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리뷰] 그랙다니 - 8luminum
- rhythmer | 2017-11-22 | 5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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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그랙다니(Grack Thany)
Album: 8luminum
Released: 2017-11-03
Rating:
Reviewer: 황두하
크루 그랙다니(Grack Thany)는 ‘대안적 힙합 음악’을 전면에 내세운 집단이다. 그들은 사운드적으로나 가사적으로 한국 힙합의 주류와는 거리를 두어왔고, 이는 그동안 멤버들의 작업물을 통해 잘 드러났다. 올해 초 랩퍼 B.A.C와 프로듀서 사일러밤(Sylarbomb)으로 이루어진 듀오 TFO가 발표한 [ㅂㅂ]는 대표적이다. 잘 설계된 공간감과 종잡을 수 없는 변주가 어우러진 사일러밤의 프로덕션은 탄탄했고, 그들이 추구하는 ‘대안’에 설득력을 부여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한국 힙합을 향한 직접적인 조롱 가득한 가사와 설익은 랩 사이의 간극은 아쉬움으로 남았다.그랙다니의 첫 번째 컴필레이션 앨범 [8luminum]은 TFO의 사일러 밤이 디렉팅을 맡았다는 점에서 이목을 집중시킨다. 크루의 멤버가 랩과 프로덕션에 고르게 참여한 만큼 그들이 기존에 추구하던 것들을 압축해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런데 우선 ‘대안적인 힙합 음악’에 관해 짚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이들이 따르는 음악적인 양식, 즉, 샘플링 원곡의 루프에 기대거나 랩과의 조화를 고려하는 전통적인 힙합 프로덕션과 달리 소리의 해체와 조합에 집중하는 방식은 이미 미 힙합 씬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스타일이다.
특히, ‘90년대만 해도 별종처럼 여겨졌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물론, 여전히 데스 그립스(Death Grips)처럼 비주류에 머무는 팀도 있으나 런 더 쥬얼스(Run the Jewels)만 해도 메인스트림에서의 이름값이 높다. 그렇기에 한국 힙합으로만 범위를 축소한다면, 분명 새로운 시도라 할 만하나 결국, 중요한 것은 완성도 면에서 얼마나 설득력이 있느냐일 것이다. [8luminum]에 대한 감흥의 정도도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출발한다.
일단 크루의 프로듀서들을 비롯하여 외부 프로듀서까지 참여한 프로덕션은 트랙마다 완성도의 격차가 크다. 행인(HNGIN)이 주조한 첫 번째 트랙 “폭파”는 노이즈 소스들로 리듬 파트를 쌓아가며 형성하는 공간감이 인상적이다. 그 완성도가 좋아 단숨에 몰입하게 한다. 더불어 핵심 프로듀서라 할 수 있는 사일러밤의 “Bomb”과 션만(Syunman)이 만든 두 곡, “정신”과 “포물선”의 감흥도 상당하다. 소리의 조합과 리듬의 변주가 주는 쾌감이 얼터너티브 힙합의 참맛을 잘 전달한다.
하지만 이 외의 곡들은 ‘대안’이란 수식이 무색할 정도다. 일례로 하이라이트인 “폭파”에 이어진 “50M BASS”는 단조로운 신시사이저와 808드럼 특유의 텅 비어있는 듯한 질감의 조합이 설익어서 의도한 듯한 감흥을 전혀 살려내지 못했으며, 많은 곡이 개인 앨범에서 보여준 것들의 다운그레이드 버전 같은 인상이다. 무엇보다 아쉬운 건 여전히 드러난 프로덕션과 랩 퍼포먼스의 불균형이다. 크루의 랩퍼들인 반다(Vanda), B.A.C, 몰디(Moldy)의 랩은 공격적이지만, 대체로 단조롭고 딱딱해서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한다.
그나마 “Traffic Overhead”와 “Concrete”에서 몰디의 퍼포먼스가 준수한 편이지만, 랩이 주는 쾌감은 여전히 부족하다. “정치인”에서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피쳐링 게스트 영쿡(Youngcook)의 퍼포먼스가 앨범을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다. 물론, 실험적인 사운드를 시도한 힙합 음악에서 종종 랩이 프로덕션의 일부로 작용하여 퍼포먼스 자체가 중요치 않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것이 잘 어우러졌을 때의 얘기다. [8luminum]에선 오직 “정신”만이 그 예라 할만하다. 가사도 아쉽다. 공격적이고 위협적인 기운을 풍기지만, 대상이 모호하고, 알맹이 없이 현학적인 표현으로만 일관하여 가사적인 쾌감을 느낄 수 없다. 일부에서 느껴지는 의도적인 덤다운(Dumb-Down) 가사도 마찬가지다.
[8luminum]은 그랙다니라는 크루의 방향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일부 멤버의 장점을 보여주는 동시에 한계 또한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앨범이다. 한국 힙합 씬은 매년 ‘레퍼런스 논란’이 반복될 정도로 미국 메이저 씬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 중이다. 그런 만큼 유행에 따라 한 가지 스타일에 치중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와중에 한국 힙합의 주류와 거리를 두고 대안적인 음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의 행보 자체는 주목할만하다. 그러나 완성도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들의 움직임이 설득력을 갖기 어려우며 또 다른 ‘레퍼런스 작품’으로 비칠 가능성이 높다. 여러 가지 면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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