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리뷰] 크러쉬 - wonderego
- rhythmer | 2023-11-29 | 52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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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크러쉬 (Crush)
Album: wonderego
Released: 2023-11-14
Rating:
Reviewer: 장준영
여느 남성 아티스트처럼 병역 의무로 활동에 제약이 생기면서, 크러쉬(Crush)는 의도치 않은 공백기를 가졌다. 그래서일까? 오랜만에 내놓은 [wonderego]엔 무려 19곡에 58분이라는, 요즘 시대에 흔치 않은 분량이 담겼다.많은 곡 수에 어울리게 그동안 해온 모든 스타일과 프로덕션을 풍성하게 구현했다. 펑키한 기타와 베이스가 청량한 사운드를 주조한 “No Break”에선 다이나믹 듀오의 랩으로 적절히 변주를 이끌어냈고, “미워 (Ego)”에선 강점인 명징한 멜로디와 아름답게 쌓은 화려한 화음, 코러스가 무척 훌륭하다.
그런가 하면, 이하이가 목소리를 더한 “Bad Habits”에선 얼터너티브 알앤비 특유의 특징을 잘 살려냈다. 90년대 힙합 소울의 감흥이 느껴지는 “A Man Like Me”, 꽉 찬 악기 연주로 장대한 시작과 끝을 만든 “흠칫 (Hmm-cheat)”과 “기억해줘 (Remenber Me)”도 흥겨움을 자아내는 순간이다.
프로덕션이 다양해지면서 보컬도 자유자재로 변모한다. 뛰어난 역량 덕분에 분위기와 내용, 그리고 곡에 맞춰 필요한 소리를 제공한다. “ㅠ.ㅠ (You)”에서 달콤하게 사랑을 속삭이며 달래다가도, “New Day”에선 리드미컬한 랩을 펼치며 자신감을 표현하고, “Me Myself & I”에 이르러 소울풀한 곡에 걸맞은 시원시원한 가창력을 뽐낸다.
차분한 곡이 주를 이루는 후반부에선 더욱더 빛난다. 재지한 편곡의 “산책 (Harness)”에선 감미로운 가성으로 완급 조절을 하며, 반대로 “She”에선 거친 어쿠스틱 기타 위로 강렬하게 보컬을 쏟아낸다. 느린 템포에 상대적으로 적은 악기에도 지루할 틈이 없다. “Nothing Else”와 “Got Me Got U”에서는 일렉트로닉 프로듀서인 마운트 엑스엘알(Mount XLR)이 참여해 앨범 내 가장 어둡고 이질적인 톤을 들려준다.
얼터너티브 힙합과 일렉트로닉을 표방한 두 곡은 효과적인 김심야의 랩과 음침하고 몽롱한 공간을 만드는 사운드 소스, 장르적 재미를 이끄는 보컬 샘플의 활용과 전개 방식이 짧은 시간에 가득 담겨 있어 무척 흥미롭다. 주도권을 게스트에게 전도하며 보컬을 부차적으로 사용하여 프로덕션에 힘을 더하는 과감한 선택도 효과적이다. 다만, 밝은 톤의 “EZPZ” 뒤로 등장하기에 앨범의 흐름을 급작스레 끊는 감이 있어 당황스럽다.
한편, 크러쉬는 본래부터 아기자기하고 디테일한 가사를 잘 써왔다. 이는 새 앨범에서도 돋보인다. 쉽고 직관적인 단어로 각운과 의미를 연결한 “미워 (Ego)”, 직장인의 고단한 심경을 디테일하게 표현한 “Monday Blues”, 감각과 관련된 단어와 함께 동음이의어를 의미와 연결한 “ㅠ.ㅠ (You)”가 그렇다. 자신에게 응원을 보내는 “나를 위해 (For Days to Come)”는 차분한 분위기와 진솔한 한국어 가사 덕에 “2411”와 같은 곡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높아진 영어 가사의 비중이 아쉽다. “Me Myself & I”, “Deep End”, “A Man Like Me”를 비롯한 영어가 주를 이루는 곡에선 평이하고 관습적인 표현이 늘어났다. 무엇보다 평소 한국어 가사보다 말맛을 살리고 소리와 의미를 영리하게 연결한 순간이 부쩍 적어진 탓에, 상대적으로 가사에서 받을 수 있던 감흥 다소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wonderego]에서 느낄 수 있는 만족감이 상당하다. 아티스트로서 뚜렷한 자아가 돌출하면서 긴 호흡에 어울리는 즐길 거리를 풍부하게 담아냈다. 잠시 비워 놓은 자신의 빈자리를 뜨겁고, 근사하게 다시 채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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