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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외 플레이리스트] Questlove의 힙합 에세이 6부작 (1) When the People Cheer
    rhythmer | 2014-05-05 | 18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When the People Cheer: How Hip-Hop Failed Black America

    본 글은 루츠(The Roots) 드러머 퀘스트러브(Questlove) 인터넷 잡지 [Vulture] 연재하는 힙합 에세이 6부작의 글로, 현지 날짜 4 22일에 업데이트되었습니다. ‘벌쳐(Vulture)’ 지는 글이힙합의 가까운 과거와 과거에 대해 생각하고, 미래의 가능성을 탐구 것이라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작권은 ‘Vulture’지와 ‘Questlove’에게 있으며, 원문은 이곳 http://www.vulture.com/2014/04/questlove-on-how-hip-hop-failed-black-america.html 에서 있습니다. 좋은 글이라 뉴스란을 통해 번역 기사로 소개해봅니다.

     

     

     

    살면서 이따금 나를 사로잡고, 삶의 지침을 제공하는 세 명언이 있다. 첫 번째는 16세기 영국의 개혁가인 존 브랫포드(John Bradford)의 말이다. 군중을 선동한 혐의로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 그는 한 무리의 죄수들이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며 말했다. “신의 자비가 아니었다면 내가 저기를 걷고 있었으리라.” (사실 그는신의 자비가 아니었다면 존 브랫포드가 저기를 걷고 있었으리라고 말했지만 이야기하기 쉽도록 주어를 바꾸었다.)

     

    두 번째 명언은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것이다. 그는 양자 역학의 불확정성을 비꼬며,먼 거리에서 일어나는 유령 같은 일이라 불렀다. 그리고 세 번째로, N.W.A.의 가사의 대부분을 썼던 아이스 큐브(Ice Cube)가 있다. 그는 1988년도의 곡 “Gangsta Gangsta”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삶은 여자와 돈을 빼면 아무것도 없지.”

     

    이 세 가지 글귀는 언뜻 보기엔 서로 동떨어진 듯 보이지만, 사실 관계도를 그려본다면 삼각형 모양으로 연결된다. 브랫포드의 말은 신의 자비, 행운, 그리고 감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다시 말해너의 삶은 다른 이의 것이 아니며, 오로지 너의 것이다.라는. 나는 이것에 대해 제법 자주 생각하곤 한다. 다른 사람이 내 위치에 올 수도 있었으며, 반대로 내가 다른 사람의 위치에 있을 수도 있었겠지. 이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첨언하자면, 브랫포드의 말은 오늘날 좋은 일이 있을 때 이를 자축하는 뜻에서 많이 쓰인다. 일이 더 나빠질 수도 있었는데 잘 풀렸다는 식으로. 하지만 사실 브랫포드의 행운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불과 몇 년 후 그는 화형장에 끌려가게 된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말은 당연히 물리에 대한 것이었지만, 내게 그는 마치 좀 더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양 느껴진다. 사람들이 내게 영향을 끼치는 방식, 혹은 다른 이들의 삶이 내 삶과 얽히는 방식에 대해서 말이다. 시애틀의 어느 꼬마나 피츠버그의 좀도둑에게 일어나는 일이 내게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인간 문명은사회 계약위에 세워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일종의 자선 행위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너무 강하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라. 너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라.” 하지만 계약은 눈에 띄지 않을지언정 존재하며, 우리 모두 사이를 연결하고 있다. 그리고 아이스 큐브의 가사가 있다. 겉보기에 그는 삶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이른바이드(id)’가 지배하는- 를 이야기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사실 그의 가사는 사회 계약이 파괴된 세상을 그려내고 있다. 사람들이 오직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며, 다른 이들은 멸망하길 바라는 세상. 그런 세상에 무엇이 남겠는가?

     

    이 세 글귀가 삼각형의 각 변을 구성한다. 이 글은 그 세 변의 접점을 찾기 위해 쓰였다. 나는 약간 특이한 방식으로 접근해보려고 한다. 앞서 언급한 세 글귀는 더 언급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글의 기저에는 항상 그들이 존재한다. 이제부터 내가힙합 세대가 가져온 결과에 대해서 논하는 동안, 논리의 흐름이 이따금 곁가지로 빠진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너무 오래 중언부언하지는 않을 테니까.

     

     

    다음과 같은 말로 본문을 시작할까 한다: 힙합은 흑인 음악을 지배하고 있다. 사실 이 주장은 단순하지 않으며, 다양한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핵심은 간단하다. 음악 순위표를 보라. 혹은 당신이 알고 있는 팝 음악인들을 최대한 많이 떠올려보고, 그중 힙합에 속하지 않은 흑인이 몇이나 되는지 생각해보라. 최근 차트의 정상을 차지한 이들 중 힙합 음악인들은 그리 많지 않다: 항상 그 자리를 지켜온 제이지(Jay Z)나 칸예 웨스트(Kanye West), 드레이크(Drake), 그리고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 같은 신예가 전부일 것이다. 여성 음악인들로 말할 것 같으면, 문제가 약간 더 복잡해진다. 하지만 아주 약간일 뿐이다. 가장 잘나가는 흑인 음악인들- 비욘세(Beyonce)와 리안나(Rihanna)-은 팝 (혹은 팝-소울) 가수로 분류되지만,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들은 힙합을 살짝 비튼 음악을 하며, 힙합의 최고 스타들과 함께 작업한다. 비욘세와 제이지가 그렇고, 리안나 역시 드레이크부터 에이샙 록키(A$AP Rocky)와 에미넴(Eminem)에 이르는 힙합 가수들과 작업했다.

     

    항상 이랬던 것은 아니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80년대 후반만 해도, 힙합 신(scene)에 몸담고 있지 않은 흑인 음악인을 10명 가까이 댈 수 있었다. 트레이시 채프먼(Tracy Chapman)과 같은 포크 가수가 있었고, 리빙 컬러(Living Colour)와 같은 록 밴드가 있었고, 라이오넬 리치(Lionel Richie) 같은 팝 가수가 있었으며, 수많은 소울 가수들이 있었다. 마이클 잭슨이나 프린스와 같이, 장르에 구속되기를 거부한 슈퍼스타들을 제외하고도 그랬다. 힙합신 역시 풍요로웠다. 1989년만 해도, 데 라 소울(De La Soul)과 게토 보이즈(Geto Boyz) EPMD, 부기 다운 프로덕션(Boogie Down Production, BDP), 아이스-(Ice-T), 그리고 퀸 라티파(Queen Latifah) 등이 앨범을 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흑인 음악이라는 거대한 신의 일부였을 뿐이다. 그 이후 힙합은 또 다른 1989년의 산물인 엑슨 발데즈(Exxon Valdez, 유조선으로 1989년 알래스카에서 좌초하면서 최악의 원유 유출 사고를 일으켰다)를 닮아갔다. 그 영향이 걷잡을 수 없도록 커진 것이다. 

     

                    (가수 Tracy Chapman)

     

    힙합이 흑인들의 유행에서 출발해,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 왜 문제가 되는가? 이것은 오히려 좋은 일 아닌가? 특히나 나처럼 힙합신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이상하게 비칠지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엄밀히 말해 불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나는 단순히 내가 운 좋게 맞닥뜨린 유행에 대해 살짝 변명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보다 더 복잡한 상황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 힙합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힙합을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반드시 좋은 일은 아닐지 모른다.

     

    20년 전, 우리 아버지는 내가 힙합을 연주한다는 사실을 알고 다소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그는 내가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알지 못했다. 그의 생각으로는, 드러머라면진짜 일을 해야 했다. 그러니까 아니타 베이커(Anita Baker)의 음악 감독이 된다든가 하는 것 말이다. 오늘날 나는 힙합이 그의 우려를 비웃듯 미국 흑인 문화 전체로까지 성장한 모습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하지만놀라움은 왠지 적절하지 않은 표현인 것 같다. 흑인 문화는 백인 중심의 사회에 때로는 반항하고 때로는 협력하면서 21세기의 문을 의기양양하게 열어젖혔기 때문이다. 미국의 젊은이들은 오늘날 힙합을 팝 음악의 대표 주자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왜 이 성취에 기묘한 뒷맛이 남는가? 그 느낌은 공허하다기보다, 걱정스러움에 가깝다.

     

    이 점에 대해 나는 몇 년에 걸쳐 생각해왔다. 그리고 그만큼 오랜 시간 동안 걱정해왔다. 이 생각 때문에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낮에는 집중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항상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힙합이 널리 퍼질수록, 그것은 더욱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에나 있다는 것은, 아무 데에도 없다는 것이다. 한때 주류 문화에 저항(그 방식은 통일되지 않았고, 개별적이었으나)해오던 것이 이제는 시들한 주류 문화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약간의 음모론을 꺼낼 수도 있을듯 하다: 흑인 음악의 모든 것이 힙합과 연결되는 순간, 이 문화를 죽이려는 사람들은 오직 힙합만 죽이면 될 테니까.

     

    그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모든 문화가 하나의, 의미조차 모호한 형용사 하나에 담겨있다. 오늘날 흑인이 미국에서 하는 모든 행위는힙합으로 표현된다. 그것이 말이 되든 되지 않든, 상관없다. ‘힙합 패션은 그나마 나은 케이스일지 모르지만- 여전히 헷갈리긴 마찬가지다. 그것은 힙합 음악인들에 의해 유행하는 패션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힙합 음악을 정의하는 어떤쿨함을 지닌 패션을 의미하는가? 다른 경우는 더욱 심하다. 힙합 푸드? 힙합 정치? 힙합 지식인? 게다가 심지어힙합 건축이라는 말도 있다. 그게 뭔가? 엠씨 해머가 집이라도 지었단 말인가?

     

    (Hiphop Architecture를 소개하는 인터넷 페이지)

     

    다른 장르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스키니 타이는 있어도, 그걸 뉴웨이브 패션이라고는 하지 않는 것처럼. 정카누(바하마의 민속 음악) 건축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힙합처럼 음악 장르의 이름이 전반적인 미적 형용사로 쓰이는 경우가 있다면 아마 펑크가 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힙합만큼 철저한 인종적 코드가 담겨있지 않다. 물론, 이걸 힙합이 성공을 거둔 증거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인기가 많아서, 힙합이라는 컨셉이 다른 영역으로도 옮겨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디로 옮겨갔단 말인가? 여기에는 힙합이 망각으로 향하는 길을 겪고 있다는 불안감이 존재한다. 이 음악은 원래 살아 숨 쉬는 사람들과 그들이 겪는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탄생했다- 내가 앞서 이야기한사회 계약을 기억하는지? 하지만 오늘날 힙합은검은문화 속의 상징들을 반복해서 재조합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수많은 짐을 싣고 우주를 누비는 화물선 같다. 화물선 안의 짐들은 그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날라질 뿐, 그 속이 비어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The Impressions의 노래 제목처럼) ‘계속 시도해(Keep On Pushing)’ 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 무엇을 시도한다는 말인가? 힙합이 주체에서 무대로 변화하는 동안, 그것은 원래 지니고 있던 날카로움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사람들은 힙합이 얼마나 빨리 상업적으로 성공했으며, 얼마나 빨리 그 성공에서 내려오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힙합 신의 톱스타들은 여전히 많이 벌지만, 예전만큼은 아니다. 그리고 그 아래 레벨의 음악인들은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한 노인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힙합의 오랜 팬이기도 했다. 그는 루츠(The Roots)를 좋아했고, 우리 음악을 좋아했다. 누군가 이 대중문화가 얼마나 빠르게 변화하는지를 이야기했고, 그는 어릴 적의 소울 음악을 잠시 추억했다. “곧 돌아올 거야.” 그가 말했다. “세상은 돌고 도는 법이거든.” 하지만 그럴까? 당신이 지난 200년간 음악이 변화한 과정을 생각해본다면, 돌고 도는 것은 오직 세상이 돌고 돈다고 믿는 노인들밖에 없었다. 역사는 오히려 새로운 장난을 치기를 좋아하는 듯하다. 물론 거품이 생기고 꺼지는 패턴이란 게 있다. 인간의 유전자에 박혀있는 기본적인 성향이란 것이 있다. 그러나 이 성향을 반영하는 예술의 형태는 절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사라질 뿐이다. 힙합은 더 이상 대중문화에서 흥미로운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대중문화 자체에 가까우며, 사람들은 거기에서도 점차 흥미를 잃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는 무엇이 남겠는가?

     

    존 브랫포드가 남긴 교훈을 다시 한 번 인용하고 싶다: 나는 지금 이곳에 있어 다행이다. 물론 그는 이런 식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루츠 20년이 넘게 활동하는 동안, 우리는 기묘한 책임을 지고 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의미 있는 음악을 하는 동시에 성공을 거둘 것을 요구한다. 우리 역시 그것을 감수하고 있다. 그러나 항상 이 두 목표가 같이 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오늘날의 힙합 세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성공하는 자는 그들 자신과 힙합의 승리에 대해 이야기하길 좋아한다. 하지만 그런 식의 태도가 남기는 의미는 거의 없다. 무의미함은 인기를 끌기 쉽다. 중독적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반박하면서 켄드릭 라마를 언급할 것이다. 그의 음악이 어떤 식으로 사회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예로 들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쩌면 이 바닥이 안고 있는 문제를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예외적 사례에 불과하지 않을까?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시간은 언제나 말해준다. 시간은 말하기를 거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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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i boy (2014-05-07 09:46:44, 119.207.60.***)
      2. '힙합이 흑인들의 유행에서 출발해,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 왜 문제가 되는가? 이것은 오히려 좋은 일 아닌가?'
        정말 솔직하고 멋진 글입니다. 공감도 많이 가고, 6부작 모두 꼭 읽고싶네요.!!
      1. 랩퍼엔 (2014-05-05 11:31:51, 211.56.190.***)
      2. 우와. 정말 깊은 통찰이 느껴지는 글이네요. 번역하신 분의 내공도 보통이 아니고 - 한국 힙합씬에도 시사하는 바가 분명히 있는 글입니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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