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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내 리뷰] 제리케이 - 현실, 적
    rhythmer | 2014-10-19 | 20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Artist: 제리케이(Jerry.k)
    Album: 현실, 적
    Released: 2014-09-23
    Rating:
    Reviewer: 강일권









    사회와 정치적 이슈에 시선을 들이대는 랩퍼가 현저히 부족한 한국힙합 씬에서 제리케이(Jerry.k)는 유일하다 싶을 정도로 꾸준하게 문제의식을 드러내왔다. 그는 한국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파고들어 그 안에 도사린 여러 문제점과 치부를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물론, 그것이 장르적 완성도와 매번 차진 궁합을 선보인 건 아니었지만, 그의 행보는 깊은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으며, 그 결과 제리케이는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는 이번 세 번째 정규작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자신의 성향과 문제의식을 표출한다. 빚과 실업 문제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비극, 비정규직, 최저임금, 부패한 언론과 정치계, 노동자 파업, 그리고 최근의 세월호 사건 등등, 중요한 거의 모든 이슈를 다루는데, 여기서 본작이 다루는 주제에 대한 비교 대상 자체가 부족하다고 하여 과대평가하는 건 경계해야 할 지점이다. 관건은 이것이 얼마나 잘 표면화되고 음악적 완성도가 담보되었느냐이니까 말이다.

     

    앨범에서 가장 눈여겨 봐야 할 지점은 제리케이가 주제를 드러내는 화법이다. 이는 미국 힙합 씬의 예를 대입하면, 좀 더 흥미롭게 파악할 수 있을 듯하다. 미국 랩퍼들이 블랙 커뮤니티 안의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보편적인 기준의 올드 스쿨(‘80년대부터 ‘90년대 초반) 시절에서 뉴 스쿨(‘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시절로 넘어오며 점점 바뀌는 경향을 감지할 수 있다. 전자가 블랙 커뮤니티 전체를 대변하는 입장에서 문제 자체를 끄집어내어 직설적으로 비판하며 청자의 각성을 요하는 방식을 취했다면, 후자는 전체보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삶을 개인적인 관점에서 풀어내는 가운데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을 흩뿌리는 방식을 취한다. 엄밀히 따지자면, 아무래도 뉴 스쿨식이 기술적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간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여기엔 각각 일장일단이 있다. 올드 스쿨식은 주제를 최대한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고 직접적으로 와닿는 쾌감을 선사할 수 있지만, 너무 투박하기만한 무드의 형성과 라이밍 자체가 주는 맛이 덜하고, 뉴 스쿨식은 더 세련된 무드와 라이밍 자체가 주는 쾌감이 상당하지만, 주제의 핵심을 알아차리지 못 하거나 인식하는 강도가 약해질 수 있다. 그리고 제리케이가 본작에서 한국사회 곳곳의 치부를 끄집어내어 공론화하고 비판하는 투는 전자의 방식에 가깝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앞서 언급한 전달 방식의 변화가 단지 시간의 흐름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그 나라의 시대적 상황이 어떠한가와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미국의 블랙 커뮤니티가 겪어온, 또는 겪는 현상과 한국인이 겪는 현상은 여러 면에서 다르고, 자연스레 그 구성원인 랩퍼가 주제를 구체화하는 방식과 그걸 청자가 받아들이는 정도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실제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리케이가 취한 화법은 현재 한국에 사는 청자들에게 다가가는 방식으로써 적절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도입에서 얘기했던 제리케이가 사회와 정치적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의 유일한 랩퍼라는 현실 때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제리케이의 직선으로 밀어붙이는 화법은 오늘날 미국 사회파 랩퍼들의 은유적이고 단편적인 전달 방식에 익숙한 청자들에게도 통쾌함을 선사할만한 지점을 여럿 만들어내는데, 비릿한 정부와 그런 정부의 입으로 전락한 언론 매체를 조롱하며, 거침없이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는 다 뻥이야는 대표적인 예다.

     

    제리케이도 적극 관여한 프로덕션과 조화도 괜찮다. 특히, TDE 소속 아이사야 라샤드(Isaiah Rashad)의 앨범에 참여한 바 있는 대니 디(Danny Dee)의 비트가 집중된 초·중반부(4 – 9)의 일관된 무드가 중심을 잘 잡아준다. 대니 디는 현 미국 메인스트림 힙합의 트렌드인 쓸쓸한 스네어와 멜랑콜리한 사운드를 조합한 비트를 주조했는데, 잉여의 삶으로 내몰린 청년의 너절한 일상과 그의 삐딱한 눈을 통해 실업 및 노동자 파업 문제를 되짚는 배부른 소리”, 스마트폰 시대에 직접적인 대화가 사라진 현상을 꼬집는 묵념”,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에 대한 근거 있는 반박이라 할 수 있는 해커스와 시크릿등은 가사와 무드가 인상적으로 맞물린 곡들이다. 그 사이에서 제리케이가 작곡과 편곡을 모두 맡은 대출러브도 오밀조밀한 칩튠(chiptune) 사운드와 비유적인 가사, 그리고 디씨(D.C)의 맛깔스러운 보컬이 어우러지며 재미를 안기고, 프로덕션 특성상 이질적일 우려가 있었던 먼지 쌓인 기타역시 김박첼라의 편곡과 전천후 아티스트 정차식의 허무함 짙은 보컬이 만나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다만, 이러한 장점 이면으로 현 한국힙합의 주요 팬층과 대중이 음악 속에 숨은 주제까지 파악할 겨를이 부족하다는 현실을 고려하더라도 제리케이의 화법이 때때로 듣는 재미를 반감시킨다는 사실 또한, 부정하긴 어렵다. “다 뻥이야처럼 직설의 쾌감을 안기는 트랙이 있는 반면, 다소 건조한 논설에 그치는 지점도 있다 보니 은유나 함축적인 묘사 뒤에 숨어있는 주제를 알아차렸을 때 느낄 수 있는 짜릿한 감흥이 부족한 것이다. 더불어 종종 이야기를 위해 사용된 단어들의 과잉 탓에 플로우가 어긋나기도 한다. 사실 이는 그의 결과물에서 이전부터 엿볼 수 있는 아쉬움이었다. 그럼에도 앞으로 이 부분이 계속 그의 발목을 잡을지, 또 다른 방향에서 쾌감을 안기게 될지는 예상하기 어렵다.

     

    데뷔 이래 제리케이는 그저 듣는 즐거움과 공감하는 걸 넘어 그가 끄집어낸 여러 사안에 꾸준히 관심을 기울여줄 것을 권유해왔다. 이번 앨범은 그러한 제리케이의 랩퍼로서 정체성과 힙합관이 가장 격렬하게 담겼으며, 전체적으로 탄탄한 음악적 구성이 뒷받침되어 이것이 효과적으로 빛을 발한 작품이다. 때때로 많은 것을 담아내고자 하는 아티스트의 욕심이 완성도에 흠집을 내는 경우도 많은데, 이번엔 제리케이의 욕심이 적절하게 긍정적으로 작용한 듯하다. 비록, 음악적으로 아쉬운 점은 있으나 [현실, ]이 현 한국힙합과 사회의 상황에서 듣는 이에게 울림을 주는 준수한 힙합 앨범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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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ruce Mighdy (2014-10-21 22:24:01, 58.123.207.**)
      2. 노랫말은 지극히 현실..적이었음으로 인해, 청취 내내 뼈아픈 현실을 벗어나게 하지 않았던.. 외면할 수 없었던 자아와 사회의 정체성을 자각할 수 있었던 작품..(앨범이 지닌 가사 속의 주제의식과 프로덕션의 조금은 맞지 않았던 균형이 아쉬웠던 작품)
      1. 윤정준 (2014-10-20 00:56:07, 61.102.87.***)
      2. 이제는 제리케이 아니면 누가 이런 주제들을 제대로 얘기해줄 수 있을까 싶습니다.
        가사의 주제, 의미, 깊이, 몰입도는 역시나 뛰어나네요.
        그런데 곡들 자체의 매력은 마왕, Trueself 앨범보다 약간은 아쉽네요.
      1. sodgh (2014-10-19 23:24:43, 222.233.5.***)
      2. 한국사회의 어두운 면을 소재로 활용하는 것부터 그 소재를 명확하게 풀어내는 능력까지 정말 독자적인 랩퍼죠. 저 또한 듣는 재미가 조금 떨어지는 측면이 아쉬웠지만, 그의 음악이 지닌 매력은 여전히 유효하기에 즐겨듣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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