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외 리뷰] Rapsody - Eve
- rhythmer | 2019-09-17 | 7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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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Rapsody
Album: Eve
Released: 2019-08-23
Rating:
Reviewer: 황두하
근 몇 년간 힙합 씬에 등장한 여성 랩퍼 중 랩소디(Rapsody)의 행보는 단연 인상적이다. 그는 섹슈얼한 매력에 의존하지 않은 채 진중한 가사와 묵직한 랩, 그리고 샘플링을 기반으로 한 수준 높은 붐뱁 사운드를 무기로 한다. 동시대의 랩퍼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띈다.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에 비견할 수 있을 정도로 사회적 이슈를 음악에 재치 있게 녹여내는 솜씨 또한 탁월하다. 전작 [Laila’s Wisdom](2017)은 힙합 클래식이라고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로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주며 그가 현시대 가장 재능있는 리리시스트(Lyricist) 중 한 명임을 증명했다.약 2년 만에 발표한 세 번째 정규작 [Eve]는 한 마디로 ‘흑인 여성의, 흑인 여성에 의한, 흑인 여성을 위한’ 앨범이다. 유명 흑인 여성들의 이름을 따온 트랙 제목에서부터 본작의 성격이 명확히 드러난다. 뮤지션은 물론, 시인, 정치인, 역사적 인물부터 가상의 인물까지 총망라했다. 자밀라 우즈(Jamila Woods)의 근작 [LEGACY! LEGACY!]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여성들의 이름만을 따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단순히 이름만 따온 것은 아니다. 각 인물의 특징, 업적 등을 주제와 연결시켜 여성의 힘을 찬양하고 축복한다. 흑인 여성 사상 첫 백만장자인 오프라 윈프리(Oprah Winfrey)의 이름을 따온 브래거도시오(Braggadocio) 트랙 “Oprah”, 흑인 여성 테니스 선수 세레나 윌리엄스(Serena Williams)처럼 독자적인 길을 걷겠다는 각오를 담은 “Serena”, 첫 흑인 퍼스트 레이디(First Lady) 미셀 오바마(Michelle Obama)에게 영감을 받아 만든 여성들을 위한 파티 앤썸 “Michelle” 등은 대표적이다.
그중에서도 “Cleo”와 “Whoopi”가 매우 인상적이다. 전자에서는 퀸 라티파(Queen Latifah)가 연기한 영화 [셋 잇 오프, Set It Off](1996)의 주인공 클레오(Cleo)처럼 자신을 반기지 않는 음악산업계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후자에서는 흑인 여성 최초로 EGOT(*필자 주: 미국 대중문화계의 4대 시상식인 에미(Emmy), 그래미(Grammy), 오스카(Oscar), 토니(Tony) 어워드에서 모두 상을 받은 인물을 일컫는 말)를 이뤄낸 우피 골드버그(Whoopi Goldberg)처럼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천명한다. 분노의 감정을 응축해 전에 없이 타이트하게 뱉어대는 랩은 최상의 청각적 쾌감까지 선사한다. 단연 앨범의 하이라이트 곡이라 할만하다.
게스트를 활용하는 방식 또한 흥미롭다. 11명이라는 상당히 많은 수의 게스트가 참여했는데, 모두 앨범의 주제에 자연스레 녹아 들었다. 일례로 힙합 명곡 중 하나인 “Liquid Swords”을 샘플링한 “Ibtihaj”에는 원곡자인 즈자(GZA)와 디엔젤로(D’Angelo)가 참여해 힘을 보탰고, “Iman”의 마지막 구절 ‘Who the fuck you callin’ a bitch? (대체 누구한테 *년이라고 하는 거야?)’에 이어 다음 곡 “Hatshepsut”에는 오랜만에 퀸 라티파가 목소리를 더했다. (*필자 주: 해당 구절은 퀸 라티파가 힙합 문화 안의 여성 혐오에 대해 노래한 “U.N.I.T.Y.”의 대표 구절이다) 더불어 시인 레이나 비디(Reina Biddy)가 중간중간 각 곡에 맞는 내레이션으로 앨범 전반에 통일성을 부여했다.
나인스 원더(9th Wonder)가 주도한 프로덕션은 전보다 단출하지만, 그만큼 단단해졌다. 그를 비롯해 마크 버드(Mark Byrd), 에릭 쥐(Eric G), 크라이시스(Khrysis), 노츠(Notts) 등의 프로듀서들은 고전 소울, 힙합 클래식부터 최신 곡까지 다양한 샘플링을 활용하여 앨범 전반에 빈티지하면서도 소울풀한 기운을 가득 불어넣었다. 그런가 하면, “Oprah”부터 “Tyra”까지 이어지는 구간에서는 808드럼과 두터운 베이스의 운용을 통해 트렌드를 적절히 껴안았다.
[Eve]를 이끄는 가장 큰 힘은 랩소디의 랩이다. 탄탄한 발성으로 리듬을 밟아가며 자연스레 그루브를 자아내는 퍼포먼스는 일정 경지에 이르렀다. 이에 더해 재치 넘치는 비유와 날카로운 시선을 겸비한 가사는 ‘블랙 우먼 임파워링(Empowering)’이라는 주제에 강한 설득력을 부여한다. 그래서 흑인 남녀 모두에게 연대의 목소리를 보내는 마지막 곡 “Afeni”가 주는 감동은 오래도록 진한 여운을 남긴다. 그야말로 2019년을 살아가는 흑인 여성 랩퍼이기에 만들 수 있는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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