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버벌진트 X 산체스
Album: 여자
Released: 2015-08-31
Rating:
Reviewer: 이병주

버벌진트(Verbal Jint)라는 이름을 통해 떠올리게 되는 음악이 어느새 많이 변했다. 최근의 커리어를 보자면, 그가 향하는 방향도 명확해 보인다. 그 사이 그의 음악이 내뿜던 아우라는 줄어들었고, 개성 역시 조금은 흐려졌다. 그래도 비트의 형식과 무드를 가리지 않고 적응해 내뱉는 그의 랩만은 여전하단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음악에서 드러나는 그의 감성적인 면모도 다양한 루트를 통해 충분히 알려졌고 말이다.

앨범 소개에서는 음악 감독 버벌진트라는 면을 부각하고 있지만, 실제론 래퍼 버벌진트의 모습이 가장 강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기술적인 부분과는 별개로, 상당히 상투적인 표현이나 과거에 사용했던 표현의 반복에 머무르는 가사들이 전반적으로 아쉽다. 또한, 여러 동료들과 협업을 통해 완성한 비트들은 전형적인 틀을 어느 정도 벗어나긴 했지만, 더 나아가 특징적인 면모를 드러내지는 못하고 있다.

특히, 타이틀곡인 “Favorite!”은 아주 안 좋은 예다. 실제로 그들이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이 노래에선 프린스(Prince)의 히트 싱글 “Kiss”의 강력한 영향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 레퍼런스였든, 오마주였든 간에 결과물은 민망할 정도다. 특정 부분, 혹은 요소만을 가져오거나 재해석한 것도 아니며, 영감을 받아 방향을 맞춰 창작한 것도 아니다. 과거에 발표된 곡의 뼈대를 놓고, 해당 곡의 많은 부분, 심지어 보컬 스타일까지 그대로 가져와서 완성된 곡이다. 창작자가 고를 수 있는 가장 안 좋은 선택지를 향해 간 케이스라 할 수 있다. 과거 EP 앨범에 수록되었던 원곡 “Favorite”이 매력 넘치는 곡이었단 점을 떠올려보면 더욱 아쉽다. “My Type 2.5” 역시 만듦새는 지루하고, 의도도 불명확해 카피 논란이 있었던 원곡의 명예를 회복하긴 어려워 보인다.

그래도 앨범이 빛을 발하는 순간은 후반부이다. 남성을 대상화하고 성관계만을 찾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에 힙합 음악과 문화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낸 “싫대”나 EXID의 “위아래”를 모티브로 삼아 성적인 코드를 상당한 수위로 녹여낸 “귀아래”는 앨범의 하이라이트이다. 특히, “귀아래”는 여러 표현 방식 자체도 즐겁지만, 영감을 받은 소스를 창작으로 이어가 풀어내는 방식이 위에서 언급했던 타이틀곡의 그것과는 확연하게 달라서 비교된다. 혈기왕성하던 과거 “Sex Drive”와 같은 곡들을 냈던 버벌진트가 더 성숙해져서 유사한 이야기를 적절한 강도와 세련된 표현으로 풀어낸 지점이 흥미롭다.

창작의 의도나 방향에서부터 박수를 보내기 어렵게 하는 타이틀 곡이나, 익숙한 표현 방식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여자]는 비록 형식적인 완성도는 이전보다 높아졌을지 몰라도, 창작물로서 고유한 가치가 떨어진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 앨범에서 버벌진트가 음악 감독으로서 보여주는 역량이 대체 무엇인지 물음표가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