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외 리뷰] Dizzee Rascal - Raskit
- rhythmer | 2017-08-24 | 8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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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Dizzee Rascal
Album: Raskit
Released: 2017-07-21
Rating:
Reviewer: 지준규
2000년대 초반 런던에서 개화한 그라임(Grime)은 랩/힙합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며 세계적인 유행으로 떠올랐다. 최근 들어 잠시 주춤하나 싶었으나 제이 허스(J Hus)와 스톰지(Stormzy) 같은 젊은 랩 스타들이 다수 등장하면서 과거의 영향력을 회복하고 있다. 다만, 대중 친화적으로 다가서는 과정에서 기존 그라임이 갖고 있던 날 것 그대로의 공격성은 상당 부분 거세되었고, 사회 비판적이며 진지한 고민이 담긴 가사들 또한 많이 사라졌다.타 장르와의 결합이 당연시되고 다양한 음악적 실험들이 점차 활발해지는 현시점에서 그라임 본래의 정신과 고전미를 운운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벼운 유희 대신 의식 있는 메시지를 강조하고, 그라임이 가진 예술적 가능성의 확장을 위해 끊임없이 매진하는 몇몇 뮤지션들의 태도만큼은 여전히 가치 있으며, 그 영향력 역시 유효하다.
디지 래스컬(Dizzee Rascal)은 옛 그라임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주요 인물이다. 2003년 발표한 데뷔작 [Boy In Da Corner]는 혁신적인 사운드와 타이트한 래핑, 그리고 냉소적이며 통찰력 있는 가사까지, 어느 하나 모자람 없이 어우러져 놀라운 쾌감을 선사했고, 일반 대중은 물론 평단까지 사로잡았다. 몇 년 후 여러 일렉트로닉 프로듀서들이 참여한 앨범 [Tongue n' Cheek]과 수록곡 “Bonkers”, “Dance Wiv Me” 등이 크게 히트하면서, 디지 래스컬의 커리어는 급격히 변화한다.
EDM을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말랑한 비트를 전면에 내세운 파티 음악에 천착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방향성은 전작 [The Fifth]까지 이어졌다. 그의 무기였던 날카로움과 패기는 서서히 위력을 상실했고, 디지 래스컬은 그렇게 힙합 팬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하지만 그가 얼마 전 여섯 번째 정규 앨범 [Raskit]을 발매하며 또 한 차례의 반전을 꾀하고 있다. 전작의 발랄하고 흥겨운 분위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지워졌고, 그가 초창기에 선보인 저돌적인 야성미와 진중한 사색이 그 공백을 대신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처럼 극적인 변화가 단순히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는 것이다. 디지 래스컬은 정석적인 그라임 비트 외에도 알앤비나 쥐펑크(G-Funk)를 비롯한 여러 음악 재료를 가미하여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여기엔 그라임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려는 치밀한 노력이 담겨있다. 그는 화려한 피처링 진을 기용했던 전과 달리 거의 전곡을 혼자 소화하며 무르익은 래핑 실력을 맘껏 뽐낸다.
능숙하게 완급 조절을 통해 생동감 있게 흐르는 특유의 플로우는 어떠한 사운드와도 멋스럽게 어우러지며 짜릿한 희열을 안긴다. 가사 역시 인상적이다. 혼란한 사회에 대한 비판부터 아티스트로서의 철학, 내면의 불안에 대한 진솔한 고백까지 다양한 주제를 섬세하고 재치 있게 풀어냈다. 그의 영리한 가사들은 듣는 내내 감탄을 자아낸다.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 트랙 중 하나가 “Wot U Gonna Do?”이다. 이번 앨범엔 유독 카르도(Cardo)나 살바(Salva) 등, 미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프로듀서들의 활약이 돋보이는데, 이 곡 역시 LA 출신의 발렌티노 칸(Valentino Khan)이 힘을 보탰다. 짜임새 있는 드럼비트와 음산한 느낌의 피아노 멜로디를 중심으로 흐르는 이 곡에선 웅장한 신스가 적재적소에 등장해 흥을 돋우고, 변주된 전자음들까지 뒤섞여 긴장을 고조시킨다. 여기에 외적인 조건들에 밀려 정체성을 잃어가는 뮤지션들을 향해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날 선 가사까지 더해져 곡의 에너지가 절정으로 치닫는다.
이어지는 “Space”에서 디지 래스컬은 깔끔하게 정제한 미니멀 비트 위에서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여과 없이 표출한다. 생생한 이미지와 독창적인 비유를 활용해 복잡 미묘한 감정까지도 탁월하게 묘사한 가사가 깊은 공감을 자아낸다. 앨범의 중반부에 등장하는 트랙 “Ghost” 역시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귀를 단번에 사로잡는 관악기 사운드와 통통 튀는 베이스 리듬도 충분히 인상적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삶을 반추하며 드라마틱하게 전개하는 디지 래스컬의 래핑과 절묘한 라임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이다.
언급한 곡들 외에도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을 호소하는 가사가 애잔한 감동을 안기는 “Slow Your Roll”, 그라임 본연의 파괴력이 고스란히 드러난 “Sick A Dis”, 이기 아잘리아(Iggy Azalea)와의 협업으로 잘 알려진 디 아케이드(The Arcade)의 세련된 프로덕션이 돋보이는 “Way I Am” 등의 트랙들 역시 수준급의 완성도를 보인다. 다만, 과도한 오토튠(Auto-Tune) 등 일부 사운드가 곡과 맞지 않아 때때로 거부감을 주고, 개별적으론 만족스럽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비슷한 분위기의 트랙이 반복되는 점은 아쉽다.
결과적으로 [Raskit]은 오랜만에 디지 래스컬의 재능이 빛을 발한 탄탄한 결과물이다. 디지 래스컬은 이번 앨범을 통해 대중과의 타협을 구실로 그라임이라는 장르의 본질을 흐렸던 과거와 완전한 이별을 선언했다. [Raskit]에는 독자적인 음악 세계에 대한 모색과 진부함을 탈피하려는 치열한 고민이 여실히 담겼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그라임이 다시금 주목받기 시작한 이 시점에 후배 래퍼들에게 모범적인 사례로 남을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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