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리뷰] 베이빌론 - EGO 90’s
- rhythmer | 2022-08-05 | 17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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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베이빌론(Babylon)
Album: EGO 90’s
Released: 2022-07-19
Rating:
Reviewer: 김효진
[EGO 90’s]의 가장 큰 특징은 근사한 플레이팅에 있다. 마치 핀셋으로 시간의 결을 조심스레 떼어 와 한 겹 한 겹 섬세하게 덧붙여 또 다른 시간의 물결을 만들어 놓은 듯하다. 앨범명에 특정 연대를 명확하게 표기한 만큼 90년대를 풍미한 알앤비 음악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하여 배치했다. 확실히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앨범이다.그래서 [EGO 90’s]에는 낯익음에서 비롯된 편안함이 존재한다. 컨템퍼러리 알앤비, 슬로우잼(Slow Jam), 뉴잭스윙(New Jack Swing), 네오 소울, 알앤비 발라드 등 익숙한 스타일의 음악이 제 향기를 스친다.
이를테면, 앨범 초반에 배치된 “잘 어울려”와 “커튼 사이로”는 앨리샤 키스(Alicia Keys)의 “If I Ain’t Got You”를 차분한 무드로 해석해 놓은 소울 음악 같고, 브라운 아이드 소울(Brown Eyed Soul)의 영준이 함께 부른 “나보다 그대를”은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의 “I Look To You”를 잔잔한 흐름으로 구축한 것 같다.
“하루일과”도 그렇다. 솔리드의 “이 밤의 끝을 잡고”와 “끝이 아니기를”의 무드가 스치지만, 베이빌론만의 담백함이 드러난다. “블루하트”에서도 이현도의 “무한”과 듀스의 “굴레를 벗어나” 등, 이현도가 구사하던 익숙한 비트가 들리지만, 베이빌론의 뛰어난 가창이 더해져 새로운 무드를 자아낸다. 익숙한 음악이 단순하게 재조립되지 않고 영리하게 풀어져 듣는 재미가 더하다.
이는 곡 안에 숨어있는 익숙한 요소를 찾는 재미로까지 이어진다. “비가 와”에서 엄정화의 파트(‘오늘을 기다렸어 이런 날이 오기를’)는 1998년에 발표된 “초대”의 도입부 가사(‘오늘을 기다렸어 이런 밤이 오기를’)를 차용했고, “Do or Die”의 후반부엔 드바지(Debarge)의 “I Like It”의 후렴구 가사(‘I Like It, I Like it, I Really Really Like It’)를 차용해 반가움을 자아낸다.
이러한 요소들은 맛의 풍미를 높여주는 각설탕처럼 개별 곡과 앨범 전체의 분위기를 성공적으로 잡아주며, 눈앞에 시간의 결을 당도하게 한다. 커버 곡들도 몰입감을 심는다. 새로이 조직되면서 '덜어내기'가 느껴진 덕분이다. 이는 [EGO 90’s]에서 흐르는 시간의 물결을 잔잔히 따라갈 수 있도록 한다.
예컨대 “혼자하는 사랑(원곡: 앤)”과 “시간이 흐른 뒤”에서의 단조로운 키보드 구성이 보컬에 오롯이 집중하게 해 “혼자하는 사랑”이 담고 있는 쓸쓸한 짝사랑 메시지가, “시간이 흐른 뒤”가 품은 버석거리는 외로움이 베이빌론의 고담한 표현력과 만나 한층 더 극대화된다.
특히 “바보같은 내게(원곡: 김범수)”에서 ‘덜어내기’가 빛을 발한다. 원곡은 겹겹이 쌓인 사운드 구성이 특징적이다. 도입부에 등장하는 바이올린, 반짝거리는 사운드의 신시사이저, 토대를 잡아주는 808 베이스, 그리고 백업 코러스까지 곡을 채운다. 곡이 흐르는 내내 손에 힘을 꽉 쥐고 뜨개질을 한 목도리처럼 빈틈없이 쫀쫀하다.
그런가 하면, “바보같은 내게”는 곡을 쫀쫀하게 하는 요소가 덜어지고 신시사이저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2002년에 발표된 곡이 90년대의 향을 머금은 것처럼 느껴진다. 더불어 케이시의 참여가 곡을 더욱 탁월하게 한다. 1절을 베이빌론이, 2절을 케이시가 가창하여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두 사람의 이야기처럼 들리게 구성되었고, 후반 브릿지에서 맞물리는 두 사람의 보컬이 이별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이처럼 [EGO 90’s]는 특정 시기를 자신만의 특색으로 탁월하게 리폼해 입은 듯한 앨범이다. 그때를 향한 애정도 넘쳐 흐른다. 하지만 장점을 엿볼 수 있는 지점에서 아쉬움 또한 피어난다. 과거의 스타일을 답습한 듯한 곡이 있는 탓이다.
예를 들어 임정희의 보컬을 제외하고 원곡과 거의 동일하게 진행되는 “내안의 그대”는 앞서 언급된 커버 방식의 장점이 두드러지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불완전한 나”는 하림의 “난치병”이, “그리움”에서는 015B의 “잠시 길을 잃다”가 떠오른다.
이러한 연상작용을 더 강화하는 건 참여 진 때문이다. “불완전한 나”에는 “난치병”을 부른 하림이, “그리움”에는 “잠시 길을 잃다”를 부른 보니(BONI)가 참여했다. 의도적인 접근이었을 수도 있다. 하림과 보니 전부 90년대 알앤비와의 접점이 분명하고, 이 같은 게스트 초빙은 특정 시대의 스타일을 구현한 [EGO 90’s]의 컨셉과도 잘 어우러진다. 하지만 “비가 와”나 “블루하트”에서와 달리 그러한 장치가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진 못했다.
베이빌론은 지난해 발표한 [Hardy]를 통해 곡을 구성하는 능력과 보컬 실력 뿐만 아니라 다채로운 참여 진을 가장 어울리는 곡에 배치하는 조율 능력까지 입증했다. [EGO 90’s]에서도 그의 음악적 역량은 가감없이 드러난다.
나아가 음악을 탐구하고자 하는 욕구와 애정까지 넘쳐 흐른다. 아쉬움을 자아내는 지점마저 첫사랑을 마주해 서툴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EGO 90’s]는 그저 시대를 풍미한 음악을 탐구해 재해석한 앨범이라 정의할 수 없다. 90년대에 대한 넘치는 마음을 꾹꾹 눌러 쓴 연애 편지이자 사랑의 찬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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