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외 리뷰] Azealia Banks - Broke with Expensive Taste
- rhythmer | 2014-12-10 | 17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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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Azealia Banks
Album: Broke with Expensive Taste
Released: 2014-11-06
Rating:
Reviewer: 지준규
힙합 산업계에서 여성 래퍼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남성들에 비해 여전히 제한적이다. 물론, ‘90년대를 풍미한 여러 스타들의 폭발적 인기에 힘입어 여성 래퍼의 지위는 어느 정도 향상 되었지만, 그 양식의 다양성이나 전반적인 영향력에 있어선 아직 남성 뮤지션들에 미치지 못한다는 인식이 강하게 뿌리 박혀있다. 그러나 참신한 사운드와 폭넓은 주제의식, 그리고 개성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하고자 한 몇몇 여성 래퍼들은 언더그라운드를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하였으며, 이들이 거둔 음악적 성취들 또한 많은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녀들은 힙합의 전통적인 측면을 더욱 깊이 파고들거나 기존의 방법론에서 탈피하여 획기적인 실험과 시도를 꾸준히 이어갔고, 이는 힙합 음악계에 어느 정도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었다. 데뷔 때부터 탁월한 랩 실력과 독특한 정체성으로 주목 받아온 아질리아 뱅크스(Azealia Banks) 역시 그 선봉에 서 있는 여성 뮤지션들 중 한 명이다.사실 아질리아 뱅크스의 이번 앨범 [Broke With Expensive Taste]는 정식 발매 이전부터 힙합 팬들 사이에서 자주 언급되었다. 소속 레이블과 첨예한 갈등이나 동료 뮤지션들과 불화설을 비롯하여 지난 몇 년간 숱한 논란을 빚어왔던 그녀가 이러한 우여곡절을 극복하고 음악에 제대로 집중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많았기 때문이다. 선 공개된 “212”나 “Heavy Metal and Reflective” 등의 싱글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며 앨범에 대한 기대치를 높이긴 했으나 그 전체적인 완성도에 대해선 회의를 갖는 이들도 꽤 되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질리아 뱅크스는 나름 성공적이라고 할 만한 데뷔 음반을 만들어냈다. 장르의 경계를 무시하는 변화무쌍한 비트들과 그 위로 속도감 넘치게 흐르며 곡의 메시지를 또렷하게 전달하는 고유의 플로우 사이에 이루어진 절묘한 결합은 언제나처럼 강렬한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으며, 능청스러운 익살과 음담, 그리고 노골적인 비판이 알맞게 뒤섞여 있는 가사 또한 여실히 빛을 발한다. 한때 랩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것과 달리 이번 앨범을 통해 랩퍼로서 위치를 견고히 하고 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무엇보다 앨범에서 아질리아 뱅크스는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과 본인의 개성을 자유롭게 드러냄으로써 팬들이 원했던 것 이상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주었고, 앨범 곳곳에서 감지되는 번뜩이는 재치 역시 그녀의 한층 성숙해진 음악적 감각을 잘 대변하고 있다.
앨범의 주된 방향성은 그 시작을 알리는 첫 트랙 “Idle Delilah”에서부터 이미 선명히 제시된다. 장르적 틀에 구애받지 않은 채 하우스(House)와 글리치(Glitch), 그리고 힙합의 색채를 독창적으로 혼합시킨 비트는 보컬과 래핑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흥미로운 전개를 만드는 뱅크스의 퍼포먼스와 맛깔스럽게 어우러지고 그녀의 삶을 생생하게 묘사한 날 선 가사 역시 그에 못지않은 감흥을 준다. 그 뒤로 유려한 베이스 라인과 생동감 넘치는 브라스가 80, 90년대의 애잔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곡 “Gimme a Chance”가 이어지는데, 팽팽한 힙합 비트가 라틴 사운드로 급작스럽게 전환되는 부분이 특히 인상적인 이 노래에선 스페인어를 익숙하게 구사하는 아질리아 뱅크스의 또 다른 매력을 확인할 수 있기도 하다.
앨범의 중반부에 다다를수록 자신만의 스타일로 힙합을 재해석하고자 한 그녀의 의도가 더욱 뚜렷이 돋보인다. 그녀의 화려한 등장을 알렸던 곡 “212”는 정확히 3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매서움을 유지하고 있으며, 정신 없는 사운드들이 마구 섞여 의도적인 혼란을 일으키고, 아질리아 뱅크스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유의 공격성을 극대화시킨 곡 “Heavy Metal and Reflective” 또한 앨범의 참신성에 일조한다. 그리고 등장하는 트랙 “Yung Rapunxel”은 단연 앨범의 백미라 할 수 있다. 힙 하우스(Hip House) 스타일을 창의적으로 변용시키며 내내 빠르고 자극적으로 펼쳐지는 이 곡은 뉴욕 출신의 프로듀서 릴 인터넷(Lil Internet)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는데, 규칙에 연연하지 않으며 난잡함을 극도로 강조하는 인더스트리얼(Industrial) 사운드도 인상적이지만, 그 안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안정적인 흐름을 유지하는 아질리아 뱅크스의 빼어난 랩 테크닉도 아찔한 희열을 선사한다. 이 곡에서 그녀는 자신의 취향과 속마음에 대해 진솔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데, 외설스럽고 불경한 단어들을 여과 없이 사용하면서도 거부감을 넘어선 쾌감을 전달하는 가사적 재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이 외에도 영국의 UK 개러지(UK Garage) 프로듀서 엠 제이 콜(M. J. Cole)의 곡 “Bandelero Desperado”를 빌려와 한층 묵직하고 을씨년스럽게 풀어낸 “Desperado”, EDM 사운드와 힙합적인 요소들을 동시에 적극 수용하면서도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며 균형감 있는 진행을 보이는 “BBD”, 또 매력적인 후렴구가 귀를 단번에 사로잡는 “Ice Princess”와 “Chasing Time” 등의 곡들 또한, 아질리아 뱅크스가 지닌 풍부한 잠재력을 보여준다.
물론, 어지럽고 난해한 전자음들이 지나치게 반복되는 탓에 간혹 피곤함이 엄습하고, 대중적인 팝 사운드를 적극 수용한 후반부의 곡들이 앨범의 통일성을 다소 저해하여 깊은 감상을 방해한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번 앨범이 가치를 지니는 건 힙합이나 팝뿐 아니라 일렉트로닉 계열의 프로듀서들과도 왕성하게 교류하고 자신의 음악적 스타일에도 쉬지 않고 변화를 주며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자 노력해온 뱅크스의 시도가 뚜렷한 성과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힙합 음악의 전형적인 인습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그것이 무조건 장르적 세계관을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를 끈다. 자질 부족한 부모 밑에서 모질고 쓰라린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는 모든 분노와 응어리를 음악을 통해 분출하려 했고, 이는 장르를 뛰어넘는 다양한 시도들로 이어졌으며, [Broke With Expensive Taste]는 그 일련의 과정들이 비로소 결실을 맺었음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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