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드머 토픽] 영국힙합을 알기 위해 꼭 들어봐야 할 앨범 10 (1)
- rhythmer | 2017-09-18 | 15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
글: 지준규힙합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영국을 분리하여 논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전 세계 힙합은 미국 랩/힙합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 전개되어왔으며, 이런 흐름은 현재까지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국힙합을 따로 떼어내 강조하는 것이 충분히 가치 있는 이유는 그 놀라운 독창성과 유연함에 있다. 물론, 수많은 뮤지션을 하나의 공식으로 간단히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영국힙합 씬을 이끌어온 래퍼 대부분은 힙합의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틀에서 벗어난 창의적인 시도와 도전을 통해 뚜렷한 자기 색깔을 추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개화하기 시작한 영국힙합은 언더그라운드를 발판으로 지속 성장했으며, 미국힙합을 원형 그대로 재현하는데 그쳤던 초기와 달리 점차 나름의 개성과 특색을 갖춘 앨범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2000년대 초반, 그라임이 탄생하고 디지 래스컬(Dizzee Rascal), 와일리(Wiley), 스켑타(Skepta) 등의 간판스타들이 배출되면서 영국힙합 씬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비록, 미국힙합의 막강한 위세에 눌린 그라임은 서서히 파괴력을 잃어갔지만, 이전 세대의 자유분방함과 실험정신을 그대로 물려받은 젊은 래퍼들은 서로 경쟁하듯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으며, 이는 힙합뿐만 아니라 대중음악계 전반에 걸쳐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었다.
최근 몇몇 뮤지션들이 메인스트림 시장에서 선전함으로써 영국힙합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현 시점에서 오늘날의 영국힙합을 있게 한 10장의 앨범을 두 파트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힙합이 영국에 정착하여 해석되고 발전한 방식과 이룬 성과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작금의 한국 힙합 씬과 비교해보는 것 역시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순서는 발매연도순.
The Brotherhood – Elementalz (1996)
‘80년대에도 영국에선 데렉 비(Derek B)를 비롯한 다수의 수준급 래퍼들이 활약했고, 여러 랩 싱글이 차트 상위권을 장식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미국힙합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영국만의 새로운 가능성이 싹 트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이후부터이다. 런던을 중심으로 하이잭(Hijack)이나 더 허발리저(The Herbaliser) 등의 그룹들이 인상적인 활동을 펼쳤으며, 래퍼 로렌조(Lorenzo)를 주축으로 한 더 브라더후드(The Brotherhood) 역시 그 중 하나였다.
그룹의 메이저 데뷔작 [Elementalz]는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와 날 것 같으면서도 정교한 비트, 그리고 가사에 담긴 진중한 메시지로 대중과 평단의 이목을 단숨에 집중시켰다. 특히, 노골적인 제목에서부터 의도를 분명히 드러낸 곡 “British Accent”엔 영국 래퍼로서의 강한 자부심이 고스란히 담겨있었고, 이는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나겠다는 일종의 선언과 같았다. 멤버 개개인의 탁월한 역량은 물론, 깊이와 개성을 두루 갖춘 프로덕션은 이러한 자신감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님을 여실히 증명했고, “Alphabetical Response”와 “One Shot” 같은 걸출한 싱글은 본작의 흥행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https://youtu.be/1mCBhAhPA7g (“One Shot”)
Roots Manuva – Brand New Second Hand (1999)
이제 쉰을 바라보는 중년이 된 루츠 마뉴바(Roots Manuva)는 데뷔 이후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왕성히 작품 활동을 펼치며 녹슬지 않은 실력을 과시하는 중이다. 다만, 20대의 그가 보여준 음악적 감각과 창작력은 지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했다. 첫 정규작 [Brand New Second Hand]는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단연 프로덕션이다. 전형적인 힙합 사운드와 레게에 기원을 둔 덥(Dub) 등, 다양한 음악 재료를 적극 차용하지만, 이를 철저히 본인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하여 전에 없던 색다른 사운드와 무드를 만들어내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변주시키며 드라마틱한 전개를 완성한다.
그 과정이 매우 정교하고 매끄럽게 이루어져 더욱 놀랍다. 루츠 마뉴바의 가사 또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는 비참한 현실과 그 속의 부정의에 대해 비판하다가도 때론 정체성에 혼란을 느껴 한없이 방황하며 나중엔 재물과 명예의 무의미함을 깨닫기도 한다. 이 같은 감정의 혼재를 시적인 노랫말과 창의적인 은유를 통해 생생히 묘사하며 깊은 공감을 유도하는 모습이 듣는 내내 감탄을 자아낸다. 더불어 “Movements”나 “Clockwork” 등의 트랙에서 가장 빛을 발하는 루츠 마뉴바 특유의 묵직한 플로우는 그 자체만으로 가히 매력적이다.
https://youtu.be/_cFheklb-vo (“Clockwork”)
The Streets – Original Pirate Material (2002)
더 스트릿츠(The Streets a.k.a Mike Skinner)의 음악을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기존의 사운드 작법이나 트렌드 따위엔 얽매이지 않은 채 힙합이 가진 예술적 가능성의 확장을 위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틀에 박힌 사회, 정치적 메시지 대신 지극히 개인적인 의식과 철학을 가사에 담는다. 그의 첫 앨범 [Original Pirate Material] 역시 이러한 음악적 방향성을 극명히 보여준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과감한 사운드 실험과 자신감 넘치는 가사는 매번 색다른 감흥을 선사하고, 랩과 노래의 경계를 넘나드는 플로우 또한 앨범이 담고 있는 경쾌함과 역동성을 한층 더 부각한다.
그는 각종 장르와 다채로운 소스들을 한데 버무리는 와중에도 적절한 음악 재료를 선별하는 것은 물론, 구성과 배치 또한 세세하게 신경 쓰며, 각각의 장점을 온전히 살린다. 이는 각 트랙에 담긴 정서나 주제 의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함이다. 즉흥적인 정서와 정교한 음악성이 절묘하게 조화된 이 앨범은 더 스트릿츠만의 차별화된 음악 세계를 가감 없이 대변함과 동시에 영국힙합의 풍부한 잠재력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https://youtu.be/pUqX07JX_3c (“The Irony of It All”)
Dizzee Rascal – Boy In Da Corner (2003)
한때 영국힙합의 독창성을 대변한 그라임을 논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단연 사운드일 것이다. 힙합과 UK 개러지(UK Garage), 드럼 앤 베이스를 베이스로 삼고, 자극적인 일렉트로닉 사운드와 각종 효과음들이 뒤섞이며 맹렬하게 몰아붙이는 전형적인 그라임 비트는 2000년대 초반, 그 등장과 동시에 영국 음악 시장을 장악하며 랩/힙합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비범한 재능을 타고난 디지 래스컬(Dizzee Rascal)은 19살의 나이에 데뷔작 [Boy In Da Corner]를 발매하며, 그라임의 전성기가 도래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냈다. 앨범에 담긴 곡 대부분은 거칠고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주를 이루지만, 각종 장르가 혼재된 다채로운 전자음과 불규칙적인 드럼 비트, 의도적인 잡음 등이 변화무쌍하게 뒤섞여 극적인 반전이 거듭되고 다채로운 전개가 이어진다.
노랫말 역시 상당히 인상적이다. 디지 래스컬은 내면의 강박이나 타인과의 갈등, 그리고 사회 비판까지 다양한 주제를 담아내면서도 독창적인 비유와 라임을 활용해 이 모두를 생동감 넘치게 그려낸다. 상황에 맞게 자유자재로 억양과 속도를 조절하며 감탄을 유도하는 그의 플로우 또한, 여러 비트와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흥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빌리 스콰이어(Billy Squier)의 “The Big Beat”를 감각적으로 샘플링한 “Fix Up, Look Sharp”는 그 특유의 댄서블한 리듬과 속도감 있는 래핑 덕분에 지금까지도 자주 언급되며 그라임을 대표하는 핵심 트랙 중 하나로 남아있다.
https://youtu.be/4B06gdaXJeY (“Fix Up, Look Sharp”)
Skinnyman – Council Estate Of Mind (2004)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언더그라운드 래퍼 스키니맨(Skinnyman)은 20년 가까이 활동해 오면서 단 한 장의 앨범만을 발매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15곡만으로도 진가는 확실히 증명된다. 그는 자잘한 일상 이야기나 의미 없는 과시는 철저히 배제한 채 냉정한 시선으로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성찰하고 일상의 고통과 부조리를 가감 없이 드러내며 공감대를 형성한다. 비슷한 주제가 반복되지만, 빼어난 스토리텔링 실력과 영리한 라임 배치, 그리고 명확하고 탄력적인 보이스 덕에 지루함이 끼어들 틈이 없고, 오히려 이야기에 더욱 몰입하게 된다.
특히, 앨범의 첫 싱글인 “I'll Be Surprised”에서 그는 세상에 만연한 폭력을 일종의 필요악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제시하며, 솔직한 감정을 밝히는데, 생생한 비유와 절묘한 표현으로 가득 차 있어 문학적인 쾌감을 배가시킨다. 스키니맨은 사운드 면에서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레이드백(Laid-Back)한 비트와 애잔한 현악 연주가 귀를 사로잡는 “Day To Day Basis”나 서정성이 극대화된 “Hayden” 등의 곡은 타이트한 구성으로 앨범의 완성도에 일조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팽팽한 진행을 보이는 본작은 그간 언더그라운드에서 쏟아져 나온 작품들과는 질적으로 분명한 차이를 보이며, 비약적으로 성장한 영국힙합 씬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https://youtu.be/BE3Bi6fuZVw (“Day To Day Basis”)
2부에서 계속
15
-
-
- 할로윈1031 (2017-09-22 04:45:37, 182.225.134.**)
- 10여년전 그라임이다 투스텝이다 해서 영국쪽이 주목받고 즐겨들은 적은 있지만 언더그라운드까진 미처 생각을 못했는데 흥미로운 아티스트들이 여럿이네요.
예전에 개인적으로 일본힙합을 디립다 판 적이 있는데 거긴 자기들 만의 올드 스쿨도 있고, 황금기도 지나면서 참 다이나믹 하고 확실한 영역같은게 있어서 그 다양함이 부럽기도 하더군요.
한국힙합은 여러모로.. 불완전한 상태로 계속 변태해가며 이어가는거 같아요.(물론 음악적 우열을 얘기하는건 아닙니다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