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드머 토픽] Heavy D를 추모하며… Peaceful Journey
- rhythmer | 2011-11-14 | 14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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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새벽까지 외부 원고를 마감하고 늦잠을 자던 11월 9일 아침, 리드머 박배건 인터뷰어의 문자가 단잠을 깨웠다.
글: 강일권
‘헤비 디 사망, 충격이네요.’
부리나케 인터넷에 접속하여 검색창에 그의 이름 철자를 입력했다. ‘헤비 디 44세에 사망(Heavy D dies at 44)’. 소식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자 가슴 한 구석이 헛헛해졌다. 동시에 흥분된 얼굴로 청계천 전자상가 거리를 걸어가던 17년 전, 그러니까 1994년도가 떠올랐다.
그날은 아버지와 함께 전자상가 내에 있는 한 음반 도매상가로 힙합음반을 디깅하러 가던 날이었다. 지금처럼 인터넷에 정보가 넘쳐나지도 않았고, 미국의 힙합음반은 정식으로 수입이 되지도 않았던 시대였다. 그나마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던 음악을 녹음해서 주구장창 듣다가 수입음반을 구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소문이라도 들으면, 그렇게 가슴 설렐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당시 찾아갔던 음반숍은 소문과 너무 달랐다. 음반장을 빼곡히 채운 건 라디오에서 들었던 랩퍼들의 음반이 아니라 대부분 록, 제이-팝, 재즈 음반들이었다.
그래도 이대로 갈 순 없다는 생각에 매의 눈으로 음반장 훑기를 수십 분, 드디어 낯익은 이름 하나를 포착했다. ‘Heavy D & The Boyz’! 그리고 그해 발매됐던 새 앨범 [Nuttin’ But Love]. 헤비 디는 “Now That We Found Love”라는 궁극의 뉴 잭 스윙 랩 송으로 국내 팝 음악 팬에게도 알려져 있었지만, 이후 앨범들은 라이센스되지 않았기에 몹시 반가운 발견이었다. 무엇보다 헤비 디의 [Nuttin’ But Love]는 내가 처음으로 구입한 ‘수입 힙합 음반’이다.
이처럼 헤비 디와 그의 음악은 내 추억 한 편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욱 짙은 듯하다. [Nuttin’ But Love] 이후, 여러 하드코어 랩퍼들의 앨범을 들어오면서 난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대중적인 프로덕션과 긍정적인 메시지를 기반으로 하는 뮤지션임에도 어떻게 당대 하드코어 랩퍼들과 힙합헤드들로부터 공격 당하긴커녕 존경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해올 수 있었을까…? 대표적인 팝-랩퍼들이었던 엠씨 해머(MC Hammer), 마키 마크(Marky Mark)는 물론, 심지어 윌 스미스(Will Smith, 당시 The Fresh Prince)까지 하드코어 랩퍼들의 비아냥 대상이 됐던 시기임을 고려하면, 더욱 더 미스테리한 일이었다.
답은 균형이 아니었을까 싶다. 헤비 디는 화려한 라임이나 심오한 은유를 구사하는 랩퍼는 아니었지만, 언제나 일상적인 주제(사랑, 파티 등등)와 무거운 주제(힙합 커뮤니티 이슈, 인종차별 등등)를 적절한 비율로 담아낼 줄 알았다. 전자의 비율이 훨씬 크긴 했지만, 그가 내뱉는 랩은 때론 사람들을 춤추게 하고, 때로는 (너무 과격하게만 질주하는) 힙합 커뮤니티에 반성해볼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보이지 않게 빈민가 아이들의 계몽과 후원에 앞장섰으며, 고 노토리어스 비아이쥐(The Notorious B.I.G)를 비롯한 많은 후배 랩퍼들에게 좋은 롤 모델이 되었다.스스로 내세웠던 캐릭터 ‘과체중 연인(The Overweight Lover)’으로도 유명한 헤비 디가 데뷔한 건 1987년이다. 자메이카에서 태어나 뉴욕으로 옮겨오면서 랩과 만난 그는 고등학교 친구들인 디제이 에디 에프(DJ Eddie F/디제이, 프로듀서), 트러블 티-로이(Trouble T-Roy/댄서), 쥐-위즈(G-Wiz/댄서)와 함께 헤비 디 앤 더 보이즈를 결성하고 데모 테입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든 데모 테입은 데프 잼(Def Jam)의 경영진이었던 안드레 해럴(André Harrell)에게 들어가게 된다. 당시 해럴은 자신의 레이블 업타운 레코즈(Uptown Records) 론칭을 준비 중이었는데, 86년 헤비 디 앤 더 보이즈는 바로 이곳의 첫 번째 계약 아티스트가 되었다.
이후, 1년 여의 작업 끝에 에디 에프, 테디 라일리(Teddy Riley), 말리 말(Marley Marl) 등이 프로덕션에 참여한 대망의 첫 앨범 [Living Large]를 발표했고, "Mr. Big Stuff", "The Overweight Lover's in the House" 등의 싱글이 히트한 것을 비롯하여 앨범 역시 호평받으며 성공적으로 데뷔한다. 89년에 발표한 두 번째 앨범 [Big Tyme]도 더 많은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성공을 이어갔는데, 그 기쁨도 잠시, 헤비 디는 멤버이자 벗인 트러블 티-로이가 투어 도중 추락사하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피트 락 앤 씨엘 스무쓰(Pete Rock & CL Smooth)의 명곡 중 하나인 "They Reminisce Over You (T.R.O.Y.)"가 바로 티-로이에 대한 추모곡이다.
사진의 맨 왼쪽이 Trouble T-Roy (R.I.P)
친구를 잃은 슬픔은 다음 앨범 [Peaceful Journey]에 고스란히 투영됐다. 타이틀과 커버 아트에서 추모를 표한 이 앨범은 오제이스(The O’Jays)의 동명 곡을 뉴 잭 스윙으로 기가 막히게 재해석한 “Now That We Found Love”라는 엄청난 히트 싱글을 탄생시키며 헤비 디의 대표 앨범으로 자리매김했다. 당시 그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영원불멸의 팝 아이콘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의 싱글 “Jam”에 참여했던 것만 봐도 간접적으로나마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빅 대디 케인(Big Daddy Kane), 그랜드 푸바(Grand Puba), 쿨 쥐 랩(Kool G. Rap), 큐-팁(Q-Tip), 피트 락 앤 씨엘 스무쓰 등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MC들이 총출동한 단체곡 "Don't Curse"를 통해서도 헤비 디의 위상이 드러난다.
힙합 씬에서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한 건 이어진 네 번째 앨범 [Blue Funk]였다. 이 앨범에는 멤버 에디 에프와 기존에도 호흡을 맞췄던 피트 락을 비롯하여 붐 뱁 힙합(Boom Bap Hip Hop)의 명장 디제이 프리미어(DJ Premier)까지 프로덕션에 가세했는데, 그동안 뉴 잭 스윙과 댄서블한 스타일의 음악을 주로 해오던 것과 달리 보다 소울풀하고 펑키한 음악을 담아서 팬들의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냈다. –앨범에 수록된 단체곡 "A Buncha Niggas"에 참여했던 노토리어스 비아이쥐는 후에 본인의 첫 싱글 “Juicy”에서 헤비 디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성공을 이어가던 헤비 디 앤 더 보이즈는 94년에 발표한 다섯 번째 앨범을 끝으로 해체했는데, 그 앨범이 바로 앞서 언급한 [Nuttin’ But Love]다. 비록, 예전보다 차트 성적이 화려하진 않았지만, 피트 락이 특유의 드럼 위로 루더 밴드로스(Luther Vandross)의 “Don’t You Know That”을 재구성한 "Got Me Waiting"과 알앤비 그룹 실크(Silk)가 참여한 “Got Me Waiting (Remix)", 그리고 타이틀 곡 “Nuttin’ But Love” 등이 선전하면서 ‘헤비 디’라는 브랜드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특히, 엘엘 쿨 제이(LL Cool J)부터 스파이크 리(Spike Lee) 감독에 이르기까지 그의 절친한 동료이자 씬의 베테랑들이 대거 ‘Shout-Out’으로 참여한 인트로 "Friend & Respect"는 많은 화제가 되기도 했다. 판매량으로만 보자면, 이후 앨범들부터 랩퍼로서 그의 커리어는 내리막이었다고 볼 수 있다.
‘The Boyz’를 떼어낸 첫 앨범 [Waterbed Hev]에서 싱글 "Big Daddy"가 분전하긴 했지만, 조금씩 시작되던 트렌드의 변화 속에서 헤비 디의 영향력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래서였을까? 99년 작 [Heavy]를 끝으로 한동안 그는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며 배우로서의 커리어에 집중했다. 한편, 안드레 해럴이 모타운(Motown)의 재건을 위해 업타운 레코즈를 떠난 95년에서 98년 사이 헤비 디는 레이블의 CEO이자 프로듀서로서 꽤 성공적인 이력을 남겼다. 소속 뮤지션들인 4인조 알앤비 그룹 소울 포 리얼(Soul For Real), 여성 알앤비 싱어송라이터 모니파(Monifah), 할렘 출신의 랩퍼 맥그러프(McGruff) 등의 앨범을 책임 프로듀싱한 것을 비롯하여 다수의 힙합, 알앤비 앨범에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그리고 [Heavy]가 발표된 지 10년이 되기 몇 달 전, 자신의 음악적 뿌리이자 고향의 음악인 레게를 본격적으로 시도한 새 앨범 [Vibes]를 들고 베테랑 뮤지션의 행보를 이어갔다.
2011 BET Hip Hop Awards 퍼포먼스 모습
얼마 전인 10월 4일에는 그의 새 앨범 [Love Opus]가 조용히 발표됐다. 그리고 바로 그 달에 열린 ‘2011 BET Hip Hop Awards’에서는 여전히 힘이 넘치는 라이브 무대를 선보이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과연 누가 짐작했겠는가.... 수많은 후배들과 힙합 팬이 지켜보는 가운데, 댄스와 함께 히트곡 메들리를 멋들어지게 부르며, ‘The Original Overweight Lover’의 귀환을 선포하는가 싶던 그가 갑작스레 사망할 줄이야. 언제나 힙합 커뮤니티에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메시지를 설파하고 후배들과 커뮤니티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씬의 큰형님은 2011년 11월 8일, LA 캘리포니아 베버리 힐스에 있는 자택 밖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호송됐으나 끝내 마지막 숨을 붙잡지 못했다(사인은 ‘호흡곤란증후군’이었다).이제 막 힙합음악이라는 걸 알아가려던 시기, 나의 귀와 가슴을 벅차게 했던 뮤지션이자, 힙합 씬의 멘토 중 한 명이었던 그의 죽음을 이렇게 글로나마 애도한다.
R.I.P Dwight Arrington Myers ‘Heavy D’
(1967. 05.24 ~ 2011.11.08)
부디 편히 잠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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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mortal (2011-11-14 20:49:31, 218.235.76.***)
- 정말 좋아하던 아티스트;; R.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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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8 (2011-11-14 13:37:08, 125.180.25.**)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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