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드머 토픽] 힙합을 사랑한 남북한 축구선수 3
- rhythmer | 2017-12-14 | 7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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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정용 풋볼리스트 기자(Contributor)
‘한국의 메시’ 이승우는 지난 5월 전주에서 열린 U-20 월드컵 경기에서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골을 터뜨렸다. 40m 드리블 돌파를 통해 화려한 골을 넣은 이승우는 코너플래그 쪽으로 가더니 손을 빙빙 돌리며 그루브를 타는 독특한 골 세리머니를 했다. 춤을 추다 손가락을 옆으로 뻗는 동작이 얼핏 보면 우사인 볼트(Usain St. Leo Bolt) 같았다. 경기가 끝나고 기자들이 몰려가 ‘우사인 볼트를 참고한 세리머니가 맞냐’고 물었다. 이승우는 기대 밖의 대답을 했다.“이거 디제이 칼리드(DJ Khaled)인데요. ”Im The One" 비디오에 나온 춤인데… 별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평소에 좋아하는 노래거든요.”
축구선수들의 삶 사이사이에 힙합과 블랙뮤직은 깊이 침투해 있다. 축구 선수들은 젊고, 어느 나라든 젊은 층이 힙합을 들으니까. 해외에서는 더 일반적인 현상이다. 아디다스는 한발 더 나아가 축구 스타 폴 포그바(Paul Pogba)와 디자이너(Desiigner), 스톰지(Stormzy) 등, 래퍼들의 느낌을 결합한 마케팅을 전개하기도 했다. 여기선 힙합을 깊이 사랑하는 한국과 북한의 축구 스타들을 소개한다.
정대세 ‘던밀스에서 2Pac까지’
정대세는 축구 국적, 즉 대표팀은 한국이 아닌 북한을 선택했다. 그러나 조총련계 재일 동포인 정대세는 한국, 일본, 북한 중 어느 나라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은 경계인이다. 한국 여권을 갖고 있으며, 한국 예능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도 한다. 수원삼성에서 2년 반 동안 뛰기도 했다. 독립 이후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자이니치(*편집자 주: 일본에 살고 있는 한국인 또는 조선인을 지칭하는 말) 문제는 정대세를 통해 한국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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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세는 최근 예능에 나온 일상 장면에서 VMC 소속의 랩퍼 던밀스(Don Mils)의 “88”을 흥얼거리며 거리를 걸었다. 거리를 걸어가며, ‘여기, 저기, 들리, 는 내, 이름’을 중얼중얼거렸다. 정대세는 예전에도 트위터를 통해 좋아하는 뮤지션으로 던밀스를 여러 차례 거론했다. 또한, 2008년 ‘한겨레’에 연재하던 칼럼에서 음악에 대한 사랑을 집중 거론한 바 있다.
고3 졸업하기 직전 일본 랩퍼 지브라(Zeebra)와 디제이 오아시스(DJ Oasis)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힙합을 가장 좋아한다. 투팍(2Pac)을 중심으로 1990년대 서부 힙합 아티스트들을 사랑했다. 피처링, 리믹스, 샘플링 등, 힙합 작법을 공부하다가 샘플 원곡들도 찾아듣게 됐다. 집에 디제잉 장비를 구비해 놓고 취미로 믹싱도 한다.
정대세는 미국의 마이너인 흑인들의 음악과 일본의 마이너인 자이니치의 정서에 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느꼈다. 당시 칼럼에는 힙합 뮤지션 수십 명의 이름이 나열돼 있다. 아마 한국 일간지 역사상 가장 많은 래퍼가 등장한 지면이었을 것이다.
송범근과 이승우 ‘Chance The Rapper에서 21 Savage까지’
전주 월드컵경기장에서 U-20 대표팀이 승리를 거두면 기자들이 공동취재구역(mixed zone)에서 선수들을 기다렸다. ‘퇴근’하는 선수들을 붙잡고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다. 서둘러 기사를 써야 하는 기자들의 사정과 달리, 한국 라커룸에선 계속 쿵쾅거리는 비트가 들려왔다. 선수들은 춤을 추느라 라커룸에서 나오지 않았다. 챈스 더 래퍼(Chance The Rapper)가 ‘You don't want no problem’("No Problem")이라고 노래하는 소리를 들으며 기자들은 엄청난 ‘문제’를 겪고 있었다. EDM과 힙합을 섞은 플레이리스트는 골키퍼 송범근의 믹스셋(?)이었다.
송범근, 이승우, 백승호, 우찬양은 기니와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승리했을 때 가장 열심히 춤을 추며 승리를 자축한 멤버들이다. 원래 신나는 음악을 좋아하는 송범근과 외국 생활을 오래 한 이승우, 백승호는 힙합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나눴다. 이승우가 디제이 칼리드 세리머니를 했다고 말한 건, 2017년 19세 축구선수가 어떤 취향을 갖고 사는지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대목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말은 전혀 주목받지 못했고, 언론에 소개되지도 못했다. 여전히 우사인 볼트 세리머니라고 아는 사람도 많다.
최근 전북현대 입단이 확정된 송범근에게 어떤 음악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EDM과 힙합을 많이 들어요. 요즘에는 21 세비지(21 Savage)를 좋아해요. 'Ghostface Killers'를 좋게 들었어요. EDM 디제이 중에는 TJR 노래를 많이 듣고요.“
경기장 라커룸에서 틀었던 노래들은 송범근이 마음에 드는 곡들을 하나씩 찾아 모은 것이다. 노래 제목을 찾아주는 앱을 애용한다. 송범근의 취향을 잘 아는 선수들은 아르헨티나를 꺾고 라커룸에 들어오자마자 ”범근아, 노래 틀어.“라고 말했다. 끓어오르는 흥분을 더 만끽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최호정 ‘Rick Ross에서 Xavier Omar까지
최호정은 2010년 프로 선수로 데뷔한 뒤 대구FC, 상주상무, 성남FC, 서울이랜드FC 등, 한국의 1부, 2부팀을 오가며 프로 경력을 쌓아 왔다. 미드필더, 측면 수비수, 중앙 수비수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멀티 플레이어다.
최호정의 음악 취향은 확고하다. 인스타그램 아이디는 릭 로스(Rick Ross)를 비튼 ‘rickhozz’. 새로 나온 힙합 음악을 디깅하며 시간을 보내곤 한다. 무라 마사(Mura Masa), 툰지 아이지(Tunji Ige) 등이 유명해지기 전에 한발 먼저 찾아 듣는 마니아 수준의 정보력을 가졌다.
최근 듣는 음악을 물어보자 저스트 체이스(Just Chase), 블랙베어(Blackbear), 사비에르 오마르(Xavier Omar), 피엔비 락(PnB Rock) 등의 신보로 채워진 플레이리스트를 보내왔다. 음악 취향이 비교적 비쥬류에 가깝다보니 라커룸에 틀어놓을 기회는 별로 없다. 취향이 맞는 외국인 선수와 함께 두어 번 틀어놓은 것이 전부라고 한다.
최호정의 패션 취향도 음악 취향과 비슷하다. 결혼 후 ‘럽스타그램’ 느낌으로 바뀌었지만, 한때 최호정의 인스타그램 피드는 슈프림이나 베이퍼의 룩북인가 싶을 정도로 스트리트 패션으로 가득했다. 언젠가 인터뷰 후 한담을 나누던 최호정은 해당 브랜드 제품을 어떻게 하면 저렴하게 잘 구할 수 있는지 노하우를 설명해주기도 했으나 이 브랜드들에 문외한인 기자의 머리엔 남은 것이 별로 없다.
사진 출처: 정대세 인스타그램, 이승우 인스타그램, 최호정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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