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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외 플레이리스트] Questlove의 힙합 에세이 6부작 (2) Mo’ Money, Mo’ Problems
    rhythmer | 2014-06-02 | 8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Mo’ Money, Mo’ Problems: How Hip-Hop Failed Black America, Part II


    글은 루츠(The Roots) 드러머 퀘스트러브(Questlove) 인터넷 잡지 [Vulture] 연재하는 힙합 에세이 6부작의 두 번째 글로, 현지 날짜 4 30일에 업데이트되었습니다. ‘벌쳐(Vulture)’ 지는 글이힙합의 가까운 과거와 과거에 대해 생각하고, 미래의 가능성을 탐구 것이라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작권은 ‘Vulture’지와 ‘Questlove’에게 있으며, 원문은 이곳 http://www.vulture.com/2014/04/questlove-on-how-hip-hop-failed-black-america.html 에서 있습니다. 좋은 글이라 뉴스란을 통해 번역 기사로 소개해봅니다.


    힙합이라는 말을 들을 때 사람들은 무엇을 떠올리는가? 기술적인 요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아니다. 어느 예술에 있어서나, 기술은 아주 제한된 일부에 불과하다. 랩퍼 X가 얼마나 랩을 잘하는가는 중요하지만 그것이 핵심은 아니다. 프로듀서 X의 비트가 얼마나 아름답고, 매혹적인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지만 힙합은 고상한 음향 예술이 아니다. 힙합은 이야기다.  무엇을 말하느냐가 어떻게 말하느냐 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차라리 이렇게 쓸 수도 있겠다: 예술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소재이며, 소재란 예술이 감상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라고. 예술의 다른 요소는 의미가 전달될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없는 의미를 만들지는 않는다. 이러한 시각이 논란을 일으키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힙합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보석과 시계, 그리고 자가용 비행기다. 그들의 생각 속에서 힙합은 곧 성공이며, 성공한 자들의 사치품과 연결된다. 이러한 연상 작용이 힙합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 사회에서의 유명세란 자신이 가진 것을 보여주고 자랑하는 데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힙합 씬에서는 그런 과시적 성향이 유독 강하다. 물론, 여기에는 복잡한 이유들이 있지만, 간략하게 이야기해보려 한다. 일단 미국의 흑인 문화가 부의 과시와 밀접하게 연결된 것은 노예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노예들은 그 자신이 사유재산이었기에 재산을 소유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해방에서 얻은 것은 정치적 실존뿐만 아니라 경제적 실존이기도 했다. 소유함으로써 그들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더 많이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더욱 강조할 수 있었다. 이렇듯 가진 것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이없는존재가 아님을 어필하는 방식이 힙합이다. 힙합은 경제권이 없다면 그대로 잊히고 말리라는 당신의 공포에 대한 대응이다.

     

    하지만 그가진 것은 무엇인가? 오늘날 사람들이 가진 것이 10, 혹은 20년 전 사람들이 가진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는가? 몇십 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1986, 힙합 씬의 유행을 이끌었던 뮤지션은 런-디엠씨(Run-DMC)였다.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후, 그들은 자신들의 부를 자랑하는 노래를 내놓았다. 이미 예상하고 있겠지만, 그 노래는 “My Adidas”이다. 그렇다면, 80년대의 랩 스타들이 어떻게 자기 자랑을 하는지 볼까?

     

    나의 아디다스

    공연장 문을 박차고 들어오지

    그리고 무대를 누비지

    Live Aid 무대에 내가 오르면

    모든 관중들은 기꺼이 돈을 내고

    빈자들은 도움을 받지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이 가사 속 상업주의가 무척 순진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음은 자명하다.  힙합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을 위해 첨언하자면, 이 노래의 중심에 있는 것은 신발이 아니다. 이 곡이 노래하는 것은 런-디엠씨라는 그룹이 스타덤에 오르기까지 겪었던 일들이다. 그들이 치른 공연들과 그곳의 관객들이 곡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한편, (곡의) 후반부에서 내러티브의 초점은 런-디엠씨가 아닌 'Live Aid'로 옮겨간다. 1985, -디엠씨의 말마따나 '빈자들이 도움을 받게끔' 기획된 자선 공연말이다. 지난 글에서 나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말을 빌려 '먼 곳에서 일어나는 유령 같은 현상'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당시 그것을 나는 사회 계약의 한 형태로 해석했다.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은 나에게 일어나는 일이 될 수 있고, 그렇기에 다른 사람의 상황을 나와 관련 없다는 듯 쉽게 치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디엠씨의 노래가 가지는 힘도 이와 비슷한 종류이다. 그들이 신발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신발은 청자를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하나 되는 공간으로 데려간다.

     

    하지만 다른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가령 런-디엠씨의 내러티브가 아디다스 운동화로 형상화된다는 사실이 혹자에게는 의아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리라. 이 신발이 유래한 곳은 아디다스 사()가 탄생한 독일의 도시지, 뉴욕이나 퀸즈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디다스 신발은-캉골 모자와 트레이닝 복과 함께- 당시 런-디엠씨를 상징하는 복장의 일부이기도 했다. 그 시절 런-디엠씨는 화려함을 추구하는 힙합의 트렌드에 역행하는 존재였다. 다른 힙합 음악인들이 여전히 디스코 시대의 한복판에 있는 양 모피 코트 자락을 휘날리고 스터드 코트를 입을 때 런-디엠씨는 단출한 옷차림을 추구하면서 새로운쿨함을 창조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쿨함이 팬들도 충분히 따라할 수 있는 종류였다는 점이다.  -디엠씨처럼 되고 싶다고? 아디다스를 사라. 



     


    지금은 무엇이 다른가? -디엠씨 시절, 힙합의 한편에승리자들이 위치해있었다면, 그 다른 편에는 비록 작으나 나름의 영향을 끼치는 음악인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오늘날 시장은 너무나 지독히도 이분화되어있고, 회사들은 성공이 확실하지 않은 것에 돈을 투자하는 것을 꺼린다. 그 결과 힙합은 오로지 승자들을 위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미 상업적 역량을 증명한 스타들 말이다. 게다가 그 스타들의 수조차 갈수록 감소하고 있다. 제이지(Jay Z), 에미넴(Eminem), 드레이크(Drake), 매클모어(Macklemore), 그리고 캔드릭 라마(Kendrick Lamar)를 제외하면, 100만 장 넘게 판 랩퍼조차 거의 전무하다시피하다. 물론, 판매량 이상의 문화적 영향력을 뽐내는 랩퍼들도 존재한다. 가령 칸예 웨스트(Kanye West)[Yeezus] 70만 장을 파는 데에 그쳤다. 하지만 그를 포함하더라도 고작 6명에 불과하다. 오직 이들만이 그나마 눈에 띄는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이 랩퍼들은 무엇을 하는가? 한 세대 전의 선배들이 그랬듯이, 오늘날의 랩퍼들도 자기 자신의 성공을 과시하고 자랑한다. 선배들이 그랬듯이, 자신들의 장신구를 내보이며 뽐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 장신구란? 여기서 "My Adidas"의 자식뻘 되는 노래를 한번 보자. 제이지의 지난 앨범 [Magna Carta Holy Grail] "Picasso Baby"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피카소 작품, 우리 집에 말야

    아니, 내 저택이지.

     

    "My Adidas"와 비교하면, 이 노래는 마치 지구 반대편에 놓여 있는 듯 하다. 물론, 여기서도 개인의 성취감은 물건에 비유되어 이야기되지만, 그 스케일이 전혀 다른 것이다. 가령 내가 지난 번 장을 보러 갔을 때, 나는 한 점의 피카소 그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중략) 하지만 가사를 다시 한번 보자. 제이 지는 단순히 미술품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른 유명 화가들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예술가로서 자신 역시 한층 강조하고 있다.

     

    말하지 못할 것도 없어

    나는 제 2의 장 미쉘 바스키아

    워홀의 작품에 둘러싸여서

    우리 패거리는 잔치를 벌이지

    갤러리 밖에는 두대의 부가티가 대기하고 있어

     

                  

     

    뉴욕의 갤러리에서 열린 "Picasso Baby" 퍼포먼스’. 제이지는 장장 6시간 동안 곡을 반복해서 불렀다고 한다.

     

    "My Adidas"가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물건들을 다루고 있다면 "Picasso Baby"는 도저히 가질 수 없는, 마치 환상과도 같은 사치품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곡이다. 곡이 시작하면서부터 제이 지는 청자들이 그의 이야기에 함부로 끼어들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그는 당신과 같은 물에서 놀기를 원치 않는다. 하지만 청자들은 그 사실에 상처받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즐긴다. 그들은 제이 지처럼 되어 자신 역시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공간에서 즐길 수 있기를 원한다. 더욱 가관인 (혹은 우스운) 예도 있다. 에이스 후드(Ace Hood)의 노래 "Bugatti"가 그것이다. 여기에 후렴구를 인용해보도록 하겠다.

     

    나는 새 부가티에서 일어나

    나는 새 부가티에서 일어나

    나는 새 부가티에서 일어나

     

    벌스에서 몇 구절:

     

    놈들은 나를 싫어하지

    내가 병신 같이 부자라서

    십만 달러? 그건 내 시계값인데

    20만 달러로 네 여자를 샀지

    너와 네 모델 년은 이걸 잘 기억해두라고

     



     

    부가티가 얼마나 하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극소수만이 이 차를 살만한 여유를 갖고 있다. 그러나 위 노래의 무엇인가가 나로 하여금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부끄럽게 만든다. 그리고 내 손목시계가 얼마나 하는지는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내가 노래를 들으며 나 자신을 다른 이와 비교하고, 부끄러워하는 순간, 힙합은 가진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화려하게 치장하는 데에 일조한다. 가난한 이들의 용기를 북돋아 성공할 수 있도록 돕는 대신 말이다. 이건 힙합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미국의 정치 풍토 역시 마찬가지로 기능한다. 하지만 이 음악이 한때 살아 숨 쉬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불평등한 권력 구조에 맞서 싸우는 모습을 담아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변화는 분명 주목할만하다.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퍼프 대디(Puff Daddy)와 노토리어스 비아이쥐(Notorious B.I.G.)가 이러한 분위기에 공헌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노토리어스 비아이쥐의 뮤직비디오들이 나오기 전에도 부의 과시는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그것은 각 음악인들의 출신이나 성장 배경 안에서 존재했다. 가령 런-디엠씨는 동부 특유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닥터 드레(Dr. Dre)는 서부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멋을 드러냈다. 그러나 퍼프 대디가 선보인 자본의 힘은 그와는 다른, 좀더 막연한 종류였다. 배드 보이 레코즈의 비디오들은 뉴욕뿐만 아니라 캘리포니아, 플로리다, 시카고 등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부는 만화적 상상력을 타고 과장되게 표현되었으며, 현실은 까맣게 잊혔다. 문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순수한 기표로서 작용했던 것이다. 이 모든 현상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겠지만, 퍼프 대디는 이미 이조차 훌륭하게 해낸 바 있다. 그의 "Bad Boy for Life"에서 퍼프 대디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내가 라임을 쓰냐고 묻지마. 나는 수표에 내 이름을 쓰거든.' 예술이다.

     


     

    몇 년 전 유튜브에서 랩퍼 릴 부시(Lil Boosie)가 등장하는 비디오를 본 적이 있다. 그는 주차장 바닥에 주저앉아 돈을 세고 있었다. 현대 행위 예술에 대해 나는 잘 알지 못하지만, 그중 무엇도 비디오 속 릴 부시의 모습보다 기괴할 수는 없었다. 돈은 순수한 관념처럼 그 안에서 표현되었다. 무엇인가를 사는 데에 쓰이는 대신, 돈은 단순히 바닥에 던져지고 있을 뿐이었다. 한 장씩, 한 장씩. 그리고 지폐 한 장이 바닥에 던져질 때마다 그것이 가리키는 메시지는 더욱 명확해졌다. 이것은 당신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 이만큼 많은 100달러 지폐는 당신에게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당신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의 글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제이 지와 칸예 웨스트의 "Otis" 비디오에 관한 것이다. 스파이크 존즈(Spike Jonze)가 감독한 이 비디오에서 칸예와 제이 지는 어느 공장 같은 곳에서 메이바흐(부가티와 마찬가지로, 엄청나게 비싼 차라고 한다)를 부수기 시작한다. 4명의 모델을 뒷자리에 태운 채 한 바퀴 돈 다음에 말이다. 그들이 진짜로 부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자동차? 혹은 자동차라는 개념? 다른 비디오에서 비싼 차들이 가지는 상징성? 그리고 그 파괴 행위가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들이 그만큼 잘 산다는 인식? 자신들은 그런 차나 돈 따위보다 더욱 쿨하고 멋지다는 뜻인가? 혹은 예술은 언제나 공장에서 찍어내는 그런 물건들을 배격하고, 재해석해야 한다고 그 비디오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가? 그 차는 경매에서 팔렸으며 수익금은 동아프리카의 가뭄을 돕기 위해 기부되었다고 한다. 정말이지, '먼 데에서 일어나는 유령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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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i boy (2014-06-07 13:37:08, 119.207.60.***)
      2. 과거 갱스터 랩들 부터 지금 돈자랑 스웨깅 까지 결국 모두 힙합이란 창을 통해본 솔직한 저희 사람의 모습인 것같습니다. 예쁘고 멋지게 꾸미려는 다른 문화들보다, 솔직한 자기 본능이나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힙합이 오히려 더 순수한 문화이지 않나 싶네요. quetlove는 이러한 힙합의 흐름을 어떻게 해석할지 다음 에세이들이 너무 기대됩니다.

        정말 이 에세이 좋습니다. 이런 진지한 글들 많이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얼른 저도 영어실력을 늘려서 이런 글들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많이 번역해서 보여주고 싶네요.
      1. Qwer (2014-06-06 11:51:45, 180.230.97.***)
      2. 힙합의 타락에 일조하고 있는 인간들..
      1. 해방 (2014-06-03 15:02:29, 110.70.52.***)
      2. 잘 보았습니다. 다음 편도 어서 보고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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