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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내 리뷰] 이현준 - 번역 중 손실
    rhythmer | 2022-11-09 | 118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Artist: 이현준
    Album: 번역 중 손실
    Released: 2022-10-15
    Rating:
    Reviewer: 황두하









    이현준은 진지하다. 첫 정규 앨범 [MAIN STREAM](2019)에서 개인사와 씬의 민낯뿐만 아니라 본인의 모순마저 진중한 시선으로 낱낱이 파헤쳐냈다. 기구한 가정사로부터 벗어나 씬의 중심으로 가고자 했으나 결국은변방이라고 생각했던 위치가중심이었음을 깨닫는 과정을 치밀한 구성과 뛰어난 표현력으로 풀어냈다. 믹스테입 [끓는 물의 개구리](2017) EP [Analog TV](2018)로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그가 비로소 씬에 이름을 아로새긴 순간이었다.

     

    3년 만에 발표한 두 번째 정규 앨범 [번역 중 손실]의 이현준은 전보다 깊은 내면의 세계로 눈을 돌렸다. 가상의 미래로 설정된 시점에서 세상과 부정교합을 겪는 처지를 남김없이 전시하고(“Hello Stranger”, “게슈탈트”, “농담”), 그 속에서 느끼는 우울감의 밑바닥까지 그러모아 토로한다.

     

    소마(SOMA)’라는 이름의 약의 힘을 빌려 우울감을 해소하려 하지만(“SOMA”) 실패하고, 지금의 상태를 만든 원인이 전 연인으로 추정되는 사람과의 헤어짐이었다는 것이 드러난다(“Good Bye Closer”, “Newspaper”). 여기서소마는 소설 [멋진 신세계]에 등장하는 마약의 일종으로, 이름과 설정을 그대로 빌려왔다.

     

    앨범을 관통하는 키워드는번역이다. 사람이 세상을 이해하는 과정, 사람 사이의 소통 과정을번역에 비유하고, 번역과 해석의 과정에서 의미에 집착하다가 의미를 잃어 점점 멀어지는 자신을 집요하게 묘사한다. “번역 중 손실의 인트로와직역에서는 목소리를 디지털 가공한 다음 음향적인 효과로 표현하기도 한다. 특히 본인의 심정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낸 가사와 제목과는 다르게 곡 전체에 효과를 걸어 의도적으로 전달력을 떨어트린 것 같은직역은 연출의 묘미가 돋보이는 트랙이다.

     

    이밖에도 자율 주행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차 안에서 연인과의 과거를 추억하는자율 주행”, ‘태우다는 단어로 감정의 끝단까지 몰아붙이는 “White Lighter”, 전 연인에게 닿지 않고 쌓이는 자신의 처지를 신문에 비유한 “Newspaper” , 참신한 어휘 선택과 섬세한 표현력 덕에 마지막까지 상당한 감흥을 준다.

     

    다만, 인터넷 밈(Meme)을 활용해 자신의 음악을 조롱하는 이들을 비꼬는 “Windows 95 Launch Dance”는 완성도와 별개로 앨범 속 화자가 아닌 현실의 래퍼 이현준이 갑자기 튀어나와 몰입을 방해한다.

     

    탄탄한 음악이 [번역 중 손실]의 내용에 강한 설득력을 부여한다. 곤드(GOND)와 시아이(Syai)가 전곡을 책임진 프로덕션은 일렉트로닉과 익스페리멘탈 힙합에 기반을 두었다. 감정선에 따라 매섭게 휘몰아치다가도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신시사이저만으로 여백을 두어 의미를 곱씹을만한 공간을 만든다.

     

    또한 이현준의 퍼포먼스에 맞춰 수시로 변주가 이루어지며 일체감 있게 흘러간다. 그래서 사운드의 잦은 변화가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후렴구에서 피아노로 단출하게 진행되다가 점점 악기가 추가되며 벌스에 이르러 다양한 소스가 어지럽게 충돌하며 감정이 폭발하는농담은 대표적이다.

     

    그런가 하면, “Windows 95 Launch Dance” “White Lighter”에서는 단순한 후렴구와 휘몰아치는 리듬 파트로 흥을 돋운다. 전반적으로 다소 전위적이라고 느껴질 수 있는 사운드지만, 중간중간 익숙한 구성이 긴장을 풀어주며 편하게 다가갈 만한 여지를 만든다.

     

    퍼포먼스도 프로덕션과 마찬가지로 변화무쌍하다. 몇 개의 단어에 변화를 주며 라임을 툭툭 던지다가도 많은 단어를 타이트하게 내뱉으며 쾌감을 끌어올린다. 또한 라임을 촘촘하게 배치해 그루브를 만들다가도 라임 없이 넘어가는 구간을 만들기도 한다. 랩과는 전혀 다른 톤의 보컬도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한다. 덕분에 게스트가 없어도 다채롭게 느껴진다.

     

    한국 힙합에서 작가주의적 시도가 엿보이는 앨범을 종종 만날 수 있지만, 모두가 설득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번역 중 손실]은 꽤 성공적이다. 정교하게 짜 맞춘 구성적 장치와 하나의 내러티브를 끝까지 파고든 집요함의 승리다. 기본기와 연기력을 갖춘 퍼포먼스와 여기에 딱 맞게 더해진 개성 강한 프로덕션으로 이현준의 이야기를 훌륭한 음악으로 승화시켰다. 작가주의적 야심과 음악적 완성도가 화학적 결합을 이룬 보기 드문 앨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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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mments
      1. babyalpaca (2022-12-02 04:29:28, 58.123.66.***)
      2. 조지 오웰이 생각나는 앨범이었어요. 잘 들었습니다.
      1. 소피아 (2022-11-15 11:52:17, 112.216.170.**)
      2. 개인적으로 공공구 [ㅠㅠ] 와 더해서 올해의 앨범에 들기에 정말 충분한 앨범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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