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리뷰] 크러쉬 - From Midnight to Sunrise
- rhythmer | 2020-01-24 | 9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
Artist: 크러쉬(Crush)
Album: From Midnight to Sunrise
Released: 2019-12-05
Rating:
Reviewer: 황두하
2010년대 초 자이언티(Zion T)와 함께 등장한 크러쉬(Crush)는 이제껏 한국 알앤비 씬에서 볼 수 없었던 스타성과 음악적 감각을 지닌 아티스트였다. 그런 그가 2014년에 발표한 첫 정규 앨범 [Crush On You]는 알앤비의 다양한 하위 장르를 끌어안고, 매끈한 멜로디 라인과 안정적인 퍼포먼스로 마감한 수작이었다. 이후로도 그는 다수의 EP와 싱글을 발표하며 탄탄한 커리어를 이어나갔다. 특히, 대중적인 팝 소울로 노선을 정한 자이언티와 달리, 다양한 색깔의 알앤비를 탐구하며 장르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인상적이었다.싸이(Psy)가 설립한 레이블 피네이션(P.Nation)으로 둥지를 옮기고 발표한 두 번째 정규 앨범 [From Midnight to Sunrise]는 이러한 행보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다. 디지털 가공된 악기와 808드럼을 앞세워 트렌디한 사운드를 선보였던 전과는 다르게 트랙마다 세션을 동원한 리얼 악기를 활용하여 풍성한 사운드를 담아냈다.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스트링과 호른 연주가 돋보이는 재즈풍의 인트로 트랙 “From Midnight to Sunrise”는 이러한 앨범의 성격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빈티지한 질감의 신시사이저를 적극적으로 운용하고 1980~’90년대풍 알앤비 발라드의 틀을 빌려 복고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것도 본작의 특징이다. 밴드 원더러스트(Band Wonderlust)의 연주와 비트박스가 어우러진 “Wonderlust”, 후반부의 상승하는 신시사이저가 벅찬 감정을 느끼게 하는 “With You”, 드럼 없이 피아노와 스트링만으로 단출하게 진행되는 “Alone”까지 이어지는 구간은 대표적이다. 이처럼 트렌드를 역행하는 프로덕션은 크러쉬 특유의 풍부한 코러스 어레인지와 매끈한 멜로디와 매우 잘 어우러진다.
다만, 귀를 확 잡아끌지 못하는 것은 아쉽다. 캐치한 멜로디가 부족하고, 다소 관성적으로 구성된 곡이 중간중간에서 몰입도를 떨어트리는 탓이다. 일례로 디피알 라이브(DPR Live)와 함께한 미디엄 템포의 “티격태격”이나 앨범 내에서 가장 댄서블한 리듬을 가진 “Ibiza”는 지난 히트곡들의 다운그레이드 버전 같은 느낌이 강하다.
가사도 아쉽다. 하루의 시작부터 끝까지 일어나는 일들을 순차적으로 담아냈는데, 어디서 들어본 듯한 뻔한 표현과 의미 없는 영어 가사로 일관해 흥미를 떨어트린다. 연인 간의 귀여운 다툼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티격태격”이나 자신의 음악이 옷처럼 사람들에게 기억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Cloth”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귀에 남지 않고 흘러가 버린다. 마지막 트랙 “잘자”에 참여해 특유의 표현력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 자이언티를 생각하면 더욱더 아쉬워지는 부분이다.
한국 알앤비 씬의 최전선에 서 있는 크러쉬가 트렌드와는 거리가 먼 음악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From Midnight to Sunrise]는 의미가 있다. 장르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도 긍정적이다. 그러나 거꾸로 말하면, 크러쉬의 목소리로 복고풍 알앤비를 소화해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뜻도 된다. 장르에 대한 애정이 음악적 완성도로 이어지지 못한 탓이다. 직전에 싱글로 발표했던 “나빠(NAPPA)”처럼 분위기를 환기해줄 만한 곡이 수록되지 않은 것도 아쉽다. 본작은 세련되고 깔끔한 사운드가 무조건 좋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