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드머 토픽] 그야말로 2020년 '올해의 힙합 레이블', 그리젤다 레코즈(Griselda Records)
- rhythmer | 2020-10-16 | 11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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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황두하
2020년이 100일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 올해를 돌아보자면, 코로나 유행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이의 생명을 앗아간 이 끔찍한 팬데믹은 세계 경제에도 큰 타격을 입혔다. 특히, 많은 사람이 모일 수밖에 없는 공연 문화계는 필연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영화는 개봉 연기가 되거나 VOD 서비스로 직행했고, 각종 페스티벌을 포함한 공연은 줄줄이 취소되었다.힙합 씬도 예외는 아니다. 굵직한 행사들이 취소되다 보니 예년만큼 활기를 띠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음악 산업이 아예 멈춘 것은 아니었다. 모두가 우울한 이 시기에 아티스트들은 끊임없이 작품 활동을 이어나가며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새로운 앨범을 만들었다는 에프케이에이 트윅스(FKA Twigs)처럼 어떤 아티스트는 자가 격리 기간을 활용해 평소보다 더 많은 창작 활동을 이어나가기도 했다.
이처럼 작년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진 2020년, 힙합 씬에서 그 누구보다 눈에 띄는 활동을 보여주는 집단이 있다. 바로 뉴욕 버팔로(Buffalo)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 중인 레이블 그리젤다 레코즈(Griselda Records)다. 레이블은 올해 벌써 믹스테입 3장, 정규 앨범 4장, EP 3장까지, 총 10장의 앨범을 발표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는 중이다. 게다가 발표하는 앨범마다 평단과 대중의 환호를 받으며 거침 없는 기세를 보여준다. 발표 예정인 원년 멤버 베니 더 부처(Benny the Butcher)의 두 번째 정규앨범 [Burden of Proof]와 새로운 멤버 와이엔 빌리(YN Billy)의 앨범까지, 이들의 행보를 보면, 2020년을 그리젤다의 해로 만들 작정인 것 같다.
그리젤다 레코즈는 래퍼 웨스트사이드 건(Westside Gunn)이 2014년 설립한 레이블이다. 그는 이복형제이자 홀 앤 내쉬(Hall N Nash)라는 이름으로 듀오 활동을 한 적이 있는 래퍼 콘웨이 더 머신(Conway the Machine)과 형제의 사촌인 베니 더 부처, 그리고 프로듀서 대린저(Daringer)를 초창기 멤버로 영입하며 레이블의 기틀을 세웠다.웨스트사이드 건은 공식적으로 2005년부터 믹스테입을 발표하며 데뷔했지만, 그리젤다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는 레이블 설립 직후 발표한 믹스테입 [Hitler Wears Hermes II]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6년 동안 믹스테입 9장, 콜라보레이션 앨범 6장, EP 6장, 정규 앨범 4장을 발표했다. 그야말로 엄청난 창작욕이다. 레이블 동료들도 이에 못지않은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고, 몇 년 만에 탄탄한 디스코그라피와 품질 관리 능력을 갖춘 레이블로 성장했다.
레이블의 주축인 웨스트사이드 건, 콘웨이 더 머신, 베니 더 부처의 음악은 붐뱁(Boom Bap), 마피아 랩(Mafioso Rap), 코카인 랩(Coke Rap) 등의 키워드로 정의할 수 있다. 이들의 붐뱁 사운드는 전통적이면서도 세련된 방식으로 재가공한 샘플링 소스와 가볍고 건조한 드럼 라인으로 1990년대 힙합과는 차별화된 색깔을 만들어냈다. 여기에 생동감 넘치는 묘사와 치밀하게 설계한 스토리텔링으로 만들어낸 하드코어 랩 판타지가 이들의 주무기다.
악명 높은 콜롬비아 마약상 그리젤다 블랑코(Griselda Blanco)의 이름을 따온 레이블 명부터 이들의 지향점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여기에 하이톤으로 날카롭게 찔러대는 웨스트사이드 건, 허스키한 톤이 매력적인 콘웨이, 가장 깔끔하고 그루비한 랩을 뱉는 베니, 세 사람의 개성 강한 랩이 화룡점정을 찍는다. 2019년 11월 발표한 컴필레이션 앨범 [WWCD]는 레이블의 색깔을 가장 잘 보여준 뛰어난 완성도의 작품이었다.
그중에서도 레이블의 수장인 웨스트사이드 건의 음악은 독특하다. 한 마디로 ‘하이엔드 코카인 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음악뿐만 아니라 패션에도 지대한 관심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젤다가 레코드 레이블 겸 패션 브랜드라는 것만 봐도 그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패션에 대한 애정은 음악에도 녹아있다. 믹스테입 시리즈 [Hitler Wears Hermes]이나 그의 애칭인 ‘플라이갓(Flygod)’ 등은 언제나 화려한 명품 옷을 걸친 그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것들이다.올해 4월 발표한 세 번째 정규 앨범 [Pray For Paris]도 마찬가지다. 루이비통(Louis Vuitton)의 수석 디자이너인 버질 아볼로(Virgil Abloh)가 맡은 커버 아트워크는 중세 시대 스페인 화가 카라바조(Caravaggio)의 명화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또한, 웨스트사이드 건은 버질 아볼로의 오프 화이트(Off-White) 파리 패션쇼에 참석한 것에 영감을 받아 앨범을 만들었다. 런웨이 위에서 이루어지는 마약 거래 현장을 그린 듯한 “327” 같은 곡은 이러한 앨범의 색깔을 대표한다.
그리젤다가 처음 메이저 레이블과 교류를 시작한 것은 2017년이다.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던 이들은 그해 에미넴(Eminem)이 이끄는 쉐이디 레코즈(Shady Records)의 눈에 들게 된다. 특히, 웨스트사이드 건과 콘웨이를 눈여겨본 이들은 두 형제와 인터스코프(Interscope)를 통해 앨범을 유통할 수 있는 계약을 맺은 것이다(*필자 주: 쉐이디 레코즈는 인터스코프와 자회사 개념으로 맺어져 있다.).
이는 그리젤다 레코즈의 첫 메이저 계약이었지만, 마지막은 아니었다. 2019년 1월, 베니 더 부처는 커리어 사상 가장 큰 주목을 받은 EP [The Plugs I Met]을 발표했다.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부족했던 베니는 이 앨범을 계기로 이름을 크게 알리게 되었고, 같은 해 4월, 웨스트사이드 건과 함께 락 네이션(Roc Nation)과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었다. 레이블 설립 이후 꾸준하게 앨범을 발표하며 커리어를 쌓아온 것이 드디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2020년, 그리젤다는 더 큰 도약을 위한 계획을 착실히 이행하고 있다. 이전까지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을 맺고 여러 아티스트와 교류하는 등 외부적인 영향력을 넓혀왔다면, 올해는 레이블의 몸집 자체를 키우기 위해 새로운 멤버를 영입했다.첫 번째로 영입한 멤버는 볼디 제임스(Boldy James)다. 디트로이트 출신의 볼디는 프로듀서 알케미스트(The Alchemist)와 함께한 첫 정규 앨범 [My 1st Chemistry Set](2013)을 발표하며 데뷔했다. 이듬해 나스(Nas)의 매스 어필 레코즈(Mass Appeal Records)와 계약하며 주목받았지만, 레이블로부터 적절한 지원을 받지는 못했다. 여러 장의 믹스테입과 피처링 활동으로 간간히 이름을 보이던 그는 레이블 계약 해지 후, 올해 2월 다시 알케미스트와 합을 맞춘 두 번째 정규앨범 [The Prince of Tea in China]를 발표했다. 전보다 훨씬 탄탄해진 사운드와 느리지만, 그루비한 랩으로 자신의 색깔을 확실히 보여주며 장르 팬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그리젤다는 기존의 음악적 색깔과 비슷한 결을 보여주는 그를 맞아들였다. 설립 이후 6년 만에 첫 번째로 계약한 멤버였다.
두 번째로 계약한 멤버는 여성 래퍼 아르마니 시저(Armani Caesar)다. 그는 2011년부터 활동하며 니키 미나즈(Nicki Minaj), 카디 비(Cardi B) 같은 '배드 비치(Bad Bitch)' 컨셉트를 내세웠지만, 트랩 음악이 아닌 붐뱁 사운드와 코카인 랩 세계관을 더하며 독특한 캐릭터를 완성했다. 여기에 웨스트사이드 건처럼 패션에 대한 관심을 음악에 녹여냈다. 지난 9월 그리젤다를 통해 발표한 정규 앨범 [The Liz]는 이러한 방향성을 아주 잘 보여준다.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Elizabeth Taylor)와 레슬링 매니저 미스 엘리자베스(Miss Elizabeth)의 이미지를 섞은 캐릭터 ‘리즈(Liz)’는 마약상의 퀸핀(Queenpin) 같은 존재다. 랩 실력 자체는 다른 멤버들보다 무난한 편이지만, 독특한 캐릭터 설정으로 그리젤다의 세계를 한 뼘 넓혀주었다.최근에는 애틀랜타 출신의 19살 래퍼 와이엔 빌리를 영입하기도 했다. 애틀랜타 스타일의 전형적인 트랩 음악에 투신하는 이 젊은 피는 곧 첫 정규작을 발표할 예정이다. 붐뱁 사운드의 이미지가 강한 그리젤다에서 빌리가 보여줄 음악 세계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기존 멤버들도 올해 커리어 사상 가장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고 있다. 웨스트사이드 건은 앞서 언급한 [Pray For Paris]와 근래 발표한 첫 메이저 스튜디오 앨범 [Who Made The Sunshine]을 통해 '올해의 앨범급' 완성도를 보여주며 존재감을 아로새겼다. 콘웨이 역시 9월 두 번째 정규 앨범 [From King To A God]으로 본인만의 마피아 랩을 선보였다. 두 형제의 앨범은 모두 2020년 힙합 씬을 돌아볼 때 꼭 언급해야만 하는 작품들이다.6월 자신의 크루 블랙 소프라노 패밀리(Black Soprano Family)의 컴필레이션 EP [Da Respected Sopranos]를 발표한 베니는 최근 나스(Nas)의 앨범을 총괄한 바 있는 히트보이(Hit-Boy)와 의기투합한 두 번째 정규 앨범 [Burden Of Proof]를 발표할 예정이다. 작년 [The Plugs I Met] EP를 통해 높아진 기대치를 충족시켜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그리젤다 레코즈의 현재를 ‘성공’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는 조금 이른 감이 있다. 이들은 이제야 조금씩 규모를 키우며 기존 멤버뿐만 아니라 여러 아티스트를 지원할 수 있는 ‘레코드 레이블’로서의 모양새를 갖춰가는 중이다. 수장인 웨스트사이드 건도 올해 데뷔 약 15년 만에 처음으로 메이저 스튜디오 앨범을 공개하며 커리어의 전환점을 맞이했다.그리젤다가 미국 전역을 강타한 히트곡을 내놓거나 바이럴(Viral)이 될 만한 활동을 한 것은 아니다. 이들이 지금의 전성기를 맞게 된 것은 2014년부터 끈기 있고 성실하게 작품을 내놓으며 양과 질을 모두 충족시키는 레이블로서 이미지를 착실히 쌓아온 덕분이다. 좋은 작품을 꾸준히 내놓는다면 언젠가는 사람들이 알아본다는 것을 그리젤다의 존재가 여실히 증명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행보는 2020년을 의심할 여지 없는 그리젤다의 해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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