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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외 리뷰] Fliptrix - Polyhymnia
    rhythmer | 2014-10-15 | 10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Artist: Fliptrix
    Album: Polyhymnia
    Released: 2014-10-08
    Rating:
    Reviewer: 지준규









    2000
    년대 초, 디지 라스칼(Dizzee Rascal)이나 틴치 스트라이더(Tinchy Stryder) 등의 슈퍼스타들을 위시하여 맹렬히 기세를 떨치던 영국의 그라임(Grime) 씬도 어느새 그 힘을 상실했다. 그라임이라는 든든한 버팀목을 잃어버린 채 갈피를 잡지 못하던 영국의 힙합 씬은 다시 미국 힙합, 또는 미국 팝의 거대한 그림자 아래 놓이게 되었고 여전히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타이니 템파(Tinie Tempah)와 같이 뛰어난 역량을 가진 몇몇 영국 래퍼들은 나름대로 아이디어와 일렉트로닉과 결합을 통해 자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주류 음악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영국의 메인스트림에서 활동하는 힙합 뮤지션 대부분은 기존의 미국 힙합을 그대로 답습하거나 대중의 입맛에 맞춘 팝 사운드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며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한 언더그라운드 힙합 씬의 상황은 이와 약간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그곳에선 다양하고 획기적인 음악적 시도들이 쉴 새 없이 이어지며 그에 따른 높은 수준의 결과물들 역시 계속해서 발표되고 있다. 얼마 전 본인의 다섯 번째 정규 앨범 [Polyhymnia]을 발매한 플립트릭스(Fliptrix) 역시 이러한 영국 언더그라운드 힙합 씬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런던 출신의 래퍼이다. 

     

    플립트릭스는 데뷔 때부터 탁월한 실력과 개성으로 주목 받았다. 다른 이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날카로운 목소리는 어떠한 비트 위에서도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냈고, 빠르게 쇄도하는 플로우를 구사하면서도 풍부한 어휘력을 바탕으로 적재적소에 라임을 배치하여 탄력적인 그루브를 만들어 내는 그의 날렵한 래핑은 많은 힙합 팬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또한, 플립트릭스는 그동안 겪어온 폭넓은 경험들을 세련되게 풀어내는 영리한 가사와 그 안에 담긴 진중하면서도 냉철한 메시지들을 통해 자신의 통찰력을 유감없이 드러내었고 이는 언제나 진한 울림을 주었다. 그의 앨범에는 투박한 스크래칭이나 차갑고 뾰족하게 날이 선 드럼 소스들이 주로 사용된다. 하지만 메시지를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전과 다른 새로운 사운드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던 플립트릭스는 각자 다른 배경을 가진 여러 비트 메이커들과 꾸준한 교류 및 합작을 추구했고, 색다른 질감의 비트를 줄곧 탐닉한 결과, 앨범은 한층 다채로워 질 수 있었다. 이러한 적극적인 탐구 정신과 부단한 열정은 그를 런던을 비롯한 영국 언더그라운드 힙합 씬의 중요인물로 단기간에 격상시켰고, 이번 앨범 역시 이러한 그의 명성을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둔탁한 스네어와 올드 스쿨을 연상시키는 샘플링의 운용이 단번에 귀를 사로잡는 첫 트랙 “Jeheeze”가 지나고 등장하는 곡 “Praise The Sun”은 곡을 운용하는 플립트릭스의 훌륭한 재능과 독특한 음악 세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단순한 사운드들이 다양하게 중첩되며 생동감을 더하는 경쾌한 비트 위에서 그의 유려한 래핑은 역동적이면서도 안정적인 진행을 보이는데, 이는 피처링으로 참여한 래그 앤 본 맨(Rag N Bone Man)의 거칠고 허스키한 소울 보이스와 묘한 대조를 이루며 색다른 감흥을 전한다. 또한, 이 곡에서 플립트릭스는 태양을 거룩한 존재로 여기고 그에 대한 숭배를 실감 나게 묘사하는데, 기성 힙합의 주제와는 거리가 먼 종교적인 믿음과 절대적 존재에 대한 본인의 철학을 정제된 단어들로 멋지게 표현하여 신선한 매력을 풍긴다. 뒤이어 등장하는 트랙 “Polyhymnia”는 앨범을 통틀어 가장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담고 있다. 음악적 영감을 여신에 비유하고 그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플립트릭스의 메시지는 이 곡의 백미로, 으스스한 비트 위에서 음악이 본인의 인생에 있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지를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차분하게 강조하는 태도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이 외에도 강약을 반복하며 유쾌한 긴장감을 선사하는 피아노 라인과 플립트릭스의 재기 넘치는 라이밍이 만나 흥을 고조시키는 “Here Today, Gone Tomorrow”, 플립트릭스의 오랜 음악적 동료이자 이번 앨범의 메인 프로듀서인 몰로토브(Molotov)가 주조해 낸 세련된 질감의 타이트한 비트가 빛을 발하는 “Vultures”, 몽롱한 샘플 보컬과 농밀한 래핑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깊은 감상을 유도하는 “Highway Traveler” 등의 트랙들 역시 앨범에 든든한 무게감을 보탠다.

     

    플립트릭스는 이번 앨범 전반에 걸쳐 힙합 뮤지션으로서 본인이 갖고 있는 신념과 의지를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하지만 비트의 분위기와 질감을 계속해서 변화시키고 위트 가득한 각종 은유와 상징들을 가사에 적극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주제의 반복에서 올 수 있을 지루함을 슬기롭게 덜어냈고, 메시지의 전달력 또한 높일 수 있었다. 물론, 앨범에 함께 참여한 래퍼 체스터 피(Chester P)나 더 포 아울스(The Four Owls) 멤버들의 개성과 기량이 조금 더 다채롭게 발휘되어 플립트릭스와 시너지가 강했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지만, 플립트릭스가 앨범 곳곳에서 보여준 다차원적인 모습과 곡을 이끌어나가는 박력은 이를 달래기에 충분하다.

     

    플립트릭스가 데뷔 앨범을 발매한 지도 언 7년이 다 되어간다. 수준급의 완성도를 자랑하는 이번 앨범은 지난 몇 년간의 숨 가쁜 커리어를 통해 그가 얼마나 성장하고 성숙했는지를 명확히 대변한다.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독립 레이블, 하이 포커스(High Focus)의 수장이기도 한 플립트릭스는 정교함과 대담한 창작력을 무기로 현재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으며, 그의 이러한 음악적 방향성과 태도는 영국 언더그라운드 힙합 씬의 또 다른 통로를 마련해 주었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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