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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외 리뷰] Cannibal Ox – Blade of the Ronin
    rhythmer | 2015-03-18 | 13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Artist: Cannibal Ox
    Album: Blade of the Ronin
    Released: 2015-03-03
    Rating:
    Reviewer: 지준규









    힙합 듀오 카니발 옥스(Cannibal Ox) 2001년 발매한 첫 정규작 [The Cold Vein]의 성과는 미미했다. 이 앨범은 당시 대안적 힙합의 기수로 위세를 떨치던 데피니티브 젹스(Definitive Jux) 레이블을 통해 발매되었음에도 기대만큼 큰 주목을 끌지 못했으며, 상업적으로도 저조한 실적을 냈다. 하지만 멤버들의 준수한 래핑 실력과 엘피(El-P)의 손길을 거친 진보적인 사운드, 그리고 뉴욕 도시의 불합리한 억압과 편견에 대한 도발적인 저항이 담긴 가사들은 분명 가치 있는 것들이었으며, 결국, 앨범은 언더 힙합 팬들을 중심으로 서서히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다. 발매된 후 꽤 시간이 지난 현재까지도 앨범의 완성도와 실험 정신은 물론, 그것들이 후대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이 다양한 관점에서 끊임없이 재조명되고 있으며, 지금에 와서 카니발 옥스는 언더그라운드 힙합을 논할 때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상징적인 그룹이 되었다. 이처럼 단 한 장의 앨범으로 그들이 가진 잠재력과 재능을 증명했던 카니발 옥스는 얼마 전 무려 14년 만에 새로운 정규 앨범을 발매하였고, 이는 그룹을 향한 오랜 그리움은 물론, 상품화와 획일화로 점철된 힙합 씬에 대한 염증까지도 동시에 해소시킨다. 

     

    소포모어 앨범 [Blade of the Ronin]과 지난 앨범의 가장 큰 차이는 프로듀서 엘피의 부재일 것이다. [The Cold Vein]의 성공을 가능케 한 일등공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엘피는 음산한 신시사이저와 샘플러를 활용해 장르를 뛰어넘는 독창적인 그루브와 범우주적 사운드를 주조해냈고 이는 카니발 옥스의 두 래퍼, 베스트 아이어(Vast Aire)와 보둘 메가(Vordul Mega)의 래핑과 절묘하게 융화되며 신선한 짜릿함을 안겨줬다. 비록 당시만큼의 충격은 없지만, 빌 코즈믹(Bill Cosmiq)이 대부분을 담당한 본작의 사운드 역시 90년대 붐뱁(Boom Bap) 비트와 현대적인 느낌의 전자음들을 결합시키거나 난잡한 보컬 샘플과 웅장한 현악 연주를 한 데 버무리는 등의 창의적인 시도들 덕분에 나름의 존재감을 갖는다. 그런데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녹슬지 않은 래퍼들의 작사 실력이다. 단순히 시선을 끌기 위한 과도한 장식과 수식은 일절 배제하고 투철한 현실 인식과 끈질긴 작가 정신으로 사회의 모순을 예리하게 고발, 풍자하는 이들의 가사에선 전과 다를 바 없는 패기와 날카로움이 느껴진다. 추상적인 시적 언어와 비유적 표현들을 적극 사용하면서도 주제를 담고 있는 핵심적인 가사들을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곡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재능 또한 앨범 곳곳에서 여전히 빛을 발한다.

     

    앨범의 포문을 여는 2분가량의 인스트루멘탈 트랙 “Cipher Unknown”이 지나면, 앨범의 실질적인 첫 곡 “Opposite Of Desolate”이 등장한다. 수준급의 라임을 구사하는 더블 에이비(Double A.B.)의 피처링이 인상적인 이 곡에서 베스트 아이어는 1980년 후반 큰 인기를 끌었던 만화 영화 [.아이.(G.I. Joe)] 시리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을 활용하여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각 캐릭터의 특징과 자신의 삶을 교묘하게 연결시켜 래퍼로서 자신감과 포부를 드러내는 모습에서 색다른 희열을 느낄 수 있다. 몇 트랙이 더 지나 등장하는 곡 “Thunder In July”에선 카니발 옥스의 노련미를 더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스웨이브 세바(Swave Sevah)나 엘로헴 스타(Elohem Star) 등의 래퍼들이 함께한 이 곡에서 베스트 아이어와 보둘 메가는 곡의 분위기에 맞게 톤을 적절히 조절하면서 유연하게 래핑을 이어가고 그들의 리듬감 넘치는 플로우는 다소 단조로울 수 있는 비트를 완벽히 상호 보완하며 감흥을 자아낸다. 거기에 유려한 멜로디의 후렴구까지 더해지며 곡 전체를 휘감는 팽팽한 긴장감은 더욱 극대화된다. 그리고 후반부에 등장하는 트랙 “Gotham (Ox City)”은 단연 앨범의 백미라 할 수 있다. 곡 전면에 흐르는 몽환적인 색채의 전자음들이 귀를 단번에 사로잡는 이 노래는 제목에서도 암시하듯이 [배트맨] 시리즈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두 래퍼는 배트맨 시리즈의 배경이 되는 고담(Gotham)시와 그 안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에 빗대어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여러 폐해들과 부당함까지 두루 생생하게 묘사하며, 풍부한 상상력을 과시한다. 또 이 같이 현실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향한 긍정과 용기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 외에도 더 웹스(The Webs)의 히트 싱글 “It's So Hard To Break A Habit”을 적재적소에 샘플링하여 견고한 비트를 빚어낸 블랙 밀크(Black Milk)의 재치가 돋보이는 “Blade : The Art of Ox”, 전작을 연상시키는 변화무쌍한 드럼 루프 위에서 날카롭게 쏘아 붙이는 보둘 메가의 래핑이 전율을 선사하는 “Harlem Knights”, 베스트 아이어와 엠에프 둠(MF Doom)이 베스트 아이어의 솔로 앨범 [Look Mom... No Hands] 수록곡 “Da Supafriendz” 이후, 11년 만에 다시 호흡을 맞춘 “Iron Rose” 등의 곡들 역시 앨범의 가치를 높인다. 특히, “Iron Rose”에선 감탄을 자아내는 라임과 펀치 라인들이 끝없이 쏟아지는데 세 래퍼는 이 와중에 진중한 메시지와 교훈까지도 능숙하게 담아내며 의식 있는 래퍼로서 모범을 제시한다.

     

    본작은 카니발 옥스가 첫 앨범에서 보여주었던 놀라운 혁신성과 새로운 사운드에 대한 과감한 도전 정신을 그대로 이어가진 못한다. 이 때문에 예전만큼의 강렬한 자극을 원했던 이들이라면,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이들이 전부터 갖고 있던 음악적 지향과 가치관이 여전히 뚜렷하게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돌고 도는 유행에 편승하지 않고 아티스트로서 신념과 개성을 끝끝내 지켜냄으로써 듣는 이들에게 큰 감흥과 울림을 줄 수 있었고 이는 혁신성의 부재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기에 충분하다. 앨범에 드러난 그들의 기개와 패기, 그리고 재치는 지난날과 다를 바 없으며, 한층 성숙하고 날 선 그들의 가사는 오히려 전보다 더 진한 감동과 여운을 남긴다. 카니발 옥스가 2집으로 거둔 가장 큰 성과는 바로 이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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