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콜 리뷰] El-P - Fantastic Damage
- rhythmer | 2013-10-01 | 7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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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El-P
Album: Fantastic Damage
Released: 2002-05-14
Rating:
Reviewer: 양지훈
컴퍼니 플로우(Company Flow)의 일원으로 활동하던 시기부터 엘-피(El-P)는 많은 이의 주목을 받아왔다. 로커스(Rawkus)의 이름을 빛낸 [Funcrusher Plus]에서부터 그가 차지하던 비중은 한솥밥을 먹던 미스터 렌(Mr. Len)과 빅 주스(Bigg Jus)의 그것과 차별화될 만큼 컸다. 엘-피는 컴퍼니 플로우의 해체 직전이나 해체 이후에도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펼쳐나갈 준비를 차곡차곡 해두며 게스트로서 활동도 꽤 했는데, 베이 에어리어(Bay Area)로 날아가 퀀넘(Quannum) 패거리의 앨범과 델 더 펑키 호모사피언(Del The Funky Homosapien)의 솔로 앨범, 그리고 핸섬 보이 모델링 스쿨(Handsome Boy Modeling School)의 앨범에 참여하는가 하면, 데프 젹스(Def Jux)라는 인디 레이블을 설립하여 언더 힙합 씬의 도처에 있는 여러 실력자들을 규합하기도 한다. 곧 컴필레이션 앨범 [Def Jux Presents Vol.1]으로 데프 젹스의 출범을 알렸던 그는 레이블의 이름을 내건 첫 정규작 카니발 옥스(Cannibal Ox)의 [The Cold Vein]을 작업하는 와중에도 솔로앨범 제작에 틈틈이 시간을 할애하였고, 팬들의 기대가 한껏 증폭된 가운데, 마침내 [Fantastic Damage]라는 타이틀의 신작을 발표한다.결론부터 말해서 전체적인 사운드의 흐름은 '자기과시'와 '지독함', 그 자체이다. 카니발 옥스의 앨범에서 보여줄 만큼 보여준 난잡하고 실험적인 비트들과 독특한 드럼 프로그래밍은 본작에서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어있다. 70여 분의 긴 러닝타임이 끝나는 시간까지 청자는 엘-피의 계속되는 엇박 랩과 꽈배기 마냥 꼬일 만큼 꼬인 비트, 그리고 약방의 감초 역할을 하는 디제이 어빌리티스(DJ Abilities)의 스크래칭을 감상하게 된다. 본 앨범의 제작에 사용된 샘플러와 믹서, 오르간의 리스트를 앨범 부클릿에 열거해둔 것 또한 충만한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우선 99년 12인치 싱글로 먼저 선보였던 "Deep Space 9mm"를 주목해보자. 독특한 비트와 공격적인 랩은 충격으로까지 다가오는데, 국내 리스너들 사이에서도 큰 이슈가 된 바 있다(심지어 당시 이 곡을 듣고 나서 곧바로 CD를 구매하러 뛰쳐나갔다는 이들도 있었다). 엘-피 주위의 사람들이 항상 그에게 빨간 총을 겨누는 독특한 컨셉트의 뮤직비디오도 또 하나의 재미로 작용한다. 앨범에서 거의 유일하게 전통적인 그루브를 제공하는 "Dead Disnee", 3연작을 한 곡에서 감상하는 짜릿함을 느끼게 해주는 "The Nang, the Front, the Bush and the Shit", 끝을 향해 달리기 위한 전초전 격인 유일한 인스트루멘탈 트랙 "Innocent Leader", 또다시 분노의 랩으로 치솟는 "Constellation Funk"에 이르기까지 굳이 특정 트랙을 논할 필요 없이 곡 하나하나가 엘-피의 자신감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이렇게 시종일관 첨단의 사운드로 청자의 귀를 압박해 오는 프로덕션에 상응하는 엘-피의 랩은 간혹 '국어책을 빠르게 읊조리는 것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컴퍼니 플로우 시절부터 변함없이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빠른 랩을 구사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랩은 랩핑 자체보다 가사를 세밀하게 읽어가며 들어볼 필요가 있다. 엘-피는 앨범 전반에 걸쳐 부정적이고 냉철한 시선으로 바라본 사회를 묘사하며 때로는 직설적인 맹공을 퍼붓기도 하는 등, 표출하고 싶었던 얘기들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Fantastic Damage"에서부터 시작되는 분노의 랩핑을 서두로 파멸의 디즈니랜드를 묘사하는 "Dead Disnee", 소름 돋는 미래를 생생하게 그려낸 "Stepfather Factory", 몰지각한 랩퍼들을 비난하는 "Constellation Funk" 등등, 공격적이고 날카로운 성향의 가사는 러닝타임이 끝나는 순간까지 단 한 차례도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한편, 이처럼 냉철한 가사 속에서도 살아 숨쉬는 특유의 라이밍과 위트를 캐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Truancy"에서 들을 수 있는 'Rawkus was like, 'we're gonna take this label to another level'/ (fuck that) I'm gonna take this level to another label'(필자 주: 엘-피는 컴퍼니 플로 시절 로커스 레이블을 맹비난하며 인연을 끊어버린 적이 있는데, 쌓였던 게 많았는지 이처럼 솔로앨범에서도 재치있는 워드플레이로 레이블을 조롱한다), 'Jam Master Jay would've shot you (I stopped him)'과 같은 구절은 그 대표적인 예다.
결국, 이 앨범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엘-피의 의도는 자신의 내면에 잠재된 네거티브한 신념을 끊임없이 폭파하는 사운드와 버무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간 여러 매체에서 지적해 왔듯이 이러한 초고밀도 비트와 랩의 동시 감상은 상당한 피로감을 주며, 이는 피해 갈 수 없는 단점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청자의 귀를 완전히 압도해버리는 화려한 전자음과 스피디한 랩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불규칙한 드럼 루프와 끝없는 전자음에 빠져버리는 사이 엘-피의 랩은 신경 쓸 틈이 없으며, 역으로 가사에 심취하는 사이 화려한 폭파음의 감상은 어려워진다. 엘-피 역시 이러한 측면을 감지하고 있었는지 몇 달 뒤 인스트루멘탈 버전의 앨범 [Fantastic Damage Plus]를 따로 발매하는 팬 서비스 차원(?)의 배려를 해주었다.
이 앨범이 발매된 지 11년이 지났지만, [Fantastic Damage]에서 보여줬던 엘-피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은 어느 때고 청자들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것이라는 무언의 약속을 담고 있는 것 같다. 70여 분의 시간으론 성이 차지 않는 양 끝없이 토해내던 분노의 랩핑과 충격적이었던 노이즈의 향연이 그 이유이다. 가히 2000년대 나온 실험적인 힙합 사운드의 결정체라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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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로윈1031 (2013-10-03 08:25:39, 175.202.126.***)
- 첨에 컴퍼니 플로우의 앨범을 듣는데 놀랐던건 앨범의 기괴한 세계관이나 비트의 파격성이 아니라 엘피의 정신나간 랩이었죠;;ㅋ
랩이라 하면 그루브하고 훵키한걸로 알고있었던 터라 이건 뭐 디스토피아 랩인가 싶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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