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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드머 토픽] 인디 힙합계의 혁명, ‘네오 붐뱁’이라 불리는 음악에 관하여
    rhythmer | 2022-11-29 | 28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 강일권

     

    누군가 비트에서 드럼을 거세하기로 했을 때 붐뱁(Boom-bap)으로 대표되어온 뉴욕 힙합은 새 국면에 접어들었다. 텁텁한 고유의 사운드는 고수하되 샘플 플레이를 극단적으로 부각하는 방식. 설령 드럼이 사용되더라도 매우 소극적이며, 기존처럼 킥과 스네어의 뚜렷한 반복으로 리듬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루프(Loop) 소스의 일부로 작용한다. 2000년대만 해도 미친 짓이란 소릴 들었을 법한 시도는 힙합 프로덕션의 패러다임을 흔들었고, 평단과 젊은 마니아를 열광케 했다.

     

    아마도 많은 이가 그리젤다(Griselda Records) 진영의 음악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앞선 시도가 있었다. 몇몇 샘플링의 귀재들이 드럼을 배제한 채 샘플, 혹은 연주를 전면에 내세운 프로덕션을 간간이 선보였다. 일례로 매드립(Madlib)[Beat Konducta] 시리즈에서 이 같은 스타일의 원형이 되는 곡을 찾을 수 있다. ‘Vol 1-2: Movie Scene’“Left on Silverlake (Ride)”, ‘Vol 3-4: Beat Konducta in India’“The Rumble”, “Piano Garden” 등이 대표적이다.





    우탱 클랜(Wu-Tang Clan)의 수장 르자(RZA)가 프로듀싱한 곡에서도 흔적이 선명하다. [Kill Bill Vol. 1 Original Soundtrack]"Ode To Oren Ishii”[Afro Samurai: The Soundtrack]의 몇몇 수록곡이 좋은 예다. 특히 그보다 앞서 1995년에 만들어진 고스트페이스 킬라(Ghostface Killah)"All That I Got Is You"는 흥미롭다. 잭슨 파이브(The Jackson 5)“Maybe Tomorrow”(1971)에서 초반 현악 파트를 샘플링하여 따로 드럼을 삽입하지 않고 오로지 루프만으로 이끌어갔다.

     

    다만 이들의 음악은 대부분 랩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매드립은 일종의 비트 실험이었고, 르자는 블랙스플로테이션(blacksplotation/*: 1970년대를 기점으로 생겨난 흑인 영웅이 등장하는 흑인 관객들을 위한 영화의 총칭) 스코어의 힙합세대식 리바이벌에 가까웠다. 또한 "All That I Got Is You"는 작법에서의 접근 방식이 가장 비슷하지만, 연출 의도와 무드 면에서 거리가 있었다.

     

    이상의 작법과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샘플 병치, 그리고 필름 누아르 무드가 결합하여 탄생한 지금의 새로운 뉴욕 힙합 사운드는 2010년대에 구축되었다. 그 시작을 카(Ka)와 락 마르시아노(Roc Marciano)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함께 작업도 한 바 있는 둘은 공통점이 많다. 뉴욕 출신에 래퍼이자 프로듀서이며, 각각 그룹의 멤버로 데뷔했다. 카는 내츄럴 엘리먼츠(Natural Elements), 락 마르시아노는 플립모드 스쿼드(Flipmode Squad)의 일원이었다. 더불어 비범한 작사력을 갖춘 리리시스트(Lyricist)이며, 걸출한 앨범으로 커리어를 쌓았다

    카는 두 번째 정규작 [Grief Pedigree](2012)“Cold Facts”, “Every...”, “Vessel” 같은 곡을 통해 샘플 플레이 위주의 프로덕션을 처음 선보였다. 그리고 이듬해 발표한 세 번째 앨범 [The Night's Gambit]에서 중심부로 가져와 확장했다. 락 마르시아노 역시 2012년 말경에 내놓은 두 번째 정규작 [Reloaded]부터 샘플과 베이스 라인만으로 주도하는 비트를 시도했다. 사이키델릭하며 범죄영화 스코어의 향 가득한 두 걸작은 이 계열 음악의 초석을 다졌다.

     

    특히 락 마르시아노의 존재감이 남다르다. 촘촘히 짠 라임과 재치 넘치는 워드플레이, 극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상세한 스토리텔링과 낮고 차갑게 뱉어대며 청자를 조이는 래핑까지, 독보적인 범죄 랩을 들려주는 그는 예나 지금이나 누아르 힙합 스타일의 선봉장이다(*: ‘누아르 힙합이란 용어는 정식 장르명이 아니다. 음악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쓴 표현임을 밝힌다.). 올해(2022)에도 명장 알케미스트(The Alchemist)와 함께 또 하나의 걸출한 앨범 [The Elephant Man's Bones]를 만들었다.





    카와 락 마르시아노가 본인들의 실험을 감행해가던 시기, 스타일의 원형을 제공한 매드립은 프레디 깁스(Freddie Gibbs)와 함께 만든 앨범 [Piñata](2014)를 통해 래퍼를 위한 곡에서도 샘플 플레이 중심의 비트를 선보인다. “Deeper”가 대표적이다. 더 레전드(The Ledgends) “A Fool for You”(1970)에서 우아한 현악 연주를 샘플링하여 주조한 비트는 매드립이 2011년에 인스트루멘탈로 공개했던 “Love/Hate”를 늘려서 완성한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알케미스트 역시 카, 락 마르시아노와 같은 시기에 비슷한 시도를 했다. 2012년에 발표한 앨범 [Russian Roulette]에 그러한 음악이 즐비하다. 2007년 맙 딥(Mobb Deep)의 고 프로디지(Prodigy)와 만든 [Return of the Mac]에서 특유의 꺼끌꺼끌하고 사이키델릭한 범죄 랩 프로덕션을 선보인 그는 작금의 누아르 힙합 사운드에 영감을 준 인물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이제 그리젤다 크루가 등장한다. 카와 락 마르시아노가 뉴욕 누아르 힙합 시대의 문을 열어젖혔다면, 그리젤다는 전성기를 열었다. 버팔로 출신의 웨스트사이드 건(Westside Gunn)을 필두로 베니 더 부쳐(Benny the Butcher), 콘웨이 더 머신(Conway the Machine/*현재는 탈퇴), 매치호미(Mach-Hommy), 아르마니 시저(Armani Caesar), 볼디 제임스(Boldy James) 등이 뭉친 그들은 2016년을 기점으로 양질의 앨범을 발표하며 무서운 속도로 사람들의 맘을 훔쳤다.



     

    출발은 웨스트사이드 건이었다. 그가 2016년에 발표한 정규 데뷔작 [Flygod]은 둔탁한 드럼과 로우(Raw)한 질감에 중점을 둔 전통적인 붐뱁과 리듬 파트를 가라앉히고 샘플 프레이즈를 부각한 누아르 힙합으로 양분되었다. 앨범엔 락 마르시아노도 참여했다. 그리고 후자 스타일은 웨스트사이드 건과 그리젤다 진영이 추구하는 음악의 중심부로 진입한다. 이후 싱글과 앨범이 폭격처럼 쏟아졌고, 그들의 새로운 힙합 사운드는 인디 힙합 씬 전반으로 퍼졌다.

     

    그리젤다의 음악은 카와 락 마르시아노로부터 시작된 흐름을 이어받는 동시에 독자적이었다. 일례로 웨스트사이드 건은 버질 아블로(Virgil Abloh/*: 루이 비통을 이끈 최초의 아프리카계 인물이며, 가장 영향력 있는 패션 디자이너 중 한 명)의 오프화이트(Off-White) 파리 패션쇼에 참석한 후 영감을 얻어 만든 [Pray for Paris](2020)에서 험악한 마약 거래의 현장을 런웨이 위로 옮겨온 듯한 음악으로 신선한 충격을 줬다.

     

    베니 더 부처가 각각 2019년과 2021년에 발표한 앨범 [The Plugs I Met 1][The Plugs I Met 2]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내가 만난 마약상이란 독특한 컨셉 아래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갱스터 걸작 [스카페이스, Scarface]를 레퍼런스 삼아 몰입도 높은 코크 랩(Coke Rap)을 들려줬다. 콘웨이 더 머신 역시 [From King to a God], [La Maquina] 등의 앨범을 통해 수준 높은 범죄 랩을 들려주며 그리젤다의 강해진 입지를 공고히 하는 데 공헌했다.





    이 같은 그리젤다의 성공은 많은 추종자를 낳았다. 미 동부 힙합의 신예들은 앞다투어 그리젤다 스타일(Griselda Style)’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메인스트림에 트랩(Trap)과 드릴(Drill)이 있다면, 언더그라운드에는 그리젤다 스타일이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2020년에만 무려 30여장이 넘는 앨범이 발매됐을 정도니까.

     

    락 마르시아노가 총프로듀싱을 맡은 스토브 갓 쿡스(Stove God Cooks)[Reasonable Drought], 브롱크스(Bronx) 출신 더 무솔리니(The Musalini)[Return Of The Oro], 캐나다 힙합계의 유망주 다니엘 선(Daniel Son)[Dirty Dishes], 시카고 래퍼 빅 스펜서(Vic Spencer)와 버벌 켄트(Verbal Kent), 그리고 영국의 누아르 힙합 개척자 소니짐(Sonnyjim/프로듀서)이 뭉친 그룹 아이언 위그스(Iron Wigs)[Your Birthday's Cancelled], 델라웨어주에 기반을 둔 래퍼 올 헤일 와이티(All Hail Y.T.)와 잉글우드의 기대주 제너럴블랙페인(GeneralBackPain)과의 합작 [Classic Villains], 그룹 트래직 앨라이즈(Tragic Allies)의 에스티 낵(Estee Nack)과 독일 프로듀서 슈페리어(Superior)의 합작 [BALADAS], 알케미스트가 각각 볼디 제임스, 프레디 깁스와 만든 [The Price of Tea in China], [Alfredo] 등은 락 마르시아노와 그리젤다를 제외하고 반드시 들어봐야 할 작품이다.

     

    자 이쯤에서 눈치 빠른 독자라면 네오 붐뱁(Neo Boom-bap)’이란 용어가 한 번도 거론되지 않아 의아할 것이다. 제목으로 썼음에도 말이다. 지금까지 기술한 특징을 갖춘 음악은 한국을 포함한 일부 힙합 마니아 사이에서 새로운 붐뱁, 이른바 네오 붐뱁이라 불린다. 그러나 이것이 통용되는 서브 장르명은 아니다. 추측하건대 앞으로도 정식으로 굳어지긴 어려울 것이다. ‘네오 소울(Neo Soul)과는 달리 음악적 특징과 장르명이 서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애초에 붐뱁이란 장르명은 드럼의 킥과 스네어가 일정하게 반복되며 강하게 때려대는 비트를 묘사한 것이었다. 그래서 드럼을 완전히 배제하거나 아주 희미하게 배치하는 그리젤다식프로덕션에 붐뱁이란 표현을 붙이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실제로 국외의 미디어와 평단은 물론, 힙합계에서도 대부분 네오 붐뱁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소수의 리스너와 커뮤니티 및 블로그 등에서만 쓰일 뿐이다.

     

    만약 붐뱁 리듬을 가져가되 기존과 다른 작법, 혹은 구성으로 완성된 음악이 나오고 하나의 조류를 형성한다면, 그때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네오 붐뱁이 탄생하게 될 것이다. 지금의 그리젤다식 힙합 음악은 오히려 안티 붐뱁에 가깝다.

     

    일부 매체가 지적하듯이 불과 몇 년 사이 이 같은 스타일의 힙합이 과포화 상태에 이른 건 사실이다. 그러나 불꽃이 쉽게 사그라지진 않을 듯하다. 기반이 되는 샘플 소스는 무궁무진하고 세상엔 샘플링과 프레이즈 창조에 능통한 이들이 꽤 있으니까. 무엇보다 락 마르시아노가 쏘아올리고 그리젤다가 터트린 이 혁신적인 힙합 사운드의 폭죽이 힙합의 고향 뉴욕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이 참으로 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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