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리뷰] 유라 - Gaussian
- rhythmer | 2021-02-16 | 12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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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유라(youra)
Album: Gaussian
Released: 2021-02-02
Rating:
Reviewer: 김효진
유라는 난해한 가사를 쓴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그 사람 입술이 4개, 눈이 4개, 모든 게 다 4개’(“식탁”), ‘지나가 딜레마 속에 박자에 맞춰 눈을 감던 매 순간의 모순들 안에서’(“L”). 마구 적힌 낙서 같기도, 물건의 쓰임새를 잊게 만드는 초현실주의 미술 작품 같기도, 몽타주를 활용해 빠른 리듬으로 편집한 영상 같기도 하다(*필자 주: 몽타주는 쇼트를 여럿 이어 붙여 제3의 의미를 창조하는 영화 편집 용어다.). 감정과 정신의 무질서를 그대로 표현한다. 이러한 혼란은 도리어 그를 궁금하게 만들고 그의 세계에 진입하고 싶은 마음을 샘솟게 한다.이러한 유라의 표현법은 새 EP [GAUSSIAN]에서도 강점으로 작용한다. 그는 상징어를 거침없이 나열하고 인식의 편린들을 늘어 놓는다. 유라가 재정의한 “미미(MIMI)”와 동음이의어인 미미(微微)를 활용해 그리운 감정을 만들어 내고, 우울한 블루(Blue)와 반대인 상징색 “분홍(PINK!)”으로 낙관적인 상황을 꿈꾸기도 한다. 가짜의 형상으로 ‘얼룩말’을 등장시키는 등(“손가락으로 아 긋기만 해도 (ZEBRA)”), 유라는 시각적 심상을 가사 속에 예민하게 녹여낸다.
시각적 공통점을 활용해 감정을 자아내기도 한다. “하양(RAL 9002)”의 하얀색이 그렇다. 하얀색은 내리는 눈, 하얀 머리카락, 하얀 눈동자를 모두 함의한다. 나아가 하얀 눈이 까맣게 녹아 사라지는, 검은 머리가 하얗게 세다 사라지는, 결국 ‘남은 것은 이제 없는’ 허무함과 공허함을 뜻하기도 한다. 부제인 ‘RAL 9002’는 회색에 가까운 하얀색의 색상 코드다. 시각적 요소를 한 데 모아 한 시절이 허물어지는 무상함을 진하게 돋을새김한다. 그의 가사에 빠질 수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다.
이 같은 가사의 장점을 더욱 와닿게 하는 건 탁월한 보컬 덕이다. 유라가 표현하고자 했다던 고민과 소회에 몰입하게 한다. 몽환적이면서도 음울이 밴 듯한 목소리는 그가 전하고자 하는 것들에 귀 기울이게 한다. 피비알앤비(PBR&B), 하우스(House), 얼터너티브 록(Alternative Rock)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 독특한 음색으로 존재감 강한 목소리를 훌륭히 활용한다.
그러나 다채롭게 구성한 프로덕션이 집중을 방해하기도 한다. 특히, “미미(MIMI)”에서 “분홍(PINK!)”으로 넘어가는 구간이 그렇다. 전자와 후자가 이질적인 장르인 상황에서 매개 요소가 없다보니 뒷곡이 앞선 곡의 여운을 해친다. 신스 베이스와 기타 사운드를 적절히 운용한 “손가락으로 아 긋기만 해도 (ZEBRA)”와 둔탁한 드럼 베이스로 주술적인 분위기를 살린 “숨을 참는 괴물 (AIRPLANE MODE)” 등 트랙들이 개별적으로 준수한 완성도를 갖고 있어, 그러한 배치가 더 아쉽다. 전체적으로 유기성이 조각난 느낌이다.
‘어림잡아 30cm 정도’ 잘랐다는 그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 ‘가장 쓸모없고 거슬리는’ 머리카락부터 잘랐다고 밝혔다. 머리카락은 고민의 시간만큼 자라 몸에 붙는다. 몇 해 전 내 머리를 30cm 정도 잘라내고, 잘린 머리 뭉텅이를 한참 바라봤던 때를 기억한다. 그 이후로 내가 가진 것들 - 시간, 마음, 감각, 의식 - 이 조금씩 달라졌다. 유라도 그랬을지 모르겠다. 그는 본작 안에 잘라놓은 번민을 뭉쳐 놓고 빤히 마주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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