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드머 토픽] 2022 국외 랩/힙합 앨범 베스트 20
- rhythmer | 2022-12-29 | 23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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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드머 필진이 선정한 '2022 국외 랩/힙합 앨범 베스트 20’을 공개합니다. 아무쪼록 저희의 리스트가 한해를 정리하는 좋은 가이드가 되길 바랍니다.※2021년 12월 1일부터 2022년 11월 30일까지 발매된 앨범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20. Quavo & Takeoff - Only Built For Infinity Links
Released: 2022-10-7
[Only Built For Infinity Links]는 ‘셋보다 나은 둘’이 무엇인지 보여주고자 하는 퀘이보(Quavo)와 테이크오프(Takeoff)의 야심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두 사람은 [Culture] 이후로 가장 타이트한 랩과 현란한 애드리브로 18곡, 59분의 러닝타임을 가득 채운다. 묵직한 톤으로 중심을 잡아주는 테이크오프와 가벼운 톤의 중독적인 랩싱잉으로 귀를 사로잡는 퀘이보가 적절하게 밸런스를 맞춘다.
오히려 오프셋(Offset)의 부재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것 같다. 특히 “To The Bone” 같은 곡에서는 ‘테이크오프의 재발견’이라고 할 정도로 퍼포먼스가 탁월하다. 프로덕션도 인상적이다. 주특기인 트랩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독특하게 악기를 운용하여 다양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중에서도 간간이 울리는 일렉트로닉 기타 스트로크로 서부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느낌을 내는 “HOTEL LOBBY (Unc & Phew)”, 전주의 현악기와 피아노 연주가 비장한 무드를 조성하는 “Look@this”, 위협적인 신시사이저로 2000년대 트랩 음악의 기운을 풍기는 “Big Stunna” 등은 탁월한 완성도를 보여준다.
미고스(Migos)는 2010년대를 풍미한 트랩 뮤직의 기틀을 닦은 대표적인 집단이다. “Bad and Boojee”의 성공과 ‘댑(Dap)’ 댄스 신드롬 등, 그들이 씬에 남긴 굵직한 족적은 무수히 많다. 비록, 오프셋이 빠졌지만, [Only Built For Infinity Links]는 이들이 왜 트랩 뮤직의 아이콘인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더 이상 세 사람의 목소리를 함께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19. Curren$y & The Alchemist - Continuance
Released: 2022-02-18
알케미스트(The Alchemist)는 아티스트와 참여한 앨범에 맞는 비트를 주조하는 데 탁월하다. 이번 작품에선 고전 소울을 다수 샘플링하여 비장하며, 엄숙하고, 서늘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동시에 샘플링 유무에 따라 프로덕션에 명확한 차이와 일관성이 느껴져 인상적이다. 알케미스트의 프로덕션은 커런씨(Curren$y)의 랩과도 잘 어우러진다. 공격적인 사운드가 배제된 덕분인지 격앙과는 거리가 먼 듯 차분하면서도 여유로운 톤과 플로우가 강조된다.
에코 사운드와 거친 질감의 사운드가 다수 사용되어 목소리에 입체감을 느낄 수 있는 점도 근사하다. 우아하고도 진득한 프로덕션 덕에 훨씬 흥겹게 들리며, 퍼포먼스에서 시너지를 발휘한다. 커런씨는 내용을 무너뜨리지 않고 마디마다 유려하게 쏟아내는 라임 구성과 워드플레이를 선보이는 것에 능하다. 가사는 실제 특정한 순간을 구체적이면서 생동감 있는 묘사로 이미지를 강하게 전달한다. 이와 같은 특유의 강점 덕분에 익숙한 소재도 새롭고 쉽게 다가온다.
다작을 하는 행위 자체가 앨범의 완성도를 평가하는 척도가 되진 못한다. 그럼에도 [Continuance]를 듣고 나면 몹시 궁금해진다. 수많은 음악을 쏟아내면서도 큰 기복 없이 완성도 있는 결과물을 공개할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두 사람의 행보에 매번 관심을 쏟아야 할 이유가 이번 앨범으로도 다시 한번 증명됐다.
18. CEO Trayle - HH5
Released: 2022-10-31
씨이오 트레일(CEO Trayle)은 야심이 큰 래퍼다. 트랩과 드릴에 기반을 두고 출발했지만, 알앤비, 펑크, 록 등 여러 장르와의 결합을 통해 차별되는 영역을 구축하고자 한다. 프로덕션을 꾸리는 감각과 래퍼로서 장착한 무기를 고려해보건대 이는 결코 허황된 꿈이 아니다. 그의 비정규 시리즈 ‘해피 할로윈(Happy Halloween)’의 다섯 번째 편인 [HH5]는 카피캣과 매너리즘에 함몰된 트랩, 드릴 음악이 과포화 상태에 이른 지금의 씬에 경종을 울릴만한 앨범이다.
[HH5]엔 어쭙잖게 트렌드에 부합하기 위한 싱잉랩도, 동어반복의 함정을 알면서도 능력부족 탓에 묻어가는 뻔한 갱스터 가사도 없다. 트레일은 마약중독, 파란만장한 개인사, 짓궂은 농담, 자아와의 싸움, 상처로 점철된 연애사 등등, 연관성 없는 여러 주제를 자유분방하게 오가며 매캐한 향과 공허가 느껴지는 래핑으로 담아냈다. 그가 구사하는 라임은 대체로 직설적이지만, 매우 교활하며, 묵직한 주제의 곡에선 그에 걸맞는 영리함이 돋보인다.
산발적인 주제의 앨범을 끈끈하게 묶는 건 프로덕션이다. 하드한 트랩이나 드릴의 공격성을 드러내기보다 가라앉은 상태로 앨범의 음습한 무드를 이끄는 드럼과 베이스, 이를 토대로 90년대 호러코어 힙합을 떠올리게 하는 신스 및 피아노, 일렉트릭 기타 리프가 탁월하게 운용되어 멜로딕한 순간이 연출된다. 곡당 러닝타임이 짧은 편이라 해도 무려 18곡이 한결 같은 무드로 흐른다. 그럼에도 몰입도가 상당하는 점에서 [HH5]의 진가가 드러난다. 강력하게 꽂히는 곡은 없지만, 곡 대부분이 좋은 덕이다. 씨이오 트레일은 확실히 2020년대 힙합의 미래다.
17. Saba - Few Good Things
Released: 2022-02-04
사바(Saba)는 재능 있는 아티스트이자 뛰어난 스토리텔러다. 발표하는 앨범마다 선명한 주제의식을 담았고, 매력적인 음악으로 풀어냈다. [Few Good Things]에서 사바는 성공과 부, 공동체, 가족 등 몇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그가 겪은 경험과 시간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성공을 통해 쌓은 부를 과시하지만(“One Way or Every N***a With a Budget”), 동시에 경계하고 두려워한다(”Fearmonger”). 언젠가 맞이할 새로운 가족을 상상하며 아이를 기르는 책임감을 군인에 비유하고(“Soldier”), 과거를 회상하며 그리움에 빠지기도 한다(“2012”).
마지막 트랙, “Few Good Things”는 산발적으로 흩어진 앨범의 주제를 포괄하는 멋진 마무리다. 프로덕션의 키를 잡은 대대 피벗(daedaePIVOT)과 다우드(Daoud)는 보다 다채로운 음악을 선보인다. 알앤비, 재즈, 펑크(Funk), 보사노바 등 다양한 장르를 끌어안았다. 사바는 몇 년간 두 명의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 그에게 더없이 큰 사건이지만, 사바는 SNS에 이번 작품이 죽음과 그의 트라우마에 관한 앨범으로 인식되는 것을 경계한다고 밝혔다.
사바는 슬픔을 통해 빚어낸 지난 작품이 그의 모든 음악을 대변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새로운 음악에 다채로운 경험과 시선을 담아냈다. 그리고 결과는 성공적이다. [Few Good Things]는 사바의 지난 행보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다양한 재미와 감흥을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16. FLY ANAKIN - FRANK
Released: 2022-03-11
꽤 오랜 시간 활동한 플라이 아나킨(FLY ANAKIN)은 리치몬드 기반의 집단 뮤턴트 아카데미(Mutant Academy) 소속으로 적잖은 작업물을 통해 착실히 이름을 키워왔다. 특히 인기를 얻은 건 핑크 시푸(Pink Siifu)와의 합작이다. [FlySiifu's]를 작업하고 발매하는 동안 한 켠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던 아나킨의 앨범은 2022년에 이르러서야 베일을 벗게 되었다. [Frank]는 온전히 그의 이름으로 발표한 첫 솔로 정규작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틀어주던 알앤비/소울 음악을 기반으로 아나킨은 ‘90년대 힙합을 향한 존경과 애정을 현대적인 방식으로 풀어냈다.
그만큼 [FRANK]는 그가 듣고 자란 음악에 뿌리를 두지만, 결코 과거를 답습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드럼의 진동폭을 죽이고 샘플 사운드를 부각한, 이른바 ‘그리젤다(Griselda)’식 스타일을 전면에 내세웠다. 매드립(Madlib), 에비던스(Evidence), 라이크(Like) 같은 내로라하는 이들을 필두로 포이지(Foisey), 사이코 시드(Sycho Sid) 등 그가 속한 뮤턴트 아카데미의 인하우스 프로듀서들까지, 비트를 제공한 이들은 다양하다.
이렇듯 소울풀하게, 감미롭게, 때로는 무게감 있게 펼쳐 놓은 프로덕션을 채우는 건 플라이 아나킨의 몫이다. 숨 가쁘게 이어지는 하이톤의 랩은 쫀득하게 박자를 붙잡으며 유려하게 흐른다. 리치몬드의 베테랑 래퍼 니켈러스 에프(Nickelus F)와 랩을 주고밭는 "Ghost”, 매드립이 주조한 펑키한 리듬 위로 짧고 굵게 휘몰아치는 “No Dough” 등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진 트랙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아나킨은 [FRANK]를 통해 그가 물려받은 유산을 가장 근사한 방식으로 재창조했다.
15. Lupe Fiasco - Drill Music In Zion
Released: 2022-06-24
루페 피아스코(Lupe Fiasco)의 여덟 번째 정규 앨범 [Drill Music In Zion]에는 그가 랩 게임에서 느낀 문제의식과 피로감이 고스란히 담겼다. 그는 죽음이 하나의 문화가 되어버린 씬의 상황과 음악 시장에 산재한 부조리, 스스로 제기하는 문제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자신의 위치를 재지하고 서정적인 프로덕션 아래 차례로 풀어낸다. 제목은 물론, 의미를 여러 차례 곱씹게 만드는 다채로운 비유로 완성된 가사는 대단히 탁월하다.
"Kiosk"에서 루페는 보석 가게 한가운데 설치된 키오스크에 음악 산업을 투영하여 생각을 풀어낸다. “Mural” 3부작의 마지막 파트인 “Ms. Mural”에선 자신을 후원자와 대화하는 화가에 빗대어 예술과 자본, 윤리의 상관관계와 딜레마를 이야기한다. 마지막 트랙 "On Faux Nem"의 표현은 보다 직접적이다. 'Rappers die too much, That's it, that's the verse / 너무 많은 래퍼들이 죽어, 그거야, 그 구절이지'. 'What's the difference between a posthumous album And a life insurance policy? / 사후 앨범과 생명보험 사이엔 어떤 차이가 있지?' 같은 라인을 통해 폭력과 범죄에 노출된 래퍼들의 상황과 그조차 마케팅의 일환으로 사용되는 관행을 비판한다.
[Drill Music In Zion]에선 귀를 잡아끄는 강렬한 프로덕션이나 기교가 섞인 화려한 퍼포먼스는 찾기 어렵다. 다만, 루페는 일체감 있는 분위기 아래 가장 잘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냈고, 또 한 번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14. Vince Staples - Ramona Park Broke My Heart
Released: 2022-04-08
빈스 스테이플스(Vince Staples)가 2021년에 발표한 셀프 타이틀 앨범은 커리어를 통틀어 가장 자전적인 작품이었다. 그로부터 1년도 채 되지 않아서 발표한 다섯 번째 정규 앨범 [Ramona Park Broke My Heart]는 여러 가지 면에서 [Vince Staples]의 업그레이드 버전처럼 느껴진다. 전반적으로 착 가라앉은 톤을 유지하면서도 분위기의 고저가 있어 지루하지 않게 흘러간다.
더불어 웨스트 코스트 힙합의 바이브가 진하게 느껴진다. 웨스트 코스트 레전드 디제이 퀵(DJ Quik)의 “Dollaz + Sense”를 인용한 “DJ Quik”은 대표적. 웨스트 코스트 힙합의 과거와 현재, 빈스의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며 묘한 감흥을 자아낸다. 빈스의 어린 시절 주된 무대가 되었던 라모나 파크(Ramona Park)와 갱 문화 속에서 자라면서 얻게 된 삶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는 [Ramona Park Broke My Heart]의 골자다.
과거, 그리고 그에 영향받은 현재를 돌아보는 자전적인 스토리와 상대적으로 가라앉은 무드의 프로덕션은 비슷하지만, 구성적, 사운드적 장치를 통해 듣는 재미를 더했다. 무엇보다 빈스의 시그니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냉소적인 시선을 유지하며 보다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그야말로 고향과 과거에 대한 빈스의 개성이 가득 담긴 러브 레터다.
13. Westside Gunn - 10
Released: 2022-10-28
'Hitler Wears Hermes’는 웨스트사이드 건(Westside Gunn)의 ‘비싼 명품 브랜드를 두르고 뉴욕 버팔로(Buffalo)의 거친 후드를 누비는 마약상’ 이미지를 대표하는 믹스테이프 시리즈다. [10]은 ‘Hitler Wears Hermes’의 열 번째 시리즈다. 그만큼 그의 취향을 한데 모아 꽉 눌러 담았다. 시리즈를 통틀어 음악적으로도 가장 다채롭다. 흥미로운 건, “Science Class”, “God Is Love”, “Switches On Everything”처럼 주인공의 분량이 현저히 적은 곡들도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주객전도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웨스트사이드의 음악적 영역이 워낙 견고한 덕분이다. 그래서 그가 만들어놓은 세계에 새로운 인물들을 초대한 느낌이다. 스위즈 비츠(Swizz Beatz)가 웨스트사이드 건 스타일로 마고 구리안(Margo Guryan)의 “The 8:17 Northbound Success Merry-Go-Round”를 샘플링한 비트 위에서 버스타 라임즈, 래퀀, 고스트페이스 킬라가 돌아가며 랩을 뱉는 “Science Class”는 대표적인 예다. 웨스트사이드 건의 음악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10] 역시 낯설지 않을 것이다.
느릿하게 뱉어내는 하이톤의 랩은 여전히 훌륭하고, 여러 프로듀서가 제공한 비트도 최상급이다. 그래서 전, 현 그리젤다 멤버가 무려 10분 동안 랩을 죽 이어가는 마지막 곡 “Red Death”도 짧게 느껴진다. 웨스트사이드 건이 데뷔한 지도 벌써 17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전성기를 새롭게 갱신하고 있다.
12. $ilkMoney - I Don’t Give a Fuck About This Rap Shit, Imma Just Drop Until I Don’t Feel Like It Anymore
Released: 2022-11-15
실크머니($ilkMoney)의 [I Don’t Give a Fuck About Rap Shit, Imma Just Drop Until I Don’t Feel Like It Anymore]은 정신없는 앨범 커버처럼 음악 역시 정제되어 있지 않고 날 것처럼 느껴진다. 부, 섹스, 마약과 같은 내용은 물론이고 여러 이슈와 사회, 정치적인 소재를 상당수 끌어왔다. 풀어내는 방식에선 공격적이고 종종 파격적일 만큼 날 것의 표현이 넘치면서도, "Emmm, Nigga You Is Tasty >:)"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은유적인 방식도 상당수 사용됐다.
실크머니의 래핑은 격앙된 톤에 음절마다 톡톡 쏘아대며 타이트하게 뱉는 스타일이다. 거친 내용과 맞닿아 랩에서 느낄 수 있는 감흥이 배가된다. 칼릴블루(Khalilblu)의 프로덕션 역시 완성도를 더한다. 어둡고 호러적인 분위기에 트랩, 붐뱁, 드럼 앤 베이스 등 다채로운 비트, 왜곡된 목소리를 사용한 더블링, 과잉에 가까운 샘플링과 다수의 소스 사용이 대표적이다.
앨범 전체에 일관되게 접근한 덕에 난잡한 개별 트랙 사이로 묘한 통일성이 부여되는 점도 흥미롭다. 아직 부족할 수 있는 인지도에도 실크 머니는 어느 하나 평범하지 않은 비범한 앨범으로 여느 래퍼 못지않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토록 난잡하고 자유분방하며 실험적인 동시에 전통적인 랩 음악의 감흥을 갖춘 작품도 드물다.
11. Joey Bada$$ - 2000
Released: 2022-07-22
[2000]은 조이 배드애스(Joey Bada$$)가 2012년에 발표했던 믹스테이프 [1999]의 후속작이다. 그에 걸맞게 전곡을 붐뱁 비트로 꽉 채웠다. 스테파니 밀스(Stephanie Mills)의 “Something In The Way (You Make Me Feel)”을 샘플링한 후렴구가 인상적인 “Make Me Feel”,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코러스와 느릿느릿한 드럼 라인이 어우러진 “Where I Belong”, 아련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혼 사운드 위로 웨스트사이드 건(Westside Gunn) 특유의 애드립이 흥을 돋우는 “Brand New 911”까지 이어지는 초반 구간은 앨범의 하이라이트다.
조이의 랩도 물이 올랐다. 라임을 촘촘하게 배치해 타이트하게 뱉어내다가도 어느새 여백을 두어 그루브를 느끼게 하는 솜씨가 경지에 올랐다. 특히 “Where I Belong”과 “Brand New 911”에서 발음을 씹으며 느릿하게 박자를 타는 래핑은 어느새 10년 차 베테랑이 된 조이의 랩이 일정 경지에 이르렀음을 느끼게 한다.
혈기 왕성했던 10대의 조이 배드애스는 30대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다. 어느덧 ‘성숙’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시기가 된 것이다. 그 증거가 바로 [2000]이다. [1999] 때의 패기와는 다른 완숙미가 느껴진다. 최초에 그를 주목하게 했던 스타일로 돌아와 한층 성장한 모습을 보여준 점도 고무적이다. 등장 때부터 조이에게 기대했던 정규 결과물을 10년이 지나서야 만나게 되었다.
10. Quelle Chris - Deathfame
Released: 2022-05-13
디트로이트 출신의 퀠리 크리스(Quelle Chris)는 2011년 데뷔 앨범 [Shotgun & Sleek Rifle]이후 꾸준히 앨범을 발표하며 멜로우 뮤직 그룹(Mello Music Group)의 대표 아티스트로 자리 잡았다. 그의 음악은 실험적인 얼터너티브 힙합 프로덕션과 블랙 코미디에 가까운 가사의 결합이 특징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크게 주목받고 있다.
[Deathfame]은 인트로에서 해맑은 아이들의 삶을 언급하고, 이어지는 "Alive Ain't Always Living"에서 ‘살아있다는 게 꼭 사는 건 아니야, 어쩔 땐 단지 생존할 뿐이야 / Alive ain't always living, sometimes ni**as just survive’라며 따스한 기운으로 노래하는 장면부터 심상치 않다. 퀠리 크리스의 음악은 때론 섬뜩하게 때론 코믹하게 미국 내 흑인의 현실을 마주하게 한다.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코드인 '죽음'은 블랙 커뮤니티의 거대한 트라우마와 맞닿아 있고, 크리스는 이를 감질나게 만지작거리듯 냉소적인 톤으로 에두른다.
하지만 앨범 전체를 감상하고 나면 메시지는 명확해진다. 프로덕션도 훌륭하다. 힙합과 재즈를 중심으로 다양한 장르 요소를 뭉갠 듯한 로파이(Lo-Fi) 사운드는 빈번한 변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그루브를 형성한다. [Deathfame]은 퀠리 크리스의 진가를 새삼 확인할 수 있는 앨범이다. 또한, 현재까지 그의 최고작이라 부를만하다.
9. Denzel Curry - Melt My Eyez See Your Future
Released: 2022-03-25
덴젤 커리(Denzel Curry)는 오랫동안 우울증 분노조절장애를 앓아왔다. 어린 시절부터 들어온 여러 장르를 힙합에 버무리는 작업과 심적 상태 이외의 또 다른 주제의 랩을 할 여유가 없었다. 커리의 다섯 번째 정규작 [Melt My Eyez See Your Future]는 다행히 그가 고통으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되어 완성한 앨범이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모든 것을 담아냈다. 앨범엔 전통적인 힙합, 트랩 뮤직, 드럼 앤 베이스, 재즈 등등, 커리가 좋아하고 영향받은 다양한 음악이 어우러졌다.
결과물은 장르의 멜팅팟보다 샐러드볼에 가깝다. 핵심은 퓨전으로 귀결되지만, 각 장르의 특성이 고스란히 살아있다. 모든 감흥의 중심에 있는 건 역시 커리의 랩이다. 어떤 스타일의 비트에서든 눈부신 랩으로 휘감아버린다. 옹골지고 타이트하며, 거침없다. 퍼포먼스뿐만 아니라 가사의 수준 또한 높다. 거칠고 하드코어한 단어가 펄떡거리는가 하면, 시적인 은유와 비유가 넘실거린다. 그는 두말할 필요 없는 리리시스트(Lyricist)다.
"Walkin'"의 뮤직비디오에서 황량한 마을과 사막을 횡단하는 연출은 실제 커리가 지나온 괴로움과 아픔의 여정을 빗대어 표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끝을 기약할 수 없기에 더욱 무서운 우울장애의 터널, [Melt My Eyez See Your Future]는 그 속에서 덴젤 커리가 벌인 투쟁의 산물이다. 때때로 아티스트의 고통은 이렇듯 마음을 사로잡는 작품을 탄생시킨다.
8. BROCKHAMPTON - TM
Released: 2022-11-18
[The Family]가 브록햄튼의 탈을 쓴 케빈의 솔로 앨범이라면, [TM]은 대부분의 멤버들이 참여한 단체 앨범이다. 앨범의 키를 쥔 것은 맷 챔피언(Matt Champion). 특유의 역동성과 허를 찌르는 반전, 그리고 어느샌가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서정성이 뒤엉킨 ‘브록햄튼’스러운 사운드를 들려준다. 과장된 노이즈 소스와 위협적인 808 베이스가 어우러진 “FMG”에서 단출한 구성의 미디엄 템포 사운드 위로 디지털 가공한 싱잉랩 퍼포먼스가 잔잔한 여운을 자아내는 “Animal”로 이어지는 초반부는 대표적인 예다.
“Man On The Moon”을 기점으로 앨범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침잠하기 시작한다. “Keep It Southern”까지 그룹의 성공적인 행보를 자축하고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내며 패기를 보여줬다면, 후반부에 들어서 이별의 과정을 천천히 한 단계씩 묘사한 것이다. 좋았던 과거를 추억하며 개인으로 내던져지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고백하는 “Crucify Me”에서는 불규칙적으로 연주되는 피아노와 드럼이 어지럽게 회오리치면서 슬픔과 불안함의 감정이 고조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룹의 출세작인 [Saruration] 시리즈에서 브록햄튼은 오픈 마이크를 하듯이 각자의 개인사를 털어놓았다. 그러나 [TM]에 이르러 ‘그룹의 만남과 이별’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마치 한 사람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마지막 순간에 와서 진정한 그룹, 혹은 가족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Good Bye”까지 다 듣고 나면 이들의 해체가 더욱 슬프게 다가온다. 12년의 여정은 끝이 났지만, 그룹이 그간 걸어온 발자국은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을 것이다.
7. Earl Sweatshirt - Sick!
Released: 2022-01-14
네 번째 정규 앨범 [Sick!]에서 얼 스웻셔츠(Earl Sweatshirt)의 태도는 달라졌다. 여전히 냉정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삶의 긍정적인 면을 찾으려 애쓴다. 드럼을 배제하고 포문을 여는 듯한 분위기의 신시사이저와 베이스로만 간결하게 진행되는 알케미스트(The Alchemist)의 비트 위로 팬데믹 상황에서 삶의 균형을 찾으려고 노력한 시간을 회상하는 “Old Friend”는 대표적이다. ‘Know I came from out the thickest smiling, 덤불 속에서 웃으며 나왔어.’라는 가사를 통해 그가 과거의 슬픔을 어느 정도 극복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랩도 훨씬 명징하고 깔끔해졌다. 일부러 웅얼거리는 듯한 톤으로 발음을 뭉개 그루브를 만들어냈던 전작들과는 다르다. 마치 변화된 태도를 반영하는 듯하다. 특히, “2010”, “Lobby (int)”, “Titanic”처럼 트랩 비트를 차용한 트랙에서는 유행하는 플로우를 그만의 끈적한 스타일로 소화해내 색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가장 많은 곡에 참여한 프로듀서 블랙 노이즈(Black Noi$e)는 음울하고 몽환적인 신시사이저가 주도하는 트랩 사운드로 이전과는 다른 얼의 모습을 끌어냈다.
얼은 작년 7월, SNS을 통해 아들이 생겼다는 소식을 전했다. 아이는 팬데믹 속에서도 그가 새로운 삶의 희망과 의욕을 찾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인생의 변화는 [Sick!]의 음악적 변화로 이어졌다. 이미 본인만의 굳건한 영역이 있음에도 새로운 시도를 통해 음악적 외연을 성공적으로 확장했다. 훗날 [Sick!]은 커리어의 방향을 틀게 만든 기점이 되는 작품이 될 것 같다.
6. Nas - King's Diasease III
Released: 2022-11-11
나스(Nas)는 [Illmatic] 이후 완성도 있는 앨범을 꾸준히 발표했지만, 비트를 고르는 선구안이 떨어진다는 오명에 시달려왔다. 그래서일까. 2018년 당대 최고의 프로듀서인 칸예 웨스트(Kanye West)의 '와이오밍 7트랙' 프로젝트에 합류해 [Nasir]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이후 나스는 또다시 한 명의 프로듀서와 앨범을 만들었는데, 바로 히트보이(Hit-Boy)와 함께한 [King's Disease]다. [King's Disease]는 나스에게 첫 그래미를 안기며 경력의 새로운 챕터를 열었다. 그 챕터는 히트보이와 함께 한 시간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다.
[King's Disease III]는 둘이 협업한 네 번째 앨범이며, [King's Disease] 시리즈의 완결이다. 나스는 첫 트랙 "Ghetto Reporter"에서부터 이 시리즈의 완결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히트보이와 만든 앨범 중 최고임을 공언하고, 이전의 앨범들은 컴필레이션이었다며 게스트 없이 온전히 앨범에 집중하겠다고 선언한다. 결과는 놀랍다. 나스는 경력을 통틀어 가장 균형 잡힌 랩 기술과 퍼포먼스, 가사의 조화를 보여준다. 이제 50대에 접어들었지만, 20대의 자신은 물론 현재 시대를 이끄는 래퍼들과 견주어도 전혀 떨어지지 않는 기술적 완성미의 랩으로 50분이 넘는 앨범을 꽉 채웠다.
30년이 넘는 본인의 경력과 힙합문화, 그리고 블랙 커뮤니티를 절묘하게 버무린 가사의 깊이는 범접하기 힘든 수준이다. 히트보이 역시 향수를 자극하는 기운 가득한 붐뱁 비트로 이를 확실히 지원한다. 중량감과 세련미가 두드러지는 드럼이 주도하면서 빈티지한 사운드 소스들이 결합하여 만든 품격 있는 프로덕션은 앨범이 선사하는 희열의 핵심이다. [King's Disease III]는 [Illmatic] 이후 나스의 앨범 중 최고라 불러도 무방하다. 물론 힙합 역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앨범으로 데뷔하고 약 30년이 지난 2022년에 이런 뛰어난 앨범을 만들고 있는 나스가 가장 경이롭다.
5. Pusha T - It's Almost Dry
Released: 2022-04-22
푸샤 티(Pusha T)의 음악은 변함없다.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시점부터 현재까지 시종일관 코크 랩(Coke Rap)을 들려준다.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생생하게 나열된 거리의 삶에 관한 이야기에 독보적인 랩 스킬과 개성이 더해져 매번 특출했다. 4년 만에 발표한 신보에서도 그렇다. 소재만 보자면 평소 그가 해왔던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럼에도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그의 다층적인 은유와 풍부한 어휘력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명사와 원관념을 끌어오면서도 주된 이야기를 흩트리지 않으며, 직간접적으로 뜻을 관철하여 듣는 말을 곱씹게 하는 묘미도 살아있다. 구절마다 그득한 라임도 여전하다. 예(Ye), 퍼렐 윌리엄스(Pharrell Williams), 오지볼타(Ojivolta), 에이티에잇 키스(88-Keys), 북즈다비스트(BoogzDaBeast) 등등, 유명 프로듀서가 대거 참여한 프로덕션도 탄탄하다.
[It's Almost Dry]는 여느 때처럼 푸샤 티의 명성에 걸맞은 완성도를 들려준다. 전작들보다 파격적이고 공격적인 면은 덜하지만, 그가 잘하는 것을 밀도 높게 담아내어 다시 한번 코크 랩의 묘미를 일깨워준다. '내 생각엔 누가 최고냐고? 나랑 예지, Far as I’m concerned, who’s the best? Me and Yezos'라 외치는 단순한 라인도 묵직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있다.
4. Freddie Gibbs - $oul $old $eperatly
Released: 2022-09-30
[$oul $old $eperatly]는 프레디 깁스(Freddie Gibbs)가 워너 레코즈(Warner Records)와 계약하고 처음으로 발표한 메이저 데뷔 앨범이다. 우선 눈에 띄는 건 트랙마다 다른 인물이 참여한 프로덕션이다. 메드립(Madlib), 알케미스트(The Alchemist), 케이트라나다(Kaytranada), 제이크 원(Jake One), 보이원다(Boi-1da), 저스티스 리그(J.U.S.T.I.C.E. League), 디제이 폴(DJ Paul), 제임스 블레이크(James Blake), 디제이 다히(DJ Dahi) 등등, 그야말로 화려한 라인업이다. 건조한 드럼이 주도하는 붐뱁부터 서던 힙합을 기반으로 한 트랩까지 스펙트럼도 넓다. 그럼에도 산만하게 느껴지지 않고 깁스의 색깔로 수렴된다. 그는 이미 여러 프로젝트를 통해 상이한 스타일의 프로덕션을 능숙하게 소화해왔다. 그래서 지금까지 보여준 음악을 한 앨범에 집대성한 것 같다.
앨범은 라스베이거스에 위치한 가상의 호텔 겸 카지노 ‘$oul $old $eperatly’를 배경으로 한다. 그는 성공을 축하하고, 과거를 돌아보며 소회를 풀어낸다. 동시에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하며 위험을 무릅썼던 지난 과정을 하나의 큰 ‘도박’에 비유한다. 순탄치 않았던 지금까지의 과정을 짧게 요약하는 “Space Rabbit”과 “Rabbit Vision”, 거리에서 생활하며 받았던 물리적, 심적 고통에 대해 토로하는 “Dark Hearted”와 “Gold Rings”, 자신의 경우에 빗대 마약과 SNS로 망가진 현 흑인 사회의 풍경을 그린 “CIA” 등등, 커리어 사상 가장 진중한 이야기들이 죽 이어진다.
[$oul $old $eperatly]는 모든 면에서 깁스의 커리어가 집약된 결과물이다. 어떤 비트에서든 물 만난 고기처럼 여유롭게 랩을 쏟아내는 그에게서는 어느새 관록이 느껴진다. 건조한 랩을 타이트하게 뱉다가 자연스레 랩에 멜로디를 입히는 등, 신들린 듯한 강약 조절로 혼을 빼놓는 “Dark Hearted”는 그가 현재의 위치에 오르게 된 이유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긴 시간 투쟁했던 그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물이 바로 [$oul $old $eperatly]다.
3. Danger Mouse & Black Thought - Cheat Codes
Released: 2022-08-12
베테랑이 주는 기대는 여느 경우와 다르게 실로 남다르다. 특히 그 대상이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온 데인저 마우스(Danger Mouse)와 블랙 쏘웃(Black Thought)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두 사람이 만나 완성한 [Cheat Codes]는 정말 강렬하다. 블랙 쏘웃은 타이트한 랩에 기발하고 풍부한 표현으로 이야기를 주조한다. 자신과 주변의 삶을 바라보며 흑인으로서 뼈저리게 느끼는 감정을 정치적인 주제 및 사회적 이슈와 버무렸고, 통찰을 드러낸다.
동시에 30년이 넘는 활동에도 여전히 기발한 라인을 꽉꽉 채워 앨범을 완벽히 주도한다. 또 다른 한 축을 담당한 데인저 마우스는 60-70년대 소울과 사이키델릭 록을 샘플링하여 비장하고 무거운 무드를 기막히게 조성한다. 물론 "Because"와 "The Darkest Part", 마이클 키와누카(Michael Kiwanuka)를 기용한 "Aquamarine"에서 들려주듯이 보컬 샘플을 활용해 분위기를 전환하는 방식도 훌륭하다.조이 배드애스(Joey Bada$$), 런 더 쥬얼스(Run The Jewels), 엠에프둠(MF Doom), 콘웨이 더 머신(Conway the Machine) 등등, 앨범을 한층 풍요롭게 하는 피처링까지 즐겁다. 기대를 뛰어넘는 만족감이 실로 대단하며, 이름값에 어울리는 활력이 넘치는 작품이다. 두 아티스트에게 또 하나의 굵직한 디스코그래피가 남는 순간이다.
2. Roc Marciano & The Alchemist - The Elephant Man's Bones
Released: 2022-08-19
락 마르시아노(Roc Marciano)와 알케미스트(The Alchemist)의 공통점이 뚜렷하다. 랩과 프로듀서를 겸한다는 사실은 물론, 추구하는 음악의 방향성도 그렇다. 수많은 실력자가 난장을 벌이는 곳에서 전통주의와 전위주의를 거리낌 없이 넘나들며 위조할 수 없는 인장을 새겼다. [The Elephant Man's Bones]는 이를 명증하는 작품이다. 락 마르시아노와 알케미스트는 각자의 무기를 하나씩 버리고 역할을 양분했다. 정교한 샘플링을 바탕으로 완성한 프로덕션은 눅눅하고 비선형적인 동시에 아름다우며, 밀도 높은 라임과 언어유희로 설계된 랩은 차분하고 위협적인 동시에 우아하다. 랩과 프로덕션 전부 매우 높은 레벨에 올라있다.
락 마르시아노의 래핑은 서서히 정서를 옭아매며 끝내 중독으로 몰고간다. "The Horns of Abraxas" 같은 비트에 뛰어들어 가차없는 드럼의 훼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타이트한 랩으로 어우러질 수 있는 래퍼는 흔치 않다. 그는 비트를 조련해야 할 때와 교감해야 할 때를 정확히 알고 있다. 가사의 완성미 또한 새삼스러울 것 없이 탁월하다. 냉소적인 래핑을 타고 해석의 고통 뒤에 희열을 안기는 라인과 필름 누아르의 오디오 버전 같은 흥미롭고 상세한 스토리텔링이 터져나온다.
앨범 제목은 신체 조직의 일부가 과잉 성장하는 병 탓에 기형적 외모를 갖게되어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엘리펀트 맨' 조셉 메릭(John Merrick: 1862~1890)의 일화로부터 비롯됐다. 두 아티스트가 추구하는 힙합은 우리가 까발리기를 꺼려하는 것일 수도, 숨기고 싶어하는 본질적인 것일 수도 있다. 락 마르시아노는 그들의 로우한 예술관을 엘리펀트 맨의 뼈에 비유하며 다차원적 해석을 요구했다. 왜 마다하겠는가. 이런 걸작을 선사해주었는데.
1. Kendrick Lamar - Mr. Morale & the Big SteppersReleased: 2022-05-13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의 다섯 번째 정규 앨범 [Mr. Morale & the Big Steppers]는 [DAMN.] 이후 5년 간의 부재로부터 시작한다. 첫 트랙 “United In Grief”의 인트로에서 켄드릭은 샘 듀(Sam Dew)의 코러스 뒤로 1,855일 동안 자신이 ‘무언가’를 겪었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무언가’는 켄드릭이 앓았던 정신 질환을 의미한다. 그는 치료나 상담을 거부하고, 물질과 욕정으로 고통을 잠재우려고 애썼다. 그리고 자신은 ‘다르게 슬퍼할 뿐이다(I grieve different)’라고 항변한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자신을 가두던 모든 시선과 요구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진정한 나를 찾기로 선택한 마지막 트랙 “Mirror”에 이르면 묘한 해방감과 감동이 느껴진다. 모호한 결말로 선택을 청자에게 미루었던 [DAMN.]과는 다른 완전한 결말이다.
오랜 파트너 사운웨이브(Sounwave)가 키를 쥔 프로덕션은 전반적으로 블랙뮤직의 색깔이 옅어졌고,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적극적으로 차용됐다. [Mr. Morale & the Big Steppers]에는 들을 때마다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구성적 요소가 곳곳에 숨어있다. 그만큼 치밀하고 섬세하게 완성되었다. 또한 켄드릭 개인의 상황과 문화적 배경을 알고 들으면 더욱 깊이 있는 감상이 가능하다. 물론 배경지식 없이 들어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여전히 신들린 듯이 쏟아내는 경이로운 랩 퍼포먼스와 빈틈없이 짜인 프로덕션만으로도 앨범을 들을 가치는 차고 넘친다.
켄드릭은 항상 개인사를 구체적으로 풀어내며 사회 전반의 문제를 이야기해왔다. 그중에서도[Mr. Morale & the Big Steppers]는 가장 개인적이다. 문제의 시작과 해소 모두 개인에서 끝난다. 그래서 앨범을 처음 들을 때는 켄드릭의 이야기에 집중하게 된다. 그런데 두 번째부터는 켄드릭에 비추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구원자’의 이미지를 내려놓고 개인으로 돌아온 그의 이야기가 보통 사람들의 거울 역할을 한다. 켄드릭이 시선을 세상에서 내면으로 돌린 순간, 그 어떤 작품과도 다른 새로운 걸작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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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pegmafia (2023-02-03 13:45:19, 218.151.72.***)
- J.I.D the forever story 어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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