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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드머 토픽] 큰소리 Funk! Funk! ③ - 흑표범당(Black Panther Party)과 Funk
    rhythmer | 2011-02-14 | 13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이번 큰소리 funk! funk!의 소재는 힙합팬들에게 블랙 팬더(Black Panther)로 잘 알려져 있는 ‘흑표범당’입니다. ‘블랙 팬더’라는 표현이 더 친숙할지 모르나 흑표범당이 정치적 성격을 좀 더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 표기를 흑표범당으로 통일하였습니다.

    흑인들 사이에서 인종적 자부심이라는 감정이 피어나기 시작한 건 1960년대 중반에 와서였다. 이런 흑인 정체성은 ‘소울(soul)'의 개념으로 반영되었는데, 비록, 교외보다 도시적 성격이 강하긴 하지만, 소울을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확실히 그것은 ‘제1의 소울 형제’라는 이름을 얻은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의 리듬 앤 블루스(rhythm and blues) 같은 대중음악을 포함했다. 그러나 소울은 남부 흑인의 일상사나 느슨한 개인적 삶의 형태인 흑인의 역사를 노래하는 용어든 아니든, 당당하고도 고집스러운 흑인을 표현했다. 새로운 개념에는 머리카락 손질이 거의 포함되지 않았지만, 많은 흑인들은 자연스러운 외모를 뽐내기 시작했고, 더는 머리카락 손질 기계를 사지 않았다. 의상에서도 아프리카식 패션이 등장했는데, 이는 미국흑인 조상의 고향과 당시 독립국이 탄생한 것으로부터 나오는 자부심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흑인들의 인종적 자부심과 경제적 박탈감의 결합에서 블랙파워운동은 탄생했다.

    제임스 브라운의 음악을 통해 블랙파워에 대한 흑인들의 인식이 고양된 것은 사실이나, 그가 처음부터 정치적 의식이 있었다고 단정 짓기는 힘들다. 실제로 제임스 브라운이 쇼 비즈니스에서 큰 활약을 펼칠 시기, 그의 노래는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블랙파워 운동을 주도했던 SNCC의 리더 랩 브라운(H. Rap Brown)의 폭력혁명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었다. 1968년 6월 제임스 브라운은 “America Is My Home”을 녹음했고 흑인사회가 킹 목사의 죽음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에도 그는 베트남에서 투어를 하고 있었다. 때문에 흑표범당원들이 FBI로부터 살해당하고 체포되는 상황에서 제임스 브라운의 활동은 반전주의자들과 급진적인 흑인운동가들에게 비판을 받을 여지가 충분했다. 투어를 마치고 미국에 돌아온 제임스 브라운은 재기하기 위해 무엇인가가 필요했고, 그 시기에 발표된 곡이 바로 블랙파워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은 'Say It Loud'였다.


    사진: James Brown(R.I.P)

    제임스 브라운의 훵크(Funk)가 흑표범당을 포함한 블랙파워 운동에 영향을 주었는지, 이러한 시대적 환경이 그의 음악에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한 문제는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와 같은 쓸데없는 논쟁일지 모른다. 하지만, 흑표범당을 비롯한 흑인운동가들이 있었기에 그의 음악에 담긴 메시지가 쉽게 전파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랩 프로듀서인 엑스 클랜(X-Clan)의 클로드 ‘패러다이스’ 그레이(Claude ‘Paradise’ Gray)는 흑표범당을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훵크를 만들어낸 환경이 흑표범당의 시작을 가능하게 했다. 흑표범당은 같은 이치로 창조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반란이다.”

    1920년대 흑인차별 반대운동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마커스 가비(Marcus Garvey, *필자 주: 가비는 검은 피부일수록 더 좋다고 주장했다. 갈색의 피부를 가진 이보다 흑색의 피부를 가진 이를 더 우월하다고 하여 이 둘을 구분하였다. 또한, 라스타파리교의 창시자이기도 하며, 후에 ‘Black Star’라는 이름의 흑인 상선회사를 운영했다.) 만큼은 아니지만, 블랙파워는 백인들에 대한 배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랩 브라운은 저항을 위해 물리적 행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급진적인 흑인 운동가들은 온건론자들을 백인들에게 굴종하는 엉클 톰의 후계자와 다를 것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이러한 물리적 저항의 이념은 흑표범당으로 이어졌다.

    '방어적’ 폭력을 신봉한 자기 방어를 위한 흑표범당(The Black Panther Party for Self-Defense)은 1966년 캘리포니아 주 오클랜드에서 메리트 대학의 학생이던 휴이 P. 뉴튼(Huey P. Newton)과 바비 실(Bobby Seale)에 의해 창설되었다. 뉴튼과 씰은 흑표범당의 10가지 강령과 프로그램을 제정했는데, 흑인의 완전고용, 경제적 착취에 대한 회복, 좋은 주거와 교육 환경, 군 복무의 면제, 경찰의 폭력금지 등 흑인 대중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이러한 강령 이후에 60가지 당 규칙을 제정하여 운영하였다.

    흑표범당은 처음에는 경찰의 괴롭힘으로부터 흑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기관총과 법전을 가지고 흑인 게토 지역을 순찰했다. 동시에 그들은 무료 아침식사, 열린 학교, 그리고 자신들의 이웃들을 위한 병원을 제공했다. 그러던 중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 흑표범당과 경찰 간의 갈등은 캘리포니아, 뉴욕, 시카고에서 터져 나왔다. 1967년 5월 2일, 씰의 주도로 30명의 무장한 당원들은 헌법이 적용되는 지역에서 무기 운수를 금지하는 법안 제정에 반대하는 의미를 앞세워 캘리포니아 의사당을 공격하였다.

    이는 불법적인 행동으로 간주되어 여러 명의 당원이 구속되었지만, 이를 통해 흑표범당은 전국적인 인지도를 높일 수 있었다. 또한, 휴이 뉴튼이 순찰관을 살해했다는 이유로 1968년 9월 8일 15년형을 구형받았지만, 이는 오히려 흑표범당의 대대적인 시위를 야기하기도 했다. 흑표범당은 전국에서 가입하기를 원하는 수천 명의 젊은 흑인들에 의해 압도되었다. 하지만, 흑표범당의 선동적인 수사학은 흑표범당을 성난 젊은 흑인들에게 매혹적으로 보이게 했을 뿐만 아니라, 조직을 FBI 및 경찰의 감시 목표물로 만들기도 했다.

    흑표범당의 이러한 정신은 훵카델릭(Funkadelic)의 1979년 앨범 [Uncle Jam Wants You]의 음반 표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포스터는 휴이 P. 뉴튼이 중앙에 앉아 있는 유명한 흑표범당 포스터를 오마주한 디자인으로 조지 클린턴이 뉴튼의 자리에 앉아 있다. 앨범 제목 또한 미국 징병 포스터의 ‘Uncle Sam Wants You'를 패러디하고 있으며, 수록곡인 “Uncle Jam”에서는 혁명에 동참할 동지를 구하는 메시지를 훵키한 리듬 안에서 표현하고 있다.

    60년대 후반,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전운동과 더불어 흑표범당은 지도자가 구속되는 등, 세력이 약화되었다. FBI의 강경적인 대응이 시작된 것이다. 그럼에도 흑표범당은 백인 급진주의자들인 신좌파 세력과 연대를 통해 활동을 계속했으나, 1972년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에 대한 신좌파 세력과 흑표범당의 연합저항운동을 끝으로 신좌파 세력은 대체로 사라졌고, 상당수 당원을 구속과 사망으로 잃은 흑표범당의 활동도 사실상 중지되었다. 비록, 짧은 기간의 활동이었으나 흑인사회에 대한 흑표범당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1968년에 열렸던 멕시코 올림픽 200m 육상 금메달, 은메달을 땄던 토미 스미스(Tommie Smith)와 존 칼로스(John Carlos)는 시상대에서 블랙파워를 의미하는 경례를 했고 문인과 화가를 비롯한 각종 예술가들은 검은 것에 대한 아름다움을 그들의 작품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동안 더럽고 지저분한 뜻으로 여겨졌던 'Funk'의 의미가 재해석되었다. 비로소 70년대에 이르러 훵크의 황금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사진: 좌측부터 Angela Davis, Assata Shakur, Elaine Brown

    한편, ‘방어적’ 폭력을 신봉한 흑표범당이 국내 진보진영에서 여러 차례 화제가 되던 당시 그에 못지않게 주목받은 부분은 아이러니하게 여성운동 측면이었다. 바로 흑표범당을 이끌었던 세 명의 여인 때문이다. 현재 캘리포니아 산타크루즈 대학의 종신교수인 안젤라 데이비스(Angela Davis)는 세 명의 산 퀘튼 죄수를 납치하려 한 계획을 세웠으며, 그 사건 동안 4명을 죽였던 총을 공급했다는 죄목으로 고소되었다. 이 사건으로 그녀는 많은 지지를 받았는데, 18개월의 투옥생활 후 무죄를 선고받았고, 이후, 여성인권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활동을 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여성과 문화와 정치]가 있다.

    투팍의 친모로 더욱 유명한 아사타 샤커(Assta Shaur)는 흑표범당의 활동 중 하나인 무료아침식사 프로그램을 담당했다. 흑표범당 내의 마초적인 분위기를 비판할 만큼 당찬 여성이었던 아사타는 후에 흑표범당의 군대에 적극적으로 앞장서면서 FBI의 주요 타깃이 되었다. 의식 있는 MC로 힙합팬들에게 인정받는 커먼(Common)은 그의 수작인 앨범 [Like Water For Chocolate]의 “Song for Assata”를 통해 그녀를 기리기도 했다. 흑표범당의 대변인이자 재즈 뮤지션인 엘라인 브라운(Elaine Brown)은 당의 지도자였던 휴이 뉴튼이 경찰과 총격전에서 부상당한 후 대행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녀는 1969년에 앨범 [Seize the Time]을 발표했는데, 수록곡인 “The Meeting”은 흑표범당의 당가로 사용되었다. 흑표범당과 그녀의 음악은 질 스콧 헤론(Gil Scott-Heron)이나 라스트 포잇츠(The Last Poets)와 같은 급진적인 흑인 뮤지션들에게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참고문헌 
    벤자민 콸스. 2002. [미국흑인사]. 조성훈, 이미숙 역. 백산서당
    Rickey Vincent, 1996. [Funk]. St. Martin's Press
    Jeff Kaliss. 2009. [I Want To Take You Higher]. Backbeat Books
    http://baronsamdi.eglo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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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PROBE (2011-02-17 16:49:34, 110.9.134.**)
      2. Dear mama 뮤직비디오 보는데 2:57쯤에 저 포스터가 나오더라구여 신기해서..ㅎ
      1. 아토피 (2011-02-14 12:24:26, 43.244.41.***)
      2. 정말 잘 읽었습니다! 음악에서 그치지 않고 사회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이런 글은 대학 강의 아니면 역시 리드머에서 밖에 ㅎㅎㅎ

        Huey.P.Newton이 법전을 항상 차에 두고 다녔다는 일화는 유명하죠 -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 경찰들이 그를 채포하려 할때마다 법률 조항을 법전에서 들추어내어 조목조목 반박했다구요 - 제가 좋아하는 The Boondocks 시리즈의 Huey가 이 분 이름에서 따온 거더군요 ㅇㅅㅇ

        저 흑표범당 포스터는 Nas도 패러디 했죠! God's Son 앨범 부클릿중에 한장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ㅎㅅ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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