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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이제 그만 힙합을 가난에서 놓아주세요
    rhythmer | 2015-02-23 | 37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글: 강일권



    여전히 한국에서 힙합은 '가난으로부터, 혹은 가난에 의해서 태어난' 음악이라 정의되곤 한다. 전문가나 평론가부터 장르 팬을 자처하는 이들까지, 많은 이가 힙합 음악의 기원으로 '가난'을 이야기하는 게 일종의 진리처럼 여겨진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실제 힙합이라는 용어가 처음 가요계에 등장했던 1990년대 신문과 잡지 기사는 물론, 오늘날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을 통해 접할 수 있는 여러 공식·비공식 정보 글들은 이러한 현실을 잘 뒷받침해준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져서 이는 사실이 아니다.

     

    힙합의 역사와 음악 속에서 가난이 매우 중요한 요소이자 배경인 것은 맞다. 극심한 인종차별 속에서 사회 진출을 억압받던 흑인들의 삶은 빈곤할 수밖에 없었고, 그 와중에 탄생한 게 힙합이니까. 그러므로 크게 보자면, 가난 속에서 힙합 음악이 나왔다는 말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특히, 힙합이 태동한 '70년대의 사우스 브롱크스(South Bronx)는 누구도 오고 싶어 하지 않고, 누구도 살고 싶어 하지 않을 정도로 빈곤과 범죄로 점철된 버림받은 지역이었다. 하지만 가난은 비단 힙합뿐만 아니라 흑인들의 대중예술 전반에 깔린 정서를 대변한다고 봐야 한다. 무엇보다 사실의 왜곡은 그 배경으로 제시하는 근거들에서 발생하는데, 이를테면, '흑인은 가난했기에 악기를 살 돈이 없었다.'라든가 '제작 환경이 여의치 않았던 흑인들의 음악적 자구책' 같은 말들로 힙합 음악의 탄생과 직결시키는 건 완전히 잘못된 해석이다. 다시 말해서 흑인들이 가난했기 때문에 지금 같은 힙합 음악의 작법과 형식이 나오게 된 게 아니라는 소리다.

     


    *사진: 왼쪽부터 쿨 허크, 아프리카 밤바타, 그랜드마스터 플래시


    그 결정적인 근거는 바로 '힙합의 아버지'라 불리는 디제이 쿨 허크(Kool Herc)를 위시로 한 힙합 선구자들을 통해 찾을 수 있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이 당연히 빈곤했을 거로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일단 자메이카 킹스턴에서 사우스 브롱크스로 이주해온 쿨 허크의 집안은 비교적 넉넉한 편이었다. 그의 아버지 키스 캠벨(Keith Campbell)은 노동자 계급이긴 했지만, 직원들을 관리하고 업무를 총괄하는 지위였는데, 지역 알앤비(R&B) 밴드의 스폰서를 할 정도였으며, 집에는 고가의 음향 시스템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쿨 허크는 힙합이 태어난 날로 일컬어지는 1973년 여름의 역사적인 파티에서 이 거대한 사운드 시스템을 앞세워 전례 없는 충격을 안겼다. 이후, 많은 이가 알고 있듯이 그가 두 턴테이블과 믹서를 가지고 곡의 간주(Break) 부분을 무한 반복시키는 회심의 기술, 일명 '메리 고 라운드(Merry-Go-Round)'를 통해 힙합 음악 작법의 초석을 다지게 된 것이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힙합 음악의 탄생과 가난을 직결시키는 다양한 말과 글이 얼마나 얄팍한 것이었는지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다른 선구자들의 예를 살펴보면 이는 더 명확해진다. 힙합의 4대 요소를 전파하며, 힙합을 문화로 확장시킨 아프리카 밤바타(Afrika Bambaataa)는 일찍이 범상치 않은 식견을 바탕으로 여러 갱 집단 사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유일무이한 인물로 유명했다. 신상에 대한 정보를 철저히 비밀로 했던 밤바타이지만, 당시 그의 위치와 행적 등을 봤을 때, 스스로 검소하게 살았다면 모를까 돈이 없어서 음악을 배우지 못하거나 만들지 못할 형편은 아니었다. 특히, 밤바타가 처음 쿨 허크의 플레이에 매료되었던 것도 순전히 '혁신적인 스타일' 때문이었다는 걸 간과해선 안 되겠다.  

     

    물론, 힙합 선구자들이 다 허크나 밤바타처럼 여유 있는 환경이었던 건 아니다. 또 한 명의 위대한 디제이 그랜드마스터 플래시(Grandmaster Flash)는 값비싼 음악 장비나 레코드를 살 형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망가지거나 버려진 차에서 라디오와 스피커를 떼어와 수리하여 사용하곤 했는데, 그렇다고 그가 궁여지책으로 이것들을 디제잉이나 음악 창작에 활용한 건 아니다. 플래시가 한창 클럽가를 주름잡던 쿨 허크의 플레이를 보고 디제이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 것 역시 '돈이 없어도 힙합을 할 수 있다.'라는 이유가 아니라 그 독창적인 스타일과 아우라 때문이었다. 이렇듯 씬을 일군 선구자들이 빈곤의 영향으로부터 한 발 떨어져서 만들어 낸 힙합 디제잉은 비트메이킹의 초석이 되어 힙합 음악을 낳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지금까지 언급한 건 어디까지나 디제잉의 예이고, 프로덕션 측면은 다르다고 할지도 모를 혹자들을 위해 좀 더 덧붙이자면, 디제잉 이후의 비트메이킹으로 가면, 오히려 가난은 더더욱 멀어진다. 이미 유명한 최초의 히트 랩 레코드 "Rapper's Delight"을 비롯하여 초창기 랩/힙합 음악들은 전부 어느 정도 제작 환경이 뒷받침된 상황에서 레이블을 통해 나온 것이니 말이다. "Rapper's Delight"만 해도 제작자인 실비아 로빈슨(Sylvia Robinson)이 팻백 밴드(Fatback Band)"King Tim III (Personality Jock)"과 클럽에서 보고 들은 디제잉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걸 계기로 창조되고 완성된 음악이다. 빈민가의 흑인들이 '큰 돈 없이도 드럼 머신 하나만 있으면 음악을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게 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힙합 음악이 세상에 얼굴을 내밀고 난 후, 그러니까 힙합이 대중의 가시권에 진입하고 프로덕션의 특성이 알려지고 난 뒤부터다.    

     

    사실 그동안 '힙합의 시작!'하면 '가난', '빈곤' 등의 키워드가 조건반사처럼 튀어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국내에 유입된 많은 정보 속에서 별다른 설명 없이 이를 무책임하게 연관 지은 경우를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월드와이드웹(WWW)' 기반의 인터넷 서비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 워낙 제한적인 정보만 취할 수 있었던 때에나 나오던 얘기들이다. 그렇기에 아직도 이런 그릇된 정보가 기정사실로 여겨지며, 힘을 얻고 있다는 건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많이 늦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힙합을 가난으로부터 좀 놓아주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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