탄생을 함께 한 듯 느껴지는 막대한 부의 과시, 개인 제트기, 풀장, 유명 디자이너의 옷, 그리고 거기에 항상 곁들여지는 총까지. "이전에도 부의 과시는 분명히 존재했다. 그러나 퍼프 대디가 선보인 자본의 힘은 그와는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라고 루츠(The Roots)의 퀘스트러브(?uestlove)는 쓰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국내에서조차 힙합이라는 문화가 부와 힘의 과시로 치부되는 것에 대해 많은 우려가 존재하는 것에 비하면, 정작 그러한 선입견이 형성되는 데에 큰 공헌을 한 배드 보이 레코즈는 의아할 정도로 언급되지 않는다. 올해 배드 보이 레코즈의 창립 20년을 기념하며, 그 영욕의 역사를 함께해 온 이들 중 몇몇이나마 다시 돌아보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1.
    퍼프 대디(Puff Daddy)

     

    퍼프 대디, . 디디, 디디.. '그 친구는 요즘 이름이 뭐야?'라는 질문이 미국 미디어에서 심심찮게 농담으로 등장하는 남자, 퍼프 대디(본명 Sean Combs). 그러나 그의 이름만큼이나 많은 의문을 빚는 것은 '과연 배드 보이 안에서 퍼프 대디가 하는 일이 뭐냐'일 것이다. 음악인과 계약하고, 앨범을 기획하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가 '공동 프로듀싱'했다고 표기되는 트랙들은 정말 퍼프 대디의 손길이 1g이라도 들어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어수룩한 음악인들에게 일을 시킨 뒤 자신이 크레딧을 챙겨갈 뿐일지? 후술할 이지 모 비(Easy Mo Bee)와 갈등 때문에 더욱 의심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 기회에 확실히 말해두고 싶은 것은 '제작 총지휘자(Executive Producer)'로서 퍼프 대디의 역량이다. 뉴욕에 위치한 업타운 레코즈(Uptown Records)에서 인턴으로 시작해 스카우터의 자리까지 올라간 바 있는 그는 배드 보이 레코즈를 시작하기 전에도 메리 제이 블라이즈(Mary J. Blige)의 데뷔 앨범 [What's the 411?]과 후속작 [My Life]의 제작을 총지휘한 바 있다. 두 앨범 모두 호평받으며, 메리 제이 블라이즈가 힙합-소울의 여제로 자리매김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두 앨범이 당시 유행하던 (그러나 포화 상태에 이르렀던) 뉴 잭 스윙(New Jack Swing)에서 보다 복고적인 힙합-소울로 트렌드 전환을 이끌어냈다는 사실이다. 대중이 원하는 것을 읽어내는 퍼프 대디의 상업적 감각이 돋보였다고나 할까? 배드 보이 레코즈에서도 퍼프 대디는 분명 힙합보다 알앤비를 프로듀싱하는 데에 더욱 큰 재능을 보여주었다. 미니멀하고 매끈한 사운드가 돋보이던 112(원 트웰브)의 앨범들이 그 좋은 예일 듯하다.

     

    추천 곡: Mary J. Blige - Reminisce, My Life

     

     

     


    2.
    더 힛-(The Hit-Men)

     

    더 힛-멘은 퍼프 대디의 프로듀싱 팀이다. 구성원이 명확히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팀원들이 항상 모여 작업하는 것도 아니기에 '크루'의 개념으로 보는 편이 더욱 적절하리라. 물론, 퍼프 대디 본인도 여기에 속해있다. 그러나 이미 널리 알려져 있듯, 퍼프 대디가 직접 음악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더 힛-멘의 일원인 제이-(J-Dub)은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한다. "그 친구(퍼프 대디)가 어떤 곡에 대한 아이디어를 얘기하는데, 제가 드럼 머신을 크게 틀어놓고 있었어요. '잠깐 꺼봐.' 그가 말했죠. 제가 대답했어요. '네 바로 옆에 있잖아. 그냥 네가 꺼.' 그가 말하길, '이봐 친구, 난 이게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른다고. 하지만 어떤 곡이 대박날 수 있는지는 알지.' 한 방 먹었죠."

     

    이 밖에도 퍼프 대디와 업타운 레코즈 시절부터 함께 한 처키 톰슨(Chucky Thompson), 매드 래퍼(Madd Rapper)라는 예명으로 랩 앨범까지 낸 적 있는 데릭 앤젤레티(Derick Angelettie), 얼마 전 인기 텔레비전 쇼 [Love & Hip Hop: Atalanta]에 등장해 인지도를 높인 스티비 제이(Stevie J) 등이 포함되어 있다. 공식적인 더 힛-멘의 멤버는 아니지만, 유명 프로듀싱 팀 트랙마스터스(Trackmasters)도 한때 퍼프 대디에게 '호구 잡힌'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은 적이 있다.

     

    추천곡: JAY Z - Roc Boys(And The Winner Is...)

     

     

     


    3.
    크레이그 맥(Craig Mack)

     

    이쯤 되어서 슬쩍 위키피디아(wikipedia)를 뒤져본, 그리고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배드 보이 레코즈가 정식으로 설립된 것은 1993년이었다. 그렇다면 왜 이제 와서 20주년을 기획하는가? 배드 보이 레코즈의 공식적인 첫 결과물인 크레이그 맥의 "Flava In Ya Ear" 싱글이 발매된 게 1994년이기 때문이다. 배드 보이 레코즈의 초창기 사운드를 책임지던 이지 모 비가 프로듀싱한 이 곡은 불과 몇 년 전 맥도날드 광고에도 쓰여 호평받을 만큼 세련된 사운드를 자랑한다. (재미있게도 크레이그 맥은 이 곡을 처음 듣고 '이런 유치한 비트에는 랩을 하기 싫다'고 주장했다 한다.) 거친 목소리로 매끄러운 플로우를 뱉는 크레이그 맥의 랩핑도 훌륭하지만, 이보다 더 야심차게 준비된 것은 그 직후 공개된 리믹스 버전이었다. 버스타 라임스(Busta Rhymes), 엘엘 쿨 제이(LL Cool J) 등 동부 힙합의 거성들이 참여한 이 리믹스에서 배드 보이 레코즈는 신생 레이블답지 않은 노련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정작 크레이그 맥은 여기서도 주목받지 못했다. 쟁쟁한 랩퍼들을 제치고, 한 무명 래퍼의 벌스가 사람들의 귀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추천곡: Craig Mack - Get Down, Flava In Ya Ear

     

     


    4.
    노토리어스 비아이쥐(The Notorious B.I.G.)

     

    죽은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노토리어스 비아이쥐가 여전히 '뉴욕의 왕'으로 군림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뉴욕의 과거와 미래를 잇는 특별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리라. (bar)에 딱딱 맞추는 그의 랩핑에서는 언뜻 올드스쿨함이 느껴지지만, 그 랩 안에서 피어나는 표현력과 내용은 분명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종류였다. 쿨 쥐 랩(Kool G Rap)이 처음 시도한 마피오소(Mafioso) , 빅 대디 케인(Big Daddy Kane)의 스웨거, 그리고 힙합의 한 귀퉁이를 언제나 차지하고 있던 '맨발에서 벤츠' 스토리 위에 노토리어스 비아이쥐는 다시 한번 '막대한 부의 과시'를 끼얹는다. 위에서 퀘스트러브가 인정했듯, 그것은 이전과 전혀 다른 성질의 부였다. 그의 히트곡 "Big Poppa"에서 한 구절 인용해본다.

     

    In mansion and Benzes

    멘션과 벤츠들 안에서

    Givin' ends to my friends and it feels stupendous

    친구들에게 돈을 나눠주고, 기분 째지지

    Tremendous C.R.E.A.M- Fuck a dollar and a dream

    엄청난 돈 - '1달러와 꿈'은 개나 주라지.

    Still tote gats strapped with infrared beams

    여전히 적외선 레이저가 달린 총을 쏘아대지."

     

    일견 '아메리칸 드림'의 성취를 자랑하는 듯한 이 노래는 그러나 '1달러와 꿈은 개나 줘'라는 데에서 전복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1달러와 꿈(a dollar and a dream)'은 당시 뉴욕시에서 발행하던 복권이 내세운 슬로건. 대신 그는 '적외선 레이저가 달린 총'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성취가 사회 시스템을 비웃고 법을 무시함으로써 이루어졌음을 암시한다. '이 세계는 정글이야. 돈을 벌고 승자가 되거나, 총을 맞고 죽거나.'라는 그의 메시지는 몇 년 뒤 다시 한번 피프티 센트(50 Cent)에 의해 적절하게 요약된다: "Get Rich Or Die Tryin'". 노토리어스 비아이쥐는 이렇듯 끊임없이 계속 소환되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추천곡: Craig Mack - Flava In Ya Year (Remix), The Notorious B.I.G. - Big Poppa, Warning

     

     

     


    5.
    이지 모 비(Easy Mo Bee)

     

    퍼프 대디를 만나기 전부터 이지 모 비는 이미 힙합 씬에서 널리 인정받고 있는 프로듀서였다. 그는 우탱 클랜(Wu-tang Clan)의 즈자(GZA)의 공식적인 첫 앨범, [Words From The Genius]의 대부분을 프로듀싱했으며, 이후 르자(RZA)의 첫 싱글 "Ooh I Love You, Rakeem"을 공동 프로듀싱한 바 있다. 그러나 퍼프 대디를 만나기 전, 그의 하이라이트는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의 마지막 앨범인 [Doo-Bop]을 작업한 것이었다. 재즈와 힙합의 만남은 이미 이전에도 허비 행콕 등이 선보인 바 있었으나 마일즈 데이비스는 그와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길 원했다. 이지 모 비가 만든 힙합 비트 위에서 재즈를 연주해보이는 것이다. 말년까지도 실험 정신을 잃지 않았던 마일즈 데이비스의 치열함이 엿보이는 이 프로젝트는 그러나 도중에 그가 세상을 뜨면서 이지 모 비가 마무리 작업까지 해야 했다. 거장과 협업에 이어, 그의 마지막 앨범을 마무리한다는 것은 비록 젊은 이지 모 비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웠을지언정 가장 황홀한 순간이기도 했으리라.

     

    이후 배드 보이 레코즈와 작업은 이지 모 비의 이름을 대중에게도 널리 알린 계기가 되었다. 오랜 힙합 팬들이라면 크레이그 맥의 [Project: Funk Da World], 그리고 노토리어스 비아이쥐의 [Ready To Die] 앨범을 듣다가 탄복하며, '그런데 대체 이 곡들은 누가 만든 거야?'하고 속지를 넘겨본 적 있을 것이다. 펑크(Funk)에서 루프를 적절히 잘라내고, 드럼과 베이스를 다듬은 이지 모 비의 프로듀싱 스타일은 배드 보이 레코즈가 빠르게 자리 잡는 데에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는 힙합 씬에서 사라진다. 노토리어스 비아이쥐의 [Life After Death]에서 "I Love The Dough" "Going Back To Cali"를 작업한 뒤, 갑자기 그 왕성하던 작업량을 줄인 것이다.

     

    이지 모 비는 모종의 사건 이후, 퍼프 대디가 자신을 '버렸다.'라고 주장한다. "Flava In Ya Year"의 리믹스 크레딧을 보던 중 자신의 이름이 퍼프 대디, 처키 톰슨과 함께 더 힛-멘의 일원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지 모 비는 이후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난 그 레코드를 사무실에 가져가서 따졌지. '이게 뭐지? 넌 한 게 없잖아. 처키는 저기 앉아서 지켜보기만 했잖아. 왜 크레딧이 이렇게 적혀있는지 난 좀 알고 싶을 뿐이야.' 아마 그것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 같아." 이지 모 비의 주장이 사실인지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어쨌든 이후 그의 커리어는 내리막을 걷게 된다. 2000년 발매된 첫 솔로 앨범 [Now Or Never: Odyssey 2000] 역시 그리 알려지지 못하며 '잊힌 걸작' 정도로 언급될 뿐이다.

     

    추천곡: Alicia Keys - If I Was Your Women/Walk On By, 2Pac - Temptations

     

     

     


    6.
    메이스(Ma$e)

     

    /알앤비를 다룰 때는 그토록 탁월하던 퍼프 대디의 감각도 힙합에서는 맥을 못 추는 것일까. 이지 모 비의 참여가 뜸해진 이후 배드 보이 레코즈는 그야말로 '랩퍼들의 무덤'이 되었다. 당시 배드 보이 레코즈가 내놓은 랩퍼들은 하나같이 '언더그라운드에서 주목-> 퍼프 대디에 의해 발탁됨-> 저조한 앨범 성적->후속작 연기-> 방출'의 패턴을 밟았으니 말이다. 그나마 "Whoa"로 성공을 거둔 블랙 롭(Black Rob) 정도가 예외겠으나, 결국 성공적인 커리어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메쏘드 맨(Method Man)을 영입해보기도 했지만, 이 역시 역효과만을 내었다.

     

    이렇게 무수히 사라져 간 배드 보이 레코즈의 팝-랩퍼들 중 가장 성공을 거둔 것은 메이스(Ma$e)였다. 이마저도 노토리어스 비아이쥐의 후광에 빚진 바가 절대 적지 않지만, 그나마 퍼프 대디와 (이지 모 비가 떠난) 더 힛-멘이 힙합 시장에서 거둔 가장 큰 성공이라 할 수 있으리라. 다른 '배드 보이'들과는 달리 메이스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거친 느낌에 집착하지 않는 여유, 비음 섞인 나른한 목소리, 그리고 퍼프 대디와 비슷한 듯하면서도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독특한 리듬 감각. 그러나 메이스조차도 세월의 흐름은 막아낼 수 없었다. 1999, 그의 두 번째 앨범 [Double Up]이 발매되었을 때 힙합 팬들은 이미 보다 더 자극적이고 단순한 남부 힙합의 사운드에 열광하고 있었다. 간신히 차트 상위권을 유지하며 체면치레는 하는 듯했으나, 불현듯 메이스는 '신이 나를 부른다'라며 은퇴를 선언했고, 이후, 배드 보이 레코즈는 적어도 힙합에서만큼은 결코 예전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했다.

     

    추천곡: Mariah Carey - Honey (Bad Boy Remix) The Notorious B.I.G. - Mo Money Mo Problem (Feat. Puff Daddy, Ma$e)

     

     


    7.
    릴 킴(Lil Kim)

     

    최근 '나를 놔두고 멋대로 랩의 여왕(Queen Of Rap)이라 자칭한다.'라며 니키 미나즈(Nicki Minaj)에게 시비를 거는 릴 킴의 모습은 안쓰럽기만 하다. 대다수의 힙합 팬들에게조차 그녀는 이제 노토리어스 비아이쥐의 추억을 상기시키는 유물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릴 킴이 한때 힙합 씬에서 가장 ''한 래퍼였던 이유는 단순히 그녀가 여성이었기 때문도, 갱스터와 요부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이미지의 줄타기를 했기 때문도 아니다. 여성 래퍼는 힙합의 태동기부터 계속 존재해왔으며, '여성 갱스터'나 요부의 이미지도 이미 요-(Yo-Yo), 미씨 엘리엇(Missy Elliott) 등에 의해 다루어진 바 있다.

     

    릴 킴의 역량은 기존의 이미지를 비틀어 한 단계 더 전복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에서 가장 훌륭히 발휘된다. 노토리어스 비아이쥐의 "Just Playin' (Dreams)"를 비틀어 남자 알앤비 가수에 대한 성적 판타지를 노래하는 "Dreams"'한때 나는 자지가 무서웠지. 이제는 거기에 키스를 날리지. 진짜 노는 년처럼(I used to be scared of dicks. Now I throw lips to the shit. Handle it like a real bitch)'이라는 도발적인 구절로 시작하는 "Big Momma Thang"이 좋은 예일 것이다.

     

    사람들의 짐작과는 달리, 노토리어스 비아이쥐의 죽음이 그녀의 커리어를 무너뜨렸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많다. 일단 그녀의 커리어는 지금으로서도 충분히 화려하다. 석장 이상의 플래티넘(미국 내 100만 장 이상 판매) 앨범을 지니고 있는 여성 래퍼는 그녀와 미씨 엘리엇(Missy Elliott)이 유일하니 말이다. 그 중 두 장의 앨범 [Notorious K.I.M.] [La Bella Mafia]는 노토리어스 비아이쥐 사후에 발매된 앨범이다. 2003년 작 [La Bella Mafia]부터는 배드 보이 레코즈를 떠나 그녀가 직접 앨범 제작을 지휘했다는 사실도 주목할만하다.

     

    그럼에도 릴 킴은 언제나 노토리어스 비아이쥐와 함께, 그리고 배드 보이 레코즈의 황금기와 함께 기억될 것이다. 무엇보다 릴 킴 자신이 그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녀는 여전히 노토리어스 비아이쥐를 자신의 모든 앨범 총 프로듀서로 표기하고 있으며, 따라서 저작권 수익의 일부 역시 그 유족들에게 전해진다.

     

    추천곡: Lil Kim - Dreams, Big Momma Thang Mary J. Blige - I Can Love You (feat. Lil Kim)

     

     


    8.
    페이스 에반스(Faith Evans)

     

    노토리어스 비아이쥐라는 인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크다 보니 그에 가려진 음악인들도 한둘이 아니다. 아마 페이스 에반스 역시 알앤비 씬의 흐름을 살피지 않는 이들에겐 '노토리어스 비아이쥐의 아내'로 더 기억될 것이다. 투팍과 노토리어스 비아이쥐 사이의 디스전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아 그리고 투팍과도 사귀었지?'하고 짐짓 아는 체를 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는 1995년과 2001년 사이 배드 보이 레코즈에서 석장의 앨범을 발표하며 대중과 평단 모두에게서 호평을 이끌어 낸 가수이기도 하다. 데뷔 전 알 비. 슈어(Al B. Sure)를 비롯한 알앤비 뮤지션들의 백업 싱어로 활동하던 그녀는 때마침 업타운 레코드를 떠나 자신의 레이블을 차리려던 퍼프 대디의 눈에 띄게 되고, 그와 계약한다.

     

    페이스 에반스는 배드 보이 레코즈의 '퍼스트 레이디'였다. 배드 보이 레코즈와 계약을 맺은 첫 여성 뮤지션이기도 했지만, 클래식한 소울/펑크 샘플에 기반을 두고 있는 그녀의 곡들은 퍼프 대디와 더 힛-멘이 주조한 힙합 소울 사운드의 가장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95년 발표된 첫 앨범 [Faith] 150만 장 이상이 팔리며 배드 보이 레코즈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작품으로 남아있다.

     

    추천곡: Faith Evans - You Used To Love Me, Never Gonna Let You Go, Do Your Time

     

     


    9.
    마리오 와이난스(Mario Winans)

     

    '오래 전 유명 레이블에서 앨범을 냈지만, 실패한 가수가 작곡을 시작하고, 유명 작곡가가 된다. 그러나 가수의 꿈을 잊지 못한 그는 10년 뒤 자신의 노래를 불러 빌보드 1위를 차지한다.'

     

    마치 영화 줄거리 같은 이 이야기는 사실 마리오 와이난스가 걸어온 길이다. 음악인 가문으로 유명한 와이난스 패밀리 출신인 그는 20대 초반에 이미 모타운 레코즈(Motown Records)와 계약하고 앨범을 낸다. 앨범은 주목받지 못했지만, 드럼과 키보드, 피아노 등을 연주할 수 있는 데다가 사운드 엔지니어 경험도 가지고 있을 만큼 다재다능했던 그는 곧 퍼프 대디에게 발탁되어 90년대 후반부터 줄곧 배드 보이 레코즈와 함께 해오고 있다.

     

    배드 보이 레코즈 소속으로 그는 릴 킴, 샤인(Shyne), 토탈(Total), 112 등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음악인들의 곡에 힘을 보탰지만, 마리오 와이난스라는 이름이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2004년에 발표된 그의 싱글 "I Don't Wanna Know"였다. 푸지스(Fugees) "Ready Or Not"을 샘플링한 이 곡은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어셔(Usher) "Burn"과 치열한 1위 다툼을 벌이는 등 큰 성공을 거두었다. 2006년 발표되어 인기를 모았던 퍼프 대디(당시에는 P. Diddy) "Last Night" 역시 그가 프로듀싱한 곡이다. 피처링한 키샤 콜(Keyshia Cole)의 청량한 보컬이 돋보이는 이 곡은 원래 마리오 와이난스가 자신의 새 앨범을 위해 작업하던 곡이라고. 그는 2004년 이후로 아직 앨범을 발표한 적이 없다.

     

    추천곡: Mario Winans- I Don't Wanna Know, P. Diddy - Last Night (feat. Keyshia Cole)

     

     

     


    10.
    보이즈 앤 다 후드(Boyz N Da Hood)

     

    1999, 순식간에 노토리어스 비아이쥐와 이지 모 비를 잃은 배드 보이 레코즈는 메이스의 두 번째 앨범 [Double Up]으로 반전을 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미 힙합의 트렌드는 노 리밋 레코즈(No Limit Records)와 캐쉬 머니 레코즈(Cash Money Records)가 이끄는 남부 힙합 씬으로 넘어가버렸던 탓이다. 불과 5년 전, 노토리어스 비아이쥐가 '소스 어워즈(The Source Awards)'에서 상을 휩쓸며 같은 해 데뷔한 아웃캐스트(Outkast)의 원성을 샀던 일화를 생각하면, 정말이지 퍼프 대디로서는 세월이 야속했을 것이다.

     

    그러나 남부 힙합의 중심이 노 리밋 레코즈와 캐쉬 머니 레코즈를 떠나 다시 애틀랜타(Atlanta)로 향할 때, 배드 보이 레코즈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베테랑 에잇볼 앤 엠제이쥐(Eightball & MJG) 등 남부 힙합 뮤지션들과 계약을 맺고, 서브 레이블인 배드 보이 사우스(Bad Boy South)를 설립한 것이다. 배드 보이 사우스의 가장 돋보이는 음악적 결과물이 영 작(Young Joc)과 니티(Nitty) "It's Going Down"이었다면, 보이즈 앤 다 후드는 (그 완성도와는 별개로) 가장 야심찬 결과물이라 할 만 했다. 이미 마니아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져있던 영 지지(Young Jeezy), 고릴라 조(Gorilla Zoe) 등이 포함된 이 그룹은 "Dem Boyz"를 히트시켰으나, 그것이 끝이었다. 후속 싱글들의 실패와 첫 앨범의 실망스러운 판매 성적으로 인해 보이즈 앤 다 후드는 두 장의 앨범을 내놓고 해체된다. 혹자는 보이즈 앤 다 후드의 실패 원인으로 영 지지와 같이 언더그라운드에서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던 래퍼들을 두고도 "Dem Boyz"와 같은 가벼운 곡을 앞세운 것을 꼽기도 한다. '히트곡 제조기'로서 퍼프 대디의 한계인 것일까. 영 지지가 이후 데프 잼(Def Jam)과 계약을 맺고 스타 랩퍼로 도약했기에 더욱 아쉬움이 남는다.

     

    추천곡: Boyz N Da Hood - Dem Boyz  

     

     


    11.
    캐시(Cassie)

     

    배드 보이 레코즈 소속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캐시의 성공은 퍼프 대디나 더 힛-멘보다는 프로듀서 라이언 레슬리(Ryan Leslie)에 빚진 바 크다. 캐시가 배드 보이 레코즈와 계약을 맺을 당시 둘은 연인이기도 했다. "우리는 사귀고 있었고, 그냥 장난으로 같이 노래를 만들곤 했어요.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즐겁게 사귈 수 있길 바라요. 그렇게 예쁘고, 멋지고, 재미있는 사람을 만나는 건 모든 남자들의 희망 사항이죠"라고, 라이언 레슬리는 회상한다.

     

    사랑이 만들어낸 케미스트리였을까. 폭발적인 성량이나 압도적인 가창력 대신 매력적인 목소리를 지닌 캐시의 장점은 라이언 레슬리의 미니멀한 프로듀싱에서 가장 돋보였으며, 대중 역시 "Me & U", "Long Way 2 Go" 등의 곡에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캐시의 첫 앨범, [Cassie]가 거둔 100만 장의 판매고는 2003 [Bad Boys II: The Sound Track] 이래 무려 3년 만에 배드 보이 레코즈가 맛보는 큰 성공이었다.

     

    그러나 2007년경, 캐시와 결별한 라이언 레슬리는 배드 보이 레코즈의 프로젝트에 더는 참여하지 않는다. 캐시는 [Electro Love]라는 제목의 두 번째 앨범을 계획했으나, 프로듀서 단자(Danja)와 릴 웨인(Lil Wayne)이 참여한 "Official Girl", 퍼프 대디가 참여한 "Must Be Love"도 전작의 성공을 잇지는 못했다. 이후 한동안 영화, 뮤직비디오 등에 출연하며 연기로 발을 넓히던 캐시는 최근 믹스테입 [RockaByeBaby]을 내며 성공적으로 음악계에 복귀했다. 그러나 여전히 라이언 레슬리와 캐시가 함께한 새로운 작업물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12.
    쟈넬 모네이(Janelle Monae)

     

    21세기도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배드 보이 레코즈의 전망은 딱히 밝지만은 않다. 배드 보이 레코즈가 내놓은 래퍼들은 대개 자신의 커리어를 다지는 데에 실패했으며, 보다 폭 넓은 팬층을 노리고 기획된 그룹 대니티 케인(Danity Kane)과 데이 26(Day 26) 또한, 약간의 성공은 거두었을지언정 토탈이나 112 같은 선배들의 뒤를 잇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오랫동안 조롱의 대상이 되어왔던 퍼프 대디의 고집세고 허영심 많은 이미지 역시 재능있는 신인들을 불러모으는 데에 그닥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도 분명하다. 어쩌면 퍼프 대디와 더 힛-멘을 중심으로 짜인 배드 보이 레코즈의 구조가 소속 음악인의 성장을 억제하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쟈넬 모네이의 2007년 작, [Metropolis: Suite I (The Chase)]는 불과 10여분 남짓의 길이였다. 그러나 이전까지의 배드 보이 레코즈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겐 그 짧은 시간이 주는 충격조차 상당했다. 그리고 2010, 잠시 잊힌 듯하던 그녀가 이번에는 풀-렝쓰(full-length) 앨범으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앨범의 러닝 타임에 비례해 더욱 열광적이었다. 소울과 펑크가 가진 '날 것'의 느낌에 충실하면서도, 쟈넬 모네이는 다시 그 위에 새로운 이미지와 이야기를 덧입혔다. 오래 전, 조지 클린턴(George Clinton)이 자신의 음악 위에 마더쉽(mothership)과 우주의 탄생에 대한 전설을 풀어내었듯이 말이다. 이러한 새로움은 오랫동안 배드 보이 레코즈에서 찾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배드 보이 레코즈 측도 쟈넬 모네이의 음악에 별 간섭을 하지 않았음을 인정한다. "그 친구는 이미 앨범도 있었고,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어요." A&R 담당자인 다니엘 '스키드' 미쳴(Daniel 'Skid' Michelle)의 말이다.

     

    추천곡: Janelle Monae - Tightrope, Cold War

     

     


    퍼프 대디가 변한 것일까? '어떤 곡이 대박날 수 있는지는 알지'라고 당당하게 말하던 모습에서 한 발짝 물러나 이제는 젊은 음악인들의 자율성과 재능에 더욱 많은 기회를 부여하려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2011, 퍼프 대디는 젊은 래퍼 머신 건 켈리(Machine Gun Kelly)와 계약을 맺었고, 머신 건 켈리와 쟈넬 모네이는 새로운 배드 보이 레코즈를 이끌어 갈 두 기둥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20년이라는 역사를 뒤로 한 배드 보이 레코즈는 기로에 서 있다. 기존의 방식을 답습하다가 조금씩 침몰할 것인지, 아니면 시대의 흐름을 다시 읽어내며 또 다른 20년을 성공으로 장식할 것인지의 기로에….

    12

    스크랩하기

    • Share this article
    • Twitter Facebook
    • Comments
      1. ticalman (2014-08-28 19:35:50, 115.88.230.***)
      2. 이 글에서 언급도 안된 샤인과 쥐뎁은 안습 ㅠㅠ

        둘다 레이블의 유망주였는데.
    « PREV LIST 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