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외 리뷰] Pip Millett - When Everything Is Better, I'll Let You Know
- rhythmer | 2022-12-16 | 13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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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Pip Millett
Album: When Everything Is Better, I'll Let You Know
Released: 2022-10-21
Rating:
Reviewer: 장준영
영국의 알앤비 씬은 양적으론 미국보다 부족해 보이지만, 질적으론 전혀 뒤쳐지지 않는다. 매년 준수한 앨범과 매력적인 아티스트가 나타나 시선을 끌어낸다. 마치 공식처럼 등장한다. 올해엔 맨체스터 출신의 핍 밀렛(Pip Millett)이 적확히 들어맞는다.밀렛은 이전부터 자신을 찾아오는 고통과 피로감을 이야기로 꿰어내는 것에 능했다. 세 장의 EP에선 백인 주류의 사회에서 흑인 여성이 느끼는 힘겨운 순간, 관계에서 오는 상실과 단절의 알알한 고통을 자주 그렸다. 이번 [When Everything Is Better, I'll Let You Know]에선 사랑과 이별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정규 앨범에 어울리는 긴 호흡에 다양한 에피소드를 나열했다.
(전) 연인을 보며 애정과 애틋함을 드러내고("All Good"), 종결된 관계를 받아들이고자 하지만("My Way", "Downright"), 사랑을 잃어버린 자신과 떨치지 못한 오만가지 심정을 진솔히 표현한다("Smoking", "Walk Away", "Happy No More").
감정은 상처처럼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는 법이다. 상실의 고통이 줄어들면서 새로운 사랑을 맞이할 의욕이 생기고("Slow"), 과거의 생채기를 바라보며 또다시 나아가고자 하기도 한다("Heal"). 사랑할 준비가 되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사랑하고자 하는 솔직한 마음을 꾸밈없이 분출한다("Only Love").
겉보기에 밀렛의 노랫말은 단순히 사랑에 안달 난 사람이 겪는 끝과 시작의 과정처럼 들린다. 하지만 가식은 배제한 듯 적나라한 감정 묘사가 무언가 여느 노래와 다르게 느껴진다. 동시에 상대방은 고려하지 않은 듯 온전히 자기중심적인 묘사가 일관된 덕에 종결까지 화자에 대한 몰입감이 유지된다.
그중 "This Stage"는 마음을 진하게 울린다. 실패한 사랑에서 느끼는 괴로움을 무대에 서 있는 자기 모습을 통해 나타낸 한편, 마치 흐르는 물감처럼 슬픔이 넘쳐흐르는 점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다. 고통에 사무치는 표현이 매 순간 일렁이며, 감정을 자극하는 신선한 은유가 귀를 이끈다.
'모든 것은 내 마음의 상태야, Everything's a state of mind / 당신이 내 마음의 상태를 본다면, If you saw the state of my mind / 모든 페이지에서 그림이 흘러내릴 거야, The paint would run on every page'
진진한 노랫말만큼 프로덕션의 선택도 흥미롭다. 아델(Adele), 샘 스미스(Sam Smith), 조이 크룩스(Joy Crookes)와 작업했던 에그 화이트(Eg White), 조자 스미스(Jorja Smith)와 꾸준히 함께한 찰리 제이 페리(Charlie J. Perry), 칼리 우치스(Kali Uchis), 셀레스트(Celeste)의 앨범에 참여했던 조쉬 크록커(Josh Crocker) 등등, 프로듀서 진이 꽤 화려하다. 그만큼 알앤비와 소울, 힙합 소울로 다채롭게 일군다.
진한 밀렛의 목소리에 풍부한 코러스가 인상적인 "Heal", 베이스를 강조하여 미니멀하면서도 차분한 무드를 자아내는 "Happy No More", 퍼커션을 비롯한 다채로운 악기 활용이 넉넉한 사운드를 들려주는 "Smoking", 재지한 보컬 샘플링과 트럼펫 소스의 활용이 빈티지한 질감을 극대화하는 "All Good" 등이 그렇다.
첫 정규에서 찾을 수 있는 또 다른 특징은 비트다. 기타 리프와 애절한 보컬 사이로 그라임이 연상되는 워블 베이스가 깔린 덕에 느린 BPM에도 속도감을 느낄 수 있고("I Know"), 일정하게 타격하는 붐뱁 비트가 소울풀한 보컬의 리듬감을 더욱 강조하기도 하며("Ride With Me", "Downright"), 아프로비트의 질감을 품어 변주가 이루어지기도 한다("Walk Away"). 우울한 무드와 노랫말과는 다르게 리드미컬한 비트가 연이어 등장해 50분 남짓한 긴 호흡임에도 지루하지 않다.
앨범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인터루드(Interlude) 트랙이다. 20곡에 가까운 트랙을 배치했기에 프로덕션에서 크고 작은 차이를 지닌 경우가 상당수이지만, 앞뒤의 흐름을 이어주고 반전시켜 매끄럽게 순간을 병치한다. 특히 "Hold Up"의 사용이 탁월하다. 서정적이고 나른한 듯한 두 트랙 사이에서 무드는 유사하게 취했으면서, 잘게 리듬을 쪼갠 비트로 그루브를 살려내어 "This Stage"와 물 흐르듯 이어진다.
새로운 목소리로부터 느낄 수 있는 감흥은 물론이고, 솔직한 이야기와 잘 짜인 프로덕션이 앨범을 감싼다. [When Everything Is Better, I'll Let You Know]이 평범한 알앤비처럼 들리지 않는 건 여러 강점이 산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국의 알앤비 씬에 또 한 명이 강렬히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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