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PC통신 시절 고문서 하나가 돌아다녔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현직 뮤지션들(이정선,함춘호, 정원영, 손무현)에게 묻는 훌륭한 가수에 대한 앙케트였고, 당시 이들에게 거론되었던 김건모, 김범수, 박정현 같은 뮤지션들은 1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가창을 보여주며, 당시 이들을 평가했던 뮤지션들의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준비했다. 10년 후 '나는 래퍼다' 같은 프로가 생기진 않겠지만, 이제는 할 때가 된 것 같다. 리드머 핵심 필진들에게 훌륭한 래퍼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고 대상은 국내 힙합 뮤지션이다. 10년 전 나에게 큰 재미를 안겨 주었던 질문지와 답에 대한 리스펙(Respect)의 마음을 담아 대부분의 질문은 예전에 보았던 질문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부디 현재 우리에게 큰 감흥을 안겨 주고 있는 래퍼들이 10년, 그 이후에도 활발하게 활동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앙케트를 시작한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무조건 1명만 선정하라는 가혹한 답변에 참여한 이들은 리드머 핵심 필진으로 활동 중인 6人, 남성훈, 양지훈 ,예동현, 이경화, 이병주, Quillpen 등이다(황순욱 필자는 개인적 사정으로 불참했다). 댓글로 여러분의 참여도 대환영이다!

*본 앙케트는 랩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 앙케트에서 드러난 필자들의 의견이 뮤지션 자체를 평가하는 기준은 아님을 밝힙니다.

1. 훌륭한 래퍼를 어떻게 정의 하십니까?

남성훈: 기술적인 부분은 당연히 어떤 수준에 올라 있어야 하고, 듣는 이의 감정을 뒤흔들어 놓는 부분을 만들어 놓고, 들을 때마다 그것을 느끼게 해주는 래퍼를 좋아합니다. 단순히 랩을 기술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래퍼의 삶이 담겨 있어야 하니까요. 별개로 랩은 언어가 중심인 문화예술이기 때문에 한국힙합의 정수는 한국어 랩 안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영혼용을 멋을 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활용하는 래퍼는 훌륭한 래퍼로 꼽기 힘들 것 같네요.
 
양지훈: 비트에 가장 걸맞은 랩을 할 수 있는 래퍼.

예동현: 리듬감각과 플로우 디자인, 가사와 라임이 뛰어난 래퍼. 애티튜드와 비트 셀렉션은 그다음 문제.

이경화: 라임과 플로우, 스킬을 조화롭게 사용하며 청자에게 거부감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 여기에 좋은 비트를 선곡하는 능력까지 갖춘다면 금상첨화! 랩을 처음 시작하는 이들 중 대부분은 음색과 톤에서부터 거부감이 느껴져 실패하고 만다.

이병주: 한글 + 발성 + 라임 + 가사 + 개성 = 훌륭한 한국 래퍼

Quillpen: 다양한 소재를 잘 이용하고 비트에 맞춰가기보다는 비트를 이해하면서 리듬을 타는 게 느껴지는 랩퍼. 영어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한영혼용을 빈번하게 사용하는 랩퍼는 아웃.

2. 가장 리듬감이 뛰어난 래퍼는 누구라고 생각하나요?

남성훈: 이센스(E-Sens). 이센스만큼 동물적인 감각으로 랩을 하는 래퍼가 한국힙합 씬에서 몇이나 될까요. 이 부분에서는 이센스가 꼭대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리듬을 타고 노는 순간은 계산된 것인지 감각적으로 완급조절을 하는 것인지 정말 궁금하기까지 한데, 이센스의 모든 것을 끌어올린 프로덕션의 앨범 단위 결과물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지가 궁금하고 안타까울 뿐입니다.
 
양지훈: 개코

예동현: 테디(Teddy)와 산이(San E). 테디는 리듬감이 타고났다. 그냥 리듬감만 좋은 게 아니라 랩을 할 때 어떻게 발음하면 그게 리듬에 꾹꾹 눌러 담기는지를 몸으로 알고 있는 듯하다. 산이는 기본적으로 똑똑한 래퍼다. 리듬을 잘 타는 사람은 많은데 자기 랩을 리듬감있게 하는 래퍼는 드물다. 어떤 라임에 어떤 자음과 어떤 모음을 쓰면 랩이 더 리듬감있게 들리는지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이경화: 양동근과 함께했던 선문답에서 보여준 셔니슬로우(Sean2Slow)의 리듬감을 사랑한다. 최근 활동하는 래퍼로는 빈지노(Beenzino)가 가장 돋보인다.

이병주: 스윙스(Swings). 그가 돋보이는 건 펀치라인보다도 적절한 라임의 배치와 발음의 변형으로 만들어내는 리듬감!

Quillpen: 산이. 앨범의 완성도와 별개로 리듬 타는 것만큼은 정말 최고다.

3. 음악적 센스와 랩 스킬이 가장 뛰어난 래퍼는 누구라고 생각하나요?

남성훈: 개코. 랩의 기술적인 부분을 가늠할 때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모든 것에서 우위에 설 수 있는 몇 안 되는 래퍼 개코는 CB매스부터 다이나믹 듀오까지 활동한 시간 동안 가장 넓은 스펙트럼의 프로덕션 위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해봤기에 음악적 센스까지 우위에 선 래퍼가 아닐까요.
 
양지훈: MC 메타 (+버벌 진트)

예동현: 전체적인 센스는 스윙스가 훌륭한 듯하고, 이센스는 스킬로는 최고다. 라임이라는 형식, 혹은 바(bar)라는 구조는 어차피 산문의 가사를 구술로 풀어낼 때 리듬감을 주기 위한 도구다. 라임 자체에만 집착하면 전체 곡의 밸런스가 무너지고 어색한 벌스가 되기 쉬운데 이센스나 스윙스는 라임을 여유롭게 사용하면서 표현력이나 서술도 뛰어나다.

이경화: 음악적인 센스를 본다면 다양한 시도 속에서 가끔 오버하는 부분도 있지만, 버벌 진트를 꼽고 싶다. 랩 스킬로는 메인스트림 활동 이전에 사이먼 도미닉이 가지고 노는 호흡이 돋보였다.

이병주: 좀 포괄적인 개념인 것 같아서 넓게 적용시켜 보자면, 딱히 한 명을 꼽기 어려울 만큼 많은 것 같다. 버벌 진트, 이센스, 스윙스, 다이나믹 듀오, 데프콘 등등. 그래도 꼭 한 명이라면.... 버벌 진트.

Quillpen: 음악적인 센스는 팔로알토. 특히, 최근 결과물을 통해 보여준 소재의 활용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랩 스킬은 이센스. 남성훈 필자도 말했듯이 동물적인 감각이 그대로 느껴진다.

4. 흔히 말하는 라임이 가장 훌륭한 래퍼는 누구라고 생각하나요?

남성훈: 산이. 산이는 단순한 라임 맞추기를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너무 과하게 나간 래퍼들을 다시금 옛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깔끔하면서 수준 있는 라임을 구사합니다. 많은 부분에서 감탄의 웃음을 터지게 하는 재치 있는 라임을 툭 던지고 씩 웃는 듯한 분위기도 좋습니다. 역시 그에게 남은 것은 자신의 매력을 온전히 담아 낸 결과물이겠죠.

양지훈: 스윙스

예동현: 라임 메이킹은 산이가 탁월하다. 테디와 마스타 우도 훌륭하지만, 한영혼용이 심하고, 특히, 테디는 EP건 LP건 솔로 벌스로 꽉 채운 결과물로 증명한 적이 없다. 가끔 나오는 솔로곡은 좀 아쉬웠고. 가사와 함께 전체적으로 설계하는 의미의 라이밍이라면 MC 메타와 버벌진트.

이경화: 지나친 한영혼용의 래퍼는 배제하고 싶다. 대부분의 곡에서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개코가 가장 훌륭하다. 문학적인 재미나 비유에서는 타블로를 최고로 꼽고 싶다.
        
이병주: MC 메타. 단지 가리온이기 때문에 보내는 존중이 아니라, 오로지 한글로만 빚어내는 그의 라임이야말로 한국 최고.

Quillpen: 개코. 일상적인 소재를 일상적인 단어들을 사용하여 전혀 유치하지 않게 라임을 형성해낸다. 이거 정말 어려운 거다.

5. 자신이 꼭 빼앗아 오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목소리를 지닌 래퍼는 누구였나요?

남성훈: MC메타. MC메타의 목소리는 정말 연구대상입니다. 목소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크게 변화하지 않지만, 분노와 침착함, 그리고 긴장감과 여유를 동시에 담고 있으니까요.
 
양지훈: 데드피.

예동현: 내 목소리도 좋아서 꼭 빼앗고 싶을 만큼 탐나는 목소리는 없다....는 농담이고 개인적으론 최자처럼 중량감 있으면서도 깨끗한 목소리를 좋아한다.

이경화: 피타입(P-Type). 힙합 씬의 임재범이랄까. 음색만으로도 무게감이 느껴지는 사람이다.

이병주: 데드피. 여러 면에서 그는 훌륭한 래퍼지만, 특히, 목소리가 가지는 매력이 엄청난 듯!

Quillpen: 차진 톤의 개코와 메시아적인 이그니토.

6. 실력에 비해 덜 알려진 그래서 안타까운 래퍼가 있나요?

남성훈: X.L 얼마만큼의 실력에 얼마나 덜 알려진 것을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X.L은 분명 발견의 재미가 있는 래퍼입니다. 비루한 듯한 예상을 살짝 빗나가는 단어들을 툭툭 끊어 치는 특유의 스타일은 단번에 귀를 잡아 끌지는 않지만, 심각함 뒤에서도 낄낄대는 듯한 감춰진 유머를 담고 있습니다. 뭐라 설명하기가 힘들긴 하네요.
 
양지훈: Phebruary(랍티미스트 앨범에 참여했던 적이 있습니다). 평소 가깝게 지내는 지인이긴 한데, 랩 톤이나 스타일이 충분히 통할만한 수준.

예동현: 내가 잘한다고 느끼는 래퍼들은 대부분 유명하더라. 방사능도 리드머 어워드 신인상 받았고. 덜 알려졌다기 보단 과소평가된 래퍼로 양동근을 꼽고 싶다. 가끔 그의 랩은 메쏘드맨처럼 들린다.

이경화: 평론가 성우진이 프로듀서를 맡았던 더스티(Dusty)라는 듀오에서 혁건이라는 친구가 아쉽다. 어린 나이에 데뷔했는데 더스티 실패 후, [1999 대한민국]에 참여하고 이후로는 빛을 보지 못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 활동 했다면 도끼 정도 되지 않았을까?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의 오박사도 아쉽다.

이병주: 레이제이. 순식간에 재치 있는 가사와 라임을 써내려 가고, 한 방에 녹음을 끝내던 그는 당시 친구였던 조pd와는 레벨이 달랐음은 물론, 그때 활동하던 언더그라운드의 래퍼들과 비교해 봐도 훌륭한 래퍼였다. “인간승리”에 실패해 안타깝다.

Quillpen: 차붐. 덜 알려졌다기보다는 과소평가되고 있는 래퍼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시원한 욕설로 유명해졌지만, 리듬을 타는 감각이나 스토리텔링 면에서 상당한 실력자다.

7. 최고의 훅 메이커로는 누구를 꼽고 싶으신가요?

남성훈: 타이거JK. 훅메이커로 단번에 떠오르는 래퍼는 없지만, 생각해보면 드렁큰 타이거의 곡들 중 훅이 기억에 남는 곡들이 많습니다. 최근작의 트랙리스트만 봐도 곡마다 훅이 제일 먼저 떠오르네요.

양지훈: UMC(진지한 답변입니다)

예동현: 타이거 JK. 히트곡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재미없는 훅은 차라리 없는 게 낫다. 다음으로는 도끼. 훅 메이킹도 좋고 퍼포먼스도 감각 있다.

이경화: 좋은 훅은 따라 하기 쉽고 따라 하고 싶게 만드는 거라 생각한다. 힙합 초창기에는 허니 패밀리의 명호의 훅이 따라 하기 쉬웠다. 
        
이병주: 꼽아볼 만한 훅 메이커가 국내에 딱히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메인스트림에 있는 타이거 JK, YDG, 다이나믹 듀오 등이 잘 만드는 편.

Quillpen: YDG.

8. 꼭 들어보고 싶은 콜라보 조합은 누구와 누구 인가요?

남성훈: 지구인(of 방사능) & 제이통. 한 곡 안에서 제대로 랩 좀 해주시면서 충돌하면 굉장히 큰 폭발이 일어날 듯한 신인들 같은데, 생각만해도 흥분되네요.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양지훈: 데프콘 & MC 메타.

예동현: 윤미래 & 리미. 90%의 남자 래퍼들보다 잘하는 여자 래퍼들 조합이 재미있지 않겠나?
   
이경화: 시너지는 예상외의 조합에서 터지기 마련이라 딱히 궁금한 콜라보는 없다. 래퍼들 간의 콜라보보다는 1MC+1PD 혹은 1MC+1Vocal 조합의 훌륭한 앨범이 나온다면 좋겠다.

이병주: DJ Uzi & 4wd. 조pd와 버벌진트는 이미 했으니까, 이제 저 둘이 복귀 기념으로 작업을!

Quillpen: 타이거 JK & 데프콘. 메인스트림에서 가장 힙합다운 행보를 걷고 있으며, 방송보다는 진짜 라이브 무대에서 가장 파괴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이 둘이 콜라보를 한다면…. 상상만으로도 피가 끓어오른다.

9. 만약, 자신이 프로듀서라면, 가장 아끼는 비트를 주고 싶은 래퍼는 누구인가요?

남성훈: 라임어택. 라임어택의 랩은 정말 견고합니다. 가장 안정적으로 수준 있는 랩을 하는 래퍼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부분 예상 가능하겠지만, 듣는 이를 흥분하게 만드는 순간도 잊지 않고 하나씩 만들어 냅니다. 장점이자 단점일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비트가 아깝다는 이야기를 들을 실망스런 랩은 하지 않을 것 같네요. 실제로도 그렇고요. 가장 아끼는 비트라면 괜한 리스크 같은 건 없어야겠죠.
 
양지훈: 개코

예동현: 셔니슬로우에게 주고 싶다. 제발 앨범 좀....

이경화: 개코와 빈지노. 항상 평타이상 해주는 사람들.

이병주: 지드래곤. 지금 통장에 잔액이 없다....
 
Quillpen: 이센스. 진정한 이센스를 소환하고 싶다. 

10. 최고의 래퍼로 누구를 꼽고 싶으신가요?

남성훈: 스윙스. 단순히 긴 랩이 아니라, 스윙스의 뇌 속 여행을 한 듯한 “500BOMBS”이후, 그에 대한 확신에 찬 기대를 갖게 됐습니다.

양지훈: MC 메타. 
 
예동현: 뭐 이게 야구처럼 누구 50홈런, 이런 기록이 남는 게 아니라서 누가 최고라고 딱 말하기는 어렵다. 상위에 속한 래퍼들 가운데 개인적 취향으로 갈리지 않겠나? 또 누구는 스웩에 강하고 누구는 서술이 좋고 이렇게 장기가 다 다르다. 비트 셀렉션이나 다른 부가적인 능력에 대한 고려 없이 랩으로만 딱 한 명 꼽으라면 이센스가 좋은 듯하다.

이경화: 개코

이병주: MC 메타.

Quillpen: MC 메타. 그는 예전에도, 지금도 탑클래스의 랩핑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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