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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드머 토픽] 힙합 역사 속 '원 히트 원더스(one-hit wonders)' 베스트 20 PART. 1
    rhythmer | 2012-03-29 | 15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원 히트 원더(one-hit wonder)는 한 장의 싱글이나 앨범이 크게 히트한 이후, 별다른 커리어를 이어가지 못한 아티스트들을 일컫는다. 미국 힙합 역사 속에도 많은 원 히트 원더 랩퍼들이 존재하는데, 비록, 아티스트의 생명은 짧았지만, 그들이 남긴 히트 싱글 중에는 세계의 매체와 힙합팬 사이에서 명곡으로 끊임없이 회자되는 경우도 많다. 그만큼 원 히트 원더 중에는 꼭 한 번 들어볼 만한 트랙들이 수두룩하니 절대 그냥 지나치지 말고 감상해보시길 권한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 두 번의 기획에 걸쳐 힙합 역사 속 최고의 원 히트 원더 20곡을 소개하고자 한다.

    *참고사항

    1) 리드머 전 필진이 참여한 공식 결산 리스트가 아니라 편집장인 저 개인이 선정한 리스트입니다.

    2) 표기는 무순위입니다.



    1. Craig Mack과 “Flava In Ya Ear”

     

    뉴욕 출신의 크래이그 맥(Craig Mack)은 디디(당시 ‘Puff Daddy’)가 노토리어스 비아이쥐(The Notorious B.I.G)와 동시에 데뷔시키고 성공시킨 랩퍼였다. 94년 9월 20일에 발매된 크래이그 맥의 앨범보다 며칠 앞서 발매된(94년 9월 13일) 비기의 [Ready To Die]가 워낙 엄청난 성공을 기록하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묻히긴 했지만, 맥의 데뷔작 [Project: Funk da World]의 인기도 상당했다. 앨범은 판매량 ‘골드(Gold/50만 장 이상 판매)’를 기록했고, 두 히트 싱글 “Flava In Ya Ear”와 "Get Down"도 각각 ‘플래티넘(Platinum)/100만 장 이상)’과 ‘골드’를 찍었다. 그만큼 크래이그 맥은 비기와 함께 배드 보이 엔터테인먼트(Bad Boy Entertainment)가 레이블로서 입지를 다지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특히, 앨범의 “Flava In Ya Ear”의 인기는 정말 대단했다. 명장 이지 모 비(Easy Mo Bee)의 손길을 통해 탄생한 이 곡의 비트는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신선하고 나른한 그루브를 선사했고, 탁한 음색의 능청스러운 맥의 플로우 역시 진한 인상을 남겼다. 그야말로 90년대 힙합을 논할 때 꼭 한 번 들어봐야 할 명곡. 노토리어스 비아이쥐, 버스타 라임즈(Busta Rhymes), 엘엘 쿨 제이(LL Cool J), 람페이지(Rampage) 등이 참여한 리믹스 버전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인기가 오래 가진 못했다. 94년당시 디디는 크래이그 맥의 두 번째 앨범도 제작 중이라고 했지만, 의견 마찰 때문에 맥은 배드 보이를 탈퇴하고 독자적인 행보를 택하게 된다. 그리고 97년에 두 번째 앨범 [Operation: Get Down]을 발표했으나 결과는 참담했다. 그렇게 배드 보이의 성공적인 초창기 로스터의 핵심 중 한 명이었던 크래이그 맥의 커리어는 겨우 두 번째 앨범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2. Paperboy와 “Ditty”

    LA 출신의 페이퍼보이(Paperboy)는 1993년, “Ditty”라는 제목의 싱글 하나로 정말 많은 인기를 누렸다. 故이지-이(Eazy-E) 사단 쪽에서 활약했던 웨스트코스트 베테랑 리듬 디(Rhythm D)가 프로듀싱한 “Ditty”는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10위가 최고 기록이었지만, 굉장히 오래 상위권에 머물면서 플래티넘(100만 장 이상 판매)’을 찍었다. 또한, 94년에 열린 그래미 어워드에서 ‘Best Rap Solo Performance’ 부문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 수상은 닥터드레(Dr.Dre)의 “Let Me Ride”.

    페이퍼보이의 멜로디컬한 후렴구가 매우 중독적이었던 이 곡의 인기에 힘입어 앨범 [The Nine Yards]도 50만 장 이상 판매량을 올리는 성공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 반짝 인기 끝에 그의 커리어는 곤두박질쳤다. 이후, 독립 노선을 걸으면서 앨범을 발표하고, 2000년대 초반까지 간간이 새 싱글 소식이 들리긴 했지만, 이젠 잊힌 이름이 되었다.





    3. Skee-Lo와 “I Wish”

    LA 출신 스킬-로(Skee-Lo)의 히트 싱글 “I Wish”는 95년 가장 많은 라디오 에어플레이를 기록한 힙합 싱글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욕설 한 번 나오지 않는 스킬-로의 이 곡이 웨스트코스트 갱스터 랩의 인기가 극에 달하던 시기에 이토록 많은 인기를 끌었다는 점은 매우 눈 여겨 볼만한 지점이다. 뉴욕에서 태어나 일찍이 로스엔젤레스를 삶의 터전으로 삼으면서 음악을 만들기 시작한 스킬-로는 이 싱글과 동명의 데뷔앨범 모두 각각 50만 장 이상 팔아 치우며 첫 커리어를 대성공으로 장식했다. “I Wish”의 최고 차트 성적은 13위였지만, 높은 판매량과 함께 싱글과 앨범 모두 그래미 어워드 후보에 오르는 등, 그해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5년 만에 발표한 두 번째 앨범 [I Can’t Stop]은 조용히 묻혀버렸고, 간간이 공연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긴 했지만, 커리어를 회복하진 못했다. 



    Skee-Lo - I Wish by christ88


    4. Tag Team과 “Whoomp! (There It Is)”

    디씨 더 브레인 슈프림(DC the Brain Supreme)과 스티브 롤린(Steve Roll'n)으로 이루어진 마이애미 듀오 태그 팀(Tag Team)의 “Whoomp! (There It Is)”는 전 장르를 통틀어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93년 최고의 히트 싱글이었다. 비록, 차트 1위에 오르진 못했지만, 수십 주 동안 2위 자리에 군림했으며, 약 1년 간 차트 상위권에 랭크되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남겼다. 그 결과 싱글은 무려 400만 장 이상 팔려나갔으며, 93년 결산 차트에서는 故휘트니 휴스턴의 “I Will Always Love You”에 이어 2위에 올랐다. 곡이 수록된 동명의 앨범도 플래티넘을 기록했으며, 이 곡의 히트로 마이애미 베이스(Miami Bass) 음악을 기반으로 하는 식스티 나인 보이즈(69 Boyz), 쿼드 시티 디제이즈(Quad City DJ’s) 등의 음악도 크게 히트했다. 하지만 2년 뒤 발표된 태그 팀의 두 번째 앨범 [Audio Entertainment]는 전혀 주목받지 못한 채 상업적으로 실패했고, 듀오는 이 앨범을 끝으로 해체했다.

    여담으로 “Whoomp! (There It Is)”가 차트에서 맹위를 떨칠 당시, 비슷한 제목과 후렴구를 가진 나인티파이브 사우스(95 South)의 싱글 "Whoot, There It Is"가 그보다 한 달 앞서 발표됐었는데, 이 곡 역시 차트 11위까지 오르는 성공을 거두긴 했으나 태그 팀의 곡에 가려 빛이 바랬다.





    5. K7과 “Come Baby Come”

    대중적인 스타일의 힙합음악을 지향했던 랩퍼 케이세븐(K7)은 93년 “Come Baby Come”이라는 메가히트 싱글과 함께 성공의 단맛을 봤다. 당시 유명 레이블이었던 토미 보이(Tommy Boy)를 통해 발매됐던 그의 싱글 “Come Baby Come”과 앨범 [Swing Batta Swing]은 미국은 물론, 영국에서도 크게 히트했다(싱글과 앨범 모두 각각 골드를 기록).

    한편, 원래 일렉트로니카 음악에 기반을 둔 라틴 프리스타일(Latin Freestyle) 그룹 TKA의 리더였던 K7은 여전히 세계 클럽 투어를 하면서 활동하고 있으며, 2009년에는 아이튠즈를 통해 새 앨범 [The King's Agenda]를 발표하기도 했다.





    6. Sporty Thievz와 "No Pigeons"

    뉴욕 출신의 힙합 그룹 스포티 띠브즈(Sporty Thievz)는 98년, 싱글 "No Pigeons"의 깜짝 히트와 함께 많은 주목을 받았던 팀이다. TLC의 차트 넘버원 싱글이었던 "No Scrubs"의 비트를 그대로 빌려와 남자의 시선에서 재해석했던 이 곡의 인기에 힘입어 그들의 앨범 [Street Cinema]도 50만 장 이상 판매량을 기록하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성공의 기쁨도 잠시, 이들에겐 비극이 찾아왔다. 멤버 중 말론 브란도(Marlon Brando)가 차에 치일 뻔한 아이를 구하고 목숨을 잃은 것. 당시 운전자는 술에 취한 상태였다고 밝혀져 더욱 안타깝게 했다.

    첫 앨범의 성공 이후, 스포티 띠브즈의 커리어는 내리막을 걸었는데, 2012년 듀오로 팀을 재정비하고 새 앨범 [Street Cinema 2]를 준비 중이다.





    7. Wreckx-N-Effect와 "Rump Shaker"

    테디 라일리(Teddy Riley)가 전폭적으로 지원사격을 가했던 뉴 잭 스윙/힙합 그룹 렉스 앤 이펙트(Wreckx-n-Effect)와 그들의 싱글 “Rump Shaker”는 92년 클럽 씬을 뒤흔들어 놓았다. 힙합 역사 속 가장 유명한 후렴구 중 하나(‘All I wanna do is zooma-zoom-zoom-zoom in a boom-boom’)가 포진해있는 이 곡은 당시 빌보드 차트 2위까지 오르며, 더블 플래티넘(200만 장 이상 판매)을 기록했다. 더불어 이 곡이 수록됐던 두 번째 앨범 [Hard or Smooth]도 200만 장 이상 판매되는 대성공을 기록하며, 차트 성적이 미미했던 데뷔의 아픔을 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발표한 세 번째 앨범 [Raps New Generation]는 전혀 주목받지 못했고, 결국, 이들도 추억의 그룹으로 남았다.

    여담으로 "Rump Shaker"는 이후, 진짜로 곡을 만든 이가 누구냐를 놓고 루머에 휩싸인 바 있는데, 당시 테디 라일리의 제자였던 넵튠즈(The Neptunes)가 고스트라이터였다는 설이었다. 이 루머가 꽤 설득력을 얻어가던 찰나 앨범에 참여했던 프로듀서 타이 파이피(Ty Fyffe)가 곡은 테디 라일리와 자신이 만든 게 맞고, 퍼렐(Pharrell)은 단지 테디의 피처링 랩 벌스를 썼을 뿐이라며 루머를 종식시킨 일화가 있다.





    8. Lord Tariq & Peter Gunz와 "Déjà Vu (Uptown Baby)"

    큰형님 랩 그룹 후디니(Whodini)의 96년 앨범 [Six]를 통해 첫 모습을 드러냈던 듀오 로드 타릭 앤 피터 건즈(Lord Tariq & Peter Gunz)는 싱글 "Deja Vu (Uptown Baby)"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주목받았다. KNS가 프로듀싱한 이 곡은 빌보드 차트 9위까지 오른 이후로도 매우 오랫동안 차트 상위권에 랭크되었으며, 그 결과 100만 장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했다. 또한, 미국을 넘어 캐나다와 영국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싱글의 인기에 비해 앨범 [Make It Reign]은 그다지 조명받지 못했지만, 듀오는 여러 뮤지션의 리믹스 트랙 피처링으로 불려 다니는 등 바쁜 한해를 보냈다. 그러나 약 1년여의 짧은 활동 끝에 듀오는 해체했고, 각자의 결과물 역시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한편, 오늘날 굴지의 힙합 레이블인 영 머니 엔터테인먼트(Young Money Entertainment)에서 데뷔 앨범을 준비 중인 신예 코리 건즈(Cory Gunz)가 바로 피터 건즈의 아들이다.





    9. Vanilla Ice와 “Ice Ice Baby”

    에미넴(Eminem)이 나타나기 이전까지 바닐라 아이스(Vinilla Ice)는 아프로-아메리칸이 주도하는 힙합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백인 랩퍼였다. 그리고 엠씨 해머(MC Hammer)와 함께 팝-랩(Pop-Rap)의 쌍두마차로 군림했다. 90년에 발표된 그의 싱글 "Play That Funky Music"과 “Ice Ice Baby”는 전 세계 차트와 음악 씬을 초토화시켰고, 이 곡들이 수록된 메이저 데뷔앨범 [To the Extreme]은 빌보드 앨범차트에서 무려 16주나 1위 자리를 내놓지 않았으며, 세계적으로 천오백만(15,000,000) 장이나 팔려나가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남겼다. 각종 어워드를 휩쓸었음은 물론이다. 팝-랩을 지향했던 그를 향해 일부 유명 하드코어 랩퍼들은 독설을 내뱉었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인기는 날로 높아져 갔다.

    그러나 이러한 ‘바닐라 아이스 천하’는 곧 얼마 되지 않아 막을 내렸다. 한계가 명확했던 랩 스킬, 마케팅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탄로난 출신의 진실, 그리고 팝-랩의 몰락 등이 한데 겹치며, 바닐라 아이스는 세계의 슈퍼스타에서 일순간 힙합 커뮤니티의 놀림감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후, 그는 나름 하드코어한 가사로 무장하고 재기를 꿈꿨지만, 옛 명성을 되찾는 데는 실패했다. 





    10. Tone Lōc과 “Wild Thing”

    LA 출신의 랩퍼 톤 록(Tone Lōc)은 89년에 발표했던 두 장의 싱글 "Wild Thing"과 "Funky Cold Medina"의 메가히트와 함께 굉장한 인기와 부를 누렸다. 특히, 그의 성공은 아직 웨스트코스트 힙합 뮤지션들이 힘을 과시하지 못하던 시기에 이룬 것이어서 더욱 주목받았는데, 두 싱글 모두 싱글 차트 5위권 진입은 물론, 각각 더블-플래티넘과 플래티넘을 기록했다. 더불어 앨범 [Lōc-ed After Dark] 또한, 200만 장 이상이나 팔려 나갔다. 또한, 그는 랩퍼 외에도 여러 편의 만화에서 성우로도 활약했다. 그러나 91년에 발표한 두 번째 앨범 [Cool Hand Lōc]은 전혀 조명받지 못했고, 톤 록이라는 이름은 금세 역사 속에 묻혔다.

    한편, 톤 록은 지난 2010년에는 음주운전으로, 지난 2011년에는 가정 폭력 사건으로 체포되어 체면을 구긴 바 있다. 

     





    기사작성 / RHYTHMER.NET 강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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