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드머 토픽] 2020 상반기, 이 앨범들도 놓치지 마오
- rhythmer | 2020-07-17 | 15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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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을 대하는 대중들의 인식은 예전과 같지 않다. CD로 대표되는 피지컬 음반 판매량은 심각하게 줄어들었고, 음악을 듣는 매개체보다는 ‘굿즈(Goods)’와 같은 개념으로 구매를 하는 소비자가 더 많아졌다. 이는 비단 한국대중음악계만의 상황이 아닌,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앨범이라는 형식의 가치마저 함께 떨어진 한국과 달리, 여전히 미국과 유럽 같은 거대한 대중음악시장에서 앨범의 위상은 예전과 다를 바 없다.아티스트가 창작 활동의 구심점으로 삼는 것은 여전히 앨범 단위이고, 무엇보다도 그들 스스로가 앨범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또한 아티스트와 대중 모두 완성도 높은 앨범을 강하게 열망한다.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가 지금의 위치에 오른 건 누구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완성도의 앨범을 연이어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년 수많은 앨범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정규작은 물론, 무료 앨범과 믹스테입(Mixtape) 등, 다양한 형태의 앨범이 매일 쏟아지는 힙합, 알앤비 씬은 오히려 피지컬 음반이 힘을 발휘하던 이전보다 더 활발해졌다.
리드머는 매년 국내 앨범뿐만 아니라 국외 블랙뮤직 신보 또한 부지런히 다루려고 노력 중이다. 그러나 국내 시장을 구심점으로 하다 보니, 매주 수십 장씩 쏟아지는 국외 앨범을 인력과 시간의 한계 탓에 모두 리뷰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리드머 필진들이 정식 리뷰로 다루지는 못했지만, 올해 상반기에 모르고 지나치면 아쉬울 만한 앨범들을 엄선해보았다. 정식 리뷰를 했다면 R4 점수 이상은 받았을 만한 완성도 높은 앨범들이니 한 번씩 체크해보기를 권한다.
여전히 눈에 밟히는 작품들이 많으나 정식 리뷰란과 함께 이 기사가 좋은 가이드가 되길 바란다.
Mick Jenkins - Circus
몽환적인 분위기와 속도감 있게 읊조리는 유려한 래핑, 무엇보다 돋보이는 깊은 성찰을 담은 가사까지, 믹 젠킨스(Mick Jenkins)의 음악을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확실한 음악적 색채를 맞춘 그는 몇 장의 EP와 두 정규작을 통해 견고한 작품 세계를 구축했고, 어느새 믿고 들을 수 있는 아티스트의 반열에 올랐다. 이런 믹 젠킨스의 재능은 이번 짤막한 EP에서도 빛을 발했다.
개인의 성찰과 인종, 사회 이슈를 오가는 통찰력 있는 가사는 여전히 탁월하다. 전작에서도 합을 맞춘 바 있는 블랙 밀크(Black Milk)의 프로덕션 위로 흑인들이 모든 위협으로부터 벗어난 시간을 보내길 바라는 내용을 담은 “Carefree”는 단연 앨범의 하이라이트다. 어스 갱(Earth Gang)과의 협업 “The Light”나 이후, 감정의 편린을 모아 놓은 듯한 2분 남짓의 트랙들 역시 하나하나 매력적이다. 작품의 볼륨 면에선 다소 아쉬움이 있지만, 완성도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진석)
Mac Miller - Circles
맥 밀러(Mac Miller)는 지난 2018년 9월, 겨우 26세의 나이에 약물 중독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두 장의 앨범을 작업 중이었다. 그중 하나인 [Swimming]은 생전에 나왔지만, 다른 하나인 [Circles]는 사후 앨범이 되었다. 밀러의 가족은 그가 함께 작업해온 프로듀서 존 브라이언(Jon Brion)에게 앨범을 마무리해줄 것을 부탁했고, 브라이언은 기꺼이 심혈을 기울여 [Circles]의 매듭을 지었다. 영화 스코어부터 팝, 락, 힙합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음악 스펙트럼을 지닌 존 브라이언이 총괄 프로듀서를 맡은 바, 본작은 랩/힙합 앨범이라기보다 블랙뮤직의 향을 지닌 장르의 멜팅팟과도 같은 결과물로 완성됐다. 적어도 이 앨범에서 밀러의 정체성은 싱어이며, 힙합, 알앤비, 신스-팝, 로파이(lo-fi) 등의 장르가 요란하지 않게 어우러졌다.
더불어 맥 밀러의 큰 장점 중 하나인 간결하면서 귀를 잡아끄는 멜로디 라인도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 밀러의 죽음을 결부시킬 수밖에 없기에 [Circles]에는 한없이 무거운 기운이 서렸지만, 순수하게 음악적으론 [Swimming]보다 한층 무드가 밝아졌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밀러의 음악세계, 특히, 극도로 우울했던 전작과의 대비 차원에서 하는 말이지만, 비단 프로덕션뿐만 아니라 몇몇 곡의 가사에서도 전과는 다른 태도가 눈에 띈다. 그가 두려움과 초연함의 경계에서 죽음을 이야기하고, 우울을 토로하는 것은 여전하다. 다만, 지난 작품들에선 본인을 억누르는 현실의 무게가 견디기 어려워 극심한 우울증으로 빠져들었다면, 본작에선 어느 정도 이와 맞닥뜨리려는 의지 또한 엿보인다. 그래서 그의 때이른 죽음이 더욱 슬프고 안타깝다. 맥 밀러를 추모하며... 1992.01.19 - 2018.09.07 (강일권)
070 Shake - Modus Vivendi
[Modus Vivendi]는 칸예 웨스트(Kanye West)의 와이오밍 세션을 통해 대중에게 알려진 070 셰이크(070 Shake)의 데뷔 앨범이다. 전작인 EP [Glitter]에 이어 감정적이고 우울한 가사를 담았지만, 다채롭고 풍부한 프로덕션과 몰입하게 하는 보컬 운용을 더해 미묘한 안정감을 동시에 선사한다. 마이크 딘(MIKE DEAN), 데이브 하멜린(Dave Hamelin) 등이 참여한 프로덕션은 때로는 ‘80년대의 빛바랜 신시사이저를, 때로는 공격적인 미래의 베이스를 선보인다.
다채롭게 발산하는 사운드를 묶는 중심점은 단연 그의 퍼포먼스다. 화음을 쌓아 올려 풍부한 멜로디를 만들기도, 다운된 톤으로 가라앉듯 랩을 하기도 하며 셰이크는 단 한 명의 피처링도 없이 앨범 전체를 손에 쥐듯 장악한다. (배수환)
Brent Faiyaz – Fuck The World
이제 비단 랩/힙합이나 락 음악이 아니더라도 사회, 정치 이슈를 비롯한 다채로운 주제를 다양한 수위와 표현으로 담아내는 음악이 많아졌다. 근 몇 년 사이 알앤비/소울 음악의 가사적인 흐름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메릴랜드 출신의 (랩도 하는) 싱어송라이터, 브렌트 페이야즈(Brent Faiyaz)는 이 같은 알앤비의 현재를 체감케 해주는 아티스트는 중 하나다. 물론, 그 역시 많은 선배들이 그랬듯이 사랑과 섹스를 노래하지만, 개인의 삶과 사회적인 이슈 또한, 중요한 주제다.
도발적인 제목의 새 앨범에서도 페이야즈는 삶에서의 직간접 경험을 바탕으로 한, 생각해볼 만한 주제들을 던진다. 블랙 커뮤니티 내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강간 등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서로에게 상처주는 세상 모든 이의 문제로 논의를 확장하는 “Let Me Know” 같은 곡은 대표적이다. 종종 힙합에 더 가까울 만큼 강한 표현 수위와 달리 음악적으론 억제되고 멜랑콜리한 무드를 자아낸다. 그의 이름이 생소하더라도 부디 첫 곡만큼은 꼭 플레이해보길 바란다. 미니멀한 프로덕션 위로 매혹적인 팔세토 보컬이 피어오르는 “Skyline”을 듣는 순간 앨범을 정주행하고픈 욕구가 강하게 솟아오를지도 모르니까. (강일권)
KIRBY - Sis.
커비(Kirby)는 칸예 웨스트(Kanye West), 비욘세(Beyonce), 아리아나 그란데(Ariana Grande) 등 저명한 아티스트들과 함께 작업한 이력이 있는 알앤비 송라이터(Songwriter)로 더 잘 알려졌다. 2016년부터 솔로 싱글을 하나씩 발표하던 그가 2020년 데뷔 앨범 [Sis.]를 통해 보컬리스트로서의 존재감도 각인시켰다. 비록, 20분 남짓의 짧은 볼륨이지만, 재즈, 네오 소울, 펑크(Funk) 등에 기반을 둔 수려한 프로덕션으로 채웠다.
칠(Chill)한 알앤비 리듬으로 시작하다 플루트 소리가 가미된 소울을 지나 ‘70년대 펑크를 재해석한 곡으로 흥을 돋군다. 무엇보다 에이미 와인하우스(Amy Winehouse)를 연상하게 하는 그의 거친 보컬은 앨범의 중심이 된다. 새로운 여성 알앤비 보컬의 탄생을 알리는 축포 같은 앨범이다. (김효진)
D Smoke - Black Habits
넷플릭스(Netflix)의 힙합 경연 프로그램 [리듬 앤 플로우, Rhythm + Flow]에서 디 스모크(D Smoke)를 응원한 사람이라면, 아마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 편하게 쇼를 감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시종일관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우승을 차지한 후 처음으로 내놓은 정규 앨범 [Black Habits]는 그의 퍼포먼스만큼이나 완성도 높은 수작으로 담금질 되었다. 몇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르포(reportage)를 찍듯이 그는 본인과 주변 공동체의 다양한 모습을 가감 없이 포착하고, 생생한 스토리텔링으로 표현해낸다.
프로덕션에서도 고전적인 서부 힙합부터 뱅어, 가스펠부터 재지한 트랙까지 매우 넓은 장르적 지점을 커버하고 있다. 이처럼 광범위한 소재와 프로덕션을 다룸에도 앨범 내내 통일감을 유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유려한 디스모크의 랩 덕택이다. [Black Habits]는 디 스모크의 다양한 매력을 고르게 담아내는 데 성공한 멋진 데뷔 패키지다. (오정민)
Jay Electronica - A Written Testimony
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제이 일렉트로니카(Jay Electronica)의 데뷔 앨범이 등장했다. 믹스테입 [Act I: Eternal Sunshine (The Pledge)]를 발매한 지 13년 만이다. 먼저 탄탄한 프로덕션이 돋보인다. 스위즈 비츠(Swizz Beatz), 애럽뮤직(AraabMUZIK), 히트보이(Hit-Boy), 알케미스트(The Alchemist), 노 아이디 (No I.D) 등등, 쟁쟁한 프로듀서들이 힘을 보탰다. 더불어 제이 일렉트로니카가 직접 프로듀싱한 트랙들 역시 준수하다. 앨범 전반에 걸쳐 드럼의 비중을 낮추는 대신, 다양한 멜로디와 보이스 샘플을 적재적소에 활용하여 몽환적이면서도 섬세한 분위기를 건조해냈다. 그 위에서 제이 일렉트로니카는 본인의 신앙인 네이션 오브 이슬람(Nation of Islam)의 사상과 아티스트로서의 고민을 교차해가며 견고한 랩을 선보인다.
무엇보다 본작의 완성도를 한껏 끌어 올린 1등 공신은 바로 제이지 (Jay-Z)의 피처링이다. 전체 10개의 트랙 중 9곡에 참여한 제이지는 그의 커리어 전체에서도 손꼽힐 만한 수준의 랩을 선보이며 앨범의 주인인 제이 일렉트로니카보다 훨씬 큰 존재감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러한 주객전도는 본작을 평가함에 있어 논쟁을 낳기도 했다. 피처링 진의 존재감이 메인 아티스트를 압도하는 경우는 다른 힙합 트랙에서 왕왕 있었지만, 앨범 전체에 걸쳐 주도권을 양보한 케이스는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논쟁을 차치하고 본다면, 웰메이드 앨범임은 분명하다. (오정민)
Pink Siifu - NEGRO
제목에서부터 노골적으로 주제 의식을 표출하는 [NEGRO]는 흑인을 둘러싼 미국의 시스템, 특히 경찰에 대한 분노를 표출한다. 본작에서 핑크 시푸(Pink Siifu)의 울부짖음은 가장 날 것이며, 때로는 짓뭉개진 상태로, 어떠한 필터나 수식조차 없이 전달된다.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라고 외치는 대신 “돼지를 쏘라.”라고 선동하며, 기성 체제의 파괴를 주장한다.
가사조차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찢어지는 로-파이(lo-fi) 사운드의 하드코어 펑크(hardcore punk) 프로덕션과 숨을 고르듯 배치된 프리 재즈 트랙, 원초적이며 공격적인 가사는 청자를 가상의 폭동 현장 한가운데에 데려다 놓기 위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NEGRO]는 여태껏 블랙 커뮤니티를 괴롭혀온 시스템에 대한 반작용이며, 능력 있는 선동가가 외치는 구호다. (배수환)
Thundercat - It Is What It Is
썬더캣(Thundercat)의 음악은 재즈와 소울에 기반을 두지만, 장르가 무한대로 확장돼 섞이고 기존의 구성을 무너뜨려 실험적이다. 그는 장르의 전통적인 측면을 고스란히 구현하는 한편으로, 사운드 구성 요소를 쪼개고 쪼개 재조립하는 데에도 능한 아티스트다. 썬더캣이 3년 만에 발표한 앨범 [It Is What It Is]에서도 마찬가지다. 노래의 흐름을 예상하는 족족 빗나간다. 공격적인 바이올린 소리와 드럼 비트로 술에 취한 파티를 그린 “I Love Louis Cole”이 대표적이다.
반면, 후반부로 갈수록 철학적인 주제가 뚜렷해진다. 썬더캣은 2018년 가을 절친한 친구인 래퍼 맥 밀러(Mac Miller)를 잃었다. 그는 “Fair Chance”에 맥 밀러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차분하게 담았다. 뒤이어 실존주의 같은 철학적 메시지(“Existential Dread”)를 지나 박자의 변주가 넘실대는 “It Is What It Is”로 앨범을 마무리한다. 앨범 타이틀이기도 한 문장 ‘It Is What It Is(뭐 어쩌겠어)’는 썬더캣의 재치를 엿볼 수 있는 말장난 같은 메시지이자 동시에 그가 얻은 철학적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
Ivan Ave - Double Goodbyes
노르웨이 출신의 랩퍼 이반 에이브(Ivan Ave)는 2014년 첫 EP [Low Jams]를 발표하며 데뷔했다. 스톤스 스로우 레코즈(Stones Throw Records)의 일렉트로닉/힙합 프로듀서 마인드디자인(Mndsgn)이 총괄 프로듀싱한 EP는 로파이(Lo-Fi) 사운드에 기반을 둔 프로덕션 위로 차분하게 읊조리는 그루비한 랩이 돋보인 작품이었다. 올해 초 발표한 세 번째 정규앨범 [Double Goodbyes]에서 그는 보컬까지 시도하며 음악적 스펙트럼을 확장했다. 마인드디자인을 비롯해 사삭(Sasac), 라이크(Like) 등이 참여한 프로덕션은 일렉트로닉과 힙합이 결합되어 여전히 로파이함을 지향하면서도 시종일관 유려하게 흘러간다.
이 위로 보컬과 랩을 오가며 일상의 소소한 단편을 담아낸 가사도 흥미롭다. 충전 안 된 핸드폰을 지닌 채로 반나절을 보낸 이야기를 담은 “Phone Won’t Charge”와 공연 직전 전 연인에게 연락이 온 상황을 묘사한 “Guest List Etiquette” 등은 대표적. 나른한 주말 오후에 딱 어울리는 그의 음악은 가장 세련된 방향으로 발전된 힙합 버전의 이지리스닝 음악이라 할만하다. (황두하)
Dornik - Limboland
영국 알앤비 씬은 매년 개성 강한 뮤지션들이 등장하여 미국 알앤비 씬과는 또 다른 풍요로움을 자랑한다. 2015년에 첫 셀프 타이틀 정규 앨범 [Dornik]을 발표한 도닉(Dornik) 역시 이러한 흐름에 있는 알앤비 싱어송라이터다. 고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의 영향을 받은 가녀린 음색의 보컬과 부유하는 듯한 신시사이저로 몽롱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프로덕션이 어우러진 음악은 스스로 붙인 ‘레트로퓨쳐리스틱(Retrofuturistic)’이라는 명칭이 무척 잘 어울린다. 무려 5년 만에 발표한 두 번째 정규앨범 [Limboland] 역시 전작의 연장선에 있지만, 훨씬 더 풍성하고 탄탄한 사운드를 담아낸 작품이다.
시종일관 넘실대는 리듬과 각종 소스와 신스를 통해 이루어지는 변주가 황홀한 감흥을 선사한다. 더불어 전작과 다르게 개빈 튜렉(Gavin Turek), 바니 아티스트(Barney Artist), 스크립쳐(Skipture) 등등, 다양한 게스트가 참여하여 전체적으로 더욱 다채로워졌다. 특히, 베테랑 폰테(Phonte)가 차진 랩을 보탠 “Limboland”는 앨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만큼 진한 여운을 남긴다. 비슷한 스타일이 범람하는 메인스트림 알앤비에 질린 이들이라면, 꼭 한 번쯤 들어보길 권한다. (황두하)
Run The Jewels - RTJ4
발표하는 앨범마다 걸작의 반열에 올리며, 힙합 역사상 가장 중요한 듀오로 자리매김한 런 더 쥬얼즈(Run The Jewels)의 네 번째 정규작이다. 제작 초기인 2018년 "최고로 불쾌하고 날 것 같은 앨범"을 만든다고 했던 그들의 선언은 앨범에 그대로 반영됐다. 사실 그들의 가사는 특유의 유쾌함을 잃지 않으면서 언제나 매우 저속하고 직설적이었다. 다만, 그것을 통하여 그 어떤 음악보다 저항적인 기운을 만들어내고, 강력한 정치적 해석을 유도하는 것이 런 더 쥬얼즈의 음악이 지닌 힘이다.
[RTJ4]에서도 마찬가지다. [Run The Jewels 3]에서 조금 더 직접적으로 사회이슈에 힘을 실었다면, [RTJ4]는 여기에 앨범의 시작과 끝을 "Yankee and the Brave"라는 가상의 쇼로 마감하는 방식으로 허무주의를 더했다. 이는 조지 플로이드 살해사건으로 불붙은 미국 내 흑인인권운동과 맞물려 매순간 폭발적인 감흥을 선사한다. 다채로운 사운드를 충돌시키고 변주를 통해 경이로운 그루브를 만들어내는 엘-피(El-P)의 프로덕션도 여전하다. [RTJ4]는 지금까지의 런 더 쥬얼즈의 앨범은 물론, 최근 몇 년간의 힙합 앨범 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임이 분명하다. 가장 힙합다운 방식으로 말이다. (남성훈)
Wale - The Imperfect Storm
2005년 첫 믹스테입 [Paint a Picture] 이후, 왕성하게 수준급의 결과물을 내놓고 있는 왈레(Wale)가 깜짝 발표한 EP [The Imperfect Storm]은 놀랍게도 그의 수많은 결과물 중 꼭대기를 점했다. [The Imperfect Storm]의 주제의식은 더 없이 선명하다. 왈레는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통제 불능의 팬데믹 상황에서 불붙은 흑인인권시위와 폭동 등이 겹친 미국의 상황을 관조한다. 그는 진중하게 사태를 바라보지도 않고, 선동적인 태도를 취하지도 않는다.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빠르게 판단하고, 주변의 흑인들과 이야기와 조언을 나누는 식이다. 이 같은 가사는 그 어떤 랩 가사보다 강력하게 흑인 입장에서의 현장감을 부여한다.
첫 트랙 "MOVIN' DIFFERENT"에서부터 풀어놓는 2020년의 상황은 더 없이 허망하다. 이후 코믹하게 또 약간은 심각하게 2020년을 관조하던 그는 마지막 트랙 "MAAJO"에서 신나게 이 모든 상황을 노래한다. 밀도 있는 프로덕션과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게 만드는 시의성 있는 가사의 조화가 짧은 제작기간의 이 18분짜리 EP를 왈레의 최고작으로 만들었다. 마스크를 쓴 흑인을 범죄자로 판단하는 백인, 코로나 시대에 마스크를 쓰지 않는 백인우월주의자들을 동시에 언급하는 ‘마스크를 썼는데, 백인 친구들은 이걸 감당 못해(Got a mask on, White folks can't stand it)’라는 가사는 [The Imperfect Storm]을 요악하는 명라인이다. (남성훈)
Skyzoo – Milestones
이 앨범의 제목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사전적 의미 그대로 ‘이정표’라는 뜻, 나머지 하나는 스카이주(Skyzoo)의 아들 마일즈(Miles)의 이름이다. [Milestones]는 힙합 내에서 비치는 아버지에 관한 스카이주의 고찰을 풀어낸 앨범이다. 그는 힙합 문화, 혹은 흑인 사회 내부에서 그려진 아버지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바꾸길 원했고, 이를 위해 아버지와 자신, 그리고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어린 시절 추억들을 꺼내며 아버지로부터 받은 영향을 되짚고, 이를 아들에게 물려주고자 힘쓰는 모습은 가족에 관한 내용임과 동시에 스카이주의 가슴 뭉클한 성장 드라마로 연출된다. 자신을 비롯한 모든 아버지에게 바치는 노래 “A Song For Fathers”는 앨범의 주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곡이다. 내용뿐만 아니라 음악적 완성도도 탁월하다. 투박하고 따듯한 음색의 붐뱁(Boom Bap) 프로덕션 위로 유연하게 치고 나가는 스카이주의 랩은 단연 발군이다. 그는 여전히 가장 자신 있는 방식으로 유의미한 디스코그래피를 쌓아가는 중이다. (이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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