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리뷰] 우건 - 개소년
- rhythmer | 2021-11-15 | 30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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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우건
Album: 개소년
Released: 2021-08-19
Rating:
Reviewer: 강일권
한국 힙합은 [쇼미더머니], 그리고 CJ ENM과 이해관계로 얽힌 집단이 헤게모니를 장악한 판을 중심으로 흘러왔다. 주류 시스템 안에 든 래퍼들이 부와 인기를 자랑하고 밑바닥으로부터의 성공 서사를 전시하는 동안 밖에 있는 래퍼들은 염세와 냉소를 가사적 원천으로 삼았다.자의든 타의든 주류 시스템에 속하지 않은 그들 대부분의 음악에선 공정하지 못한, 혹은 왜곡된 한국힙합 시장에 대한 분노와 비판이 들끓는 동시에 주류 편입에 대한 욕망, 인정욕구, 자기비하 등이 어지럽게 뒤섞인다. 우건의 새 믹스테입 [개소년]도 그렇다.
2020년에 데뷔 싱글을 발표한 우건은 힙합 커뮤니티에서조차 생소한 이름이다. 1년 사이에 EP와 믹스테입(Mixtape)을 냈지만, 반응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여러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의 래핑이 불안정하거나 매력적이지 않아서일 수도, 가사가 인상적이지 않아서 일 수도, 홍보가 되지 않아서 일 수도, 애초에 힙합 팬들이 주류 래퍼의 음악 외에 찾아 듣는 걸 소홀히 해서 일 수도 있다.
원인이 무엇이었든 간에 우건이 맞닥뜨렸을 현실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개소년]은 그 중심에서 복잡한 심경을 치열하게 기록해놓은 노트 같다. 앨범 전반을 감싼 정서는 비관적, 염세적이다. 인트로성 트랙인 "싼타페"를 지나 아스라이 흩어지는 기타 리프가 온화한 무드를 자아낸 "술래"로 시작하지만, 곧 3번 트랙 "염세"부터 [개소년]의 진짜 성격이 드러난다. 앨범이 마무리될 때까지 음악은 우건의 습기 찬 과거와 갑갑한 현실, 그리고 불투명해 보이는 미래 사이를 오가며 탁한 공기를 잔뜩 만들어낸다.
그가 분노하고 냉소하는 대상을 명확하게 확신할 순 없으나 작품 속에서 취한 태도, 내뱉는 말의 배경, 처한 현실만큼은 꽤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우건은 한국 힙합과 한국 사회 양쪽에서 변방에 속해있다. 그는 비관적 현실을 삐딱하게 마주한 채 은유 속에 쓴 말들을 숨겨놓거나 앞서 언급한 한국 힙합의 현실 속에서 드러나는 몇 가지 모순을 예리하게 짚어낸다. 앨범을 통해 토로하는 이야기들은 다른 변방 래퍼들에게서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지만, 우건이 구사하는 래퍼의 언어는 몰입하게 하고 설득한다. 번뜩이는 라인도 많다.
'우린 마네킹 사이즈만 다르지, 이상과 현실의 사기 행각을 본 뒤, 허벌나게 뜀박질해도 제자리', '목표는 사람구실 뱀새치 혀라도 키울래, 믿음은 지랄 너넨 십일조를 원했어, 중학생들에겐 꽤 역겨운 멘트였네', '네게 씨알만큼도 떨어지지 않을 돈을 쫓는 것과 갈 길을 제시하는 것 중 뭐가 더 개같지', '문화에 발을 담근 내게, 유턴을 권해, 난 개처럼 짖어도, 항상 목줄은 내 손에' 등등.
랩 퍼포먼스가 훌륭하기에 가사에서의 성취가 의미 있다. 전작까지 비트에 좀처럼 달라붙지 못하고 겉돌던 것과 전혀 다른 수준이다. 이전의 잔상이 다소 남아있는 "술래"를 제외하면, 모든 곡에서의 퍼포먼스가 탄탄하다. 특히 "염세"와 "개같이"는 압도적이다. 리듬 위에 안정적으로 올라탄 다음 제대로 된 타격을 가한다. 이 두 곡이 무게중심을 잡아주는 "염세" - "미아" - "벌떼" - "꽁지" - "개같이" 라인에서 감흥은 절정에 이른다.
전작 [981016]에서 호흡을 맞춘 프로듀서 음제이드플랜트(umjadeplant/*주: 정보가 없어서 한글 표기명이 맞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의 비트가 가장 돋보이는 것도 이 구간이다. 붐뱁, 얼터너티브 힙합, 트랩 뮤직을 넘나들며 자아낸 습하고 침잠된 무드의 프로덕션이 단도처럼 파고드는 랩과 어우러져서 끊임없이 음악 속으로 끌어당긴다.
특히 건반 활용이 감각적이다. "염세"에서는 둔탁한 질감이 강조된 드럼 사이로 찰나에 굴러떨어졌다가 빠지며 불길한 기운을 조성하고, "미아"에서는 오밀조밀하게 짜인 멜로디 라인을 주도하는가 하면, "꽁지"에서는 변주까지 이루어지며 곡의 무드를 지배한다. 앨범 전체에 탁월한 비트를 깔아놓은 음제이드플랜트는 우건 못지않은 발견이다.
가장 아쉬운 건 게스트 무어(MOORE)와 블루박스(Blueboxxx)가 함께한 곡들이다. 우건과 전혀 다른 톤과 플로우의 랩이 분위기를 환기하는 것도 잠시, 순간순간 흔들리는 퍼포먼스와 스타일의 과잉 탓에 건조하고 타이트하게 조이는 랩을 통해 그동안 쌓인 앨범 특유의 압박감 있는 무드가 깨져버렸다.
"자체검열"은 가사도 치명적이다. 블루박스의 랩은 개성 있지만, 설리의 비극적인 죽음을 끌어온 라인은 경솔해보이고, 키보드워리어를 향한 원색적인 분노로 귀결된 가사 또한 감흥을 저해한다. 두 곡은 하이라이트 구간이 끝난 뒤 연속되다 보니 더욱 극명하게 비교된다.
올초 사운드클라우드에서 공개한 트랙의 제목을 타이틀로 내세운 [개소년]에서 우건의 변화는 놀랍다. 적확하게는 발전이란 표현이 맞겠다. 싱글 몇 개가 아닌 앨범 단위의 결과물을 발표해온 아티스트의 역량이 이처럼 눈에 띄게 달라진 경우는 몹시 드물다. 전작 [Sogoodsobad]와 [981016] 때에도 주제를 풀어내는 솜씨는 주목할만했다. 그러나 아티스트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느껴질 만큼 느슨한 래핑 탓에 큰 감흥을 느끼긴 어려웠다. [개소년]에서는 이상의 단점이 사라졌다.
주류 시스템 밖에서 푸념, 혹은 냉소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미국 힙합을 통해 숱하게 접한 재력 과시의 하위 버전 같은 돈 자랑 가사보다(*모든 돈 자랑 가사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훨씬 흥미롭다. 아무래도 특수한 상황 아래 흘러가는 한국 힙합에서만 도드라지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저들도 시스템의 수혜를 입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변할 거란 주장은 무의미하다. 앨범은 당시의 기록이기에 미래는 현재의 감상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물론, 랩과 가사에서의 완성미가 뒷받침되었다는 걸 전제로 했을 때의 얘기다. 우건의 [개소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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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lueboxxx (2021-11-15 19:54:46, 61.79.182.***)
- 경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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