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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내 리뷰] 릴피쉬 - 분열
    rhythmer | 2021-02-19 | 9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Artist: 릴피쉬(Lil Fish)
    Album: 분열
    Released: 2020-12-31
    Rating: 
    Reviewer: 강일권









    우울과 상실을 노래하는 음악 대부분은 양가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누군가의 고통을 반강제적으로 목도하는 듯한 괴로움, 하지만 특유의 서늘하고 침잠된 기운이 주는 쾌락. 그 음악을 만들었을 창작자만큼이나 듣는 이도 갈피를 잡기 어려운 심경이 된다. 묘사하는 우울의 깊이가 깊을수록 더욱 그렇다. 하물며 죽음을 노래한다면야.

     

    랩을 병행하는 싱어송라이터 릴피쉬(Lil Fish)의 데뷔 EP [분열]에 지배적인 기운은 죽음이다. 그는 팬데믹 시대에 느낀 정서적인 분열을 때론 간절한, 때론 서늘한 기운이 밴 언어로 풀어놓았다. 2020년의 마지막 날 앨범을 발매하며 2021년에 대한 기대를 내비쳤지만('올해는 즐겁지 않았어. 2021년에는 괜찮아지겠지?'), 작품의 근저엔 한없이 비관적인 정서가 흐른다.

     

    솔직함과 염세주의가 뒤섞인 자기소개서, 첫 곡 "정신분열"부터 '자살각'을 언급한 릴피쉬는 '죽는 건 어때, 죽으면 어때'라고 독백하는 "언제 멸망할까요"와 내일에 대한 바람과 체념이 섞인 마지막 곡 "잘가요"에 이르기까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현실에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진 본인을 가감 없이 전시한다.

     

    근사한 표현으로 우울을 포장하거나 섣부르게 희망을 투영하지도 않는다. 직관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덤덤하지만, 감정을 꾹꾹 눌러담은 듯한 가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샌가 그의 감정에 동화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는 앨범에서 보이는 그의 처지가 비단 아티스트뿐만 아니라 음악을 듣는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분열]이 불러일으킨 정서의 가치는 색깔 있는 프로덕션을 통해 극대화된다. 음악에선 얼터너티브 알앤비의 영향이 전해지는 한편으로 한국 인디 팝, 모던 록, 일렉트로닉과의 인상적인 퓨전이 돋보인다. 미 얼터너티브 알앤비가 보컬 측면에서 팝과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것과는 또 다른 새로움이다. 한 곡 내에서 비트를 전환하는 솜씨도 상당하다. 릴피쉬는 장르와 스타일을 수시로 바꾸면서도 이를 전혀 이질감 없이 엮어냈다.

     

    힘을 빼고 기타 리프에 실려가듯 보컬을 전개하는 타이틀곡 "우에오 (Woo é oh)""잘가요", 그리고 2000년대 초반 유행한 모던 록의 기운이 느껴지는 "버릇처럼" 등은 대표적이다. 곡의 3분의 2 지점에 이르러 메인 기타 리프와 드럼이 뒤로 빠지고, 힙합으로 변주되며 기타도 루프 역할로 바뀌는 버릇처럼은 비트 스위칭의 쾌감을 고스란히 전한다. 그런가 하면, “은둔에서는 싱잉 랩을 비롯한 전형적인 트랩(Trap Music)과 알앤비의 결합을 들려주기도 한다.

     

    새삼 그의 이력을 곱씹어보게 한다. 릴피쉬란 이름은 많은 이에게 생소하겠지만, 사실 밴드 위아더나잇(We Are The Night)의 리더 정원중이다. 밤의 이미지를 매개로 서정적이고 몽환적인 음악을 들려주는 위아더나잇에서의 그와 릴피쉬로서의 그는 다른 세계에 있는 아티스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 위아더나잇으로서의 그와 링크되는 순간 또한 존재한다. [분열] 속 음악에서 느껴지는 넓은 음악 스펙트럼은 이 같은 배경에서 비롯한 결과로 다가온다. 다만, 몇몇 곡에서 적잖이 사용된 비속어가 영어가 아닌,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욕설이었다면 더욱 감흥이 크지 않았을까 싶다.

     

    [분열]을 듣고 있으면, 당장 오늘과 내일에 대한 걱정이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까지 나아가 생성된 묘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 속엔 슬픔과 비루함, 그런 가운데서도 구차하게 차오르는 일말의 희망이 어지럽게 뒤섞여있다. 음악을 듣는 동안엔 그가 만든 세계를 부유하는 듯하다. 이 우울한 시기가 한편으론 이렇게 흥미로운 작품을 마주하게 한다. 참으로 잔인하면서도 짜릿한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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