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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내 리뷰] 재림 - 암벽등반
    rhythmer | 2026-10-02 | 12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Artist: 재림
    Album: 암벽등반
    Released: 2026-09-19
    Rating:
    Reviewer: 강일권









    재림은 꾸준히 앨범을 내며 씬에서의 자리를 만들어왔다. 2024년 정규 데뷔작 [성동공팔]에서 자신이 살아온 동네와 생활을 신선하게 풀어냈고, 이듬해에는 프로듀서 선진(Sun Gin)과의 합작 [GMBT]를 통해 한층 무르익은 랩 실력을 들려줬다. 그는 분명 주목해야 할 신예였다.

    하지만 기대만큼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래퍼로서 증명해온 기량과 음악적 완성도에 비해 현실이 내어준 자리는 여전히 좁다. 새 앨범 [암벽등반]은 바로 그 발밑의 현실에서 출발한다. 월세와 아르바이트, 틀어진 관계, 사라진 공연 기회, 가족의 생계까지 재림은 자신을 둘러싼 여러 압박을 ‘암벽’이라는 상징으로 묶었다. 계속 살아가기 위해 넘어야 하는 벽이다.

    그 벽은 매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첫 곡 “암벽의 존재”에서 암벽은 사람과 학교, 주어진 상황과 그의 한계까지 폭넓게 가리킨다. 그래서 이 앨범의 등반은 막연한 성공담으로 흐르지 않는다. 재림이 실제로 부딪혀온 현실에 단단히 발을 딛고 있다. 그는 삶의 무게를 비장하게 끌어안기보다 욕설과 농담, 과장된 허세로 비틀어 자신만의 말투로 풀어낸다.

    여기에 가장 큰 힘을 실어주는 것은 탄탄한 랩이다. 재림은 이번에도 상당히 흥미로운 랩을 들려준다. 많은 곡에서 비트의 흐름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박자를 비켜 타며 여유를 만들고, 리듬이 비정형적으로 흘러갈 때도 플로우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어조는 공격적이지만 움직임은 꽤 유연하다. 반대로 곡이 직선적인 힘을 요구할 때는 음절마다 힘을 실어 곧바로 무게중심을 바꾼다. 이처럼 변화하는 리듬에 맞춰 강약과 속도를 능청스럽게 조절하는 감각은 앨범을 끌고 가는 중요한 동력이다.

    벌스에서 힘을 빼고 비트 사이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다가 후렴에서는 리듬을 단단하게 잡아채는 "Coldsteel", 스네어와 완벽하게 동화되어 비트를 몰아가는 "SDVillain", 박자 주변을 돌아가듯 플로우를 붙이다가 의미를 강조해야 할 순간에는 흐름을 다시 조여주는 "Paracord" 같은 곡을 들어보라. 오늘날 재림은 확실히 과소평가된 래퍼다.

    생활어, 농담, 욕설, 지역명, 엉뚱한 비유가 연달아 튀어나오는 것도 그의 랩을 듣는 재미다. 자칫 산만해질 수 있는 재료들이지만, 자연스러운 호흡과 리듬 감각 덕분에 한 흐름 안에서 매끄럽게 이어진다. 거칠거나 건조한 표현이 연달아 등장해도 곡 전체가 한 가지 표정으로 굳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만 같은 이미지와 태도가 오래 이어지면서 중반부에는 집중력을 흐트러트리는 순간도 있다. 예컨대 ‘암벽’, ‘버틴다’, ‘차갑다’ 같은 키워드가 거듭 등장하고 다소 많은 곡 수까지 더해지다 보니 이미 충분히 느낀 등반의 태도를 주입당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큰 단점은 아니다. 특히 이때 앨범의 흐름을 바꾸는 곡들은 재림이 처한 상황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준다.

    “Paracord”가 그렇다. 추락과 착지, 파라코드와 낙하산의 이미지를 이어가던 재림은 ‘그 상황을 만든 건 바로 나 자신’이라고 내뱉는다. 짧은 라인이지만, 앞선 곡들과는 시선이 다르다. 자신을 몰아세우는 현실을 이야기하던 사람이 그 원인 안에 자신의 선택까지 포함시키기 때문이다. 이 순간부터 ‘등반’이라는 이미지도 단순히 외부의 벽을 견디는 일만으로 들리지 않는다.

    프로덕션은 재림의 유연한 랩과 자연스럽게 맞물린다. 여러 프로듀서의 비트로 구성하여 곡마다 질감과 분위기는 다르지만, 리듬은 대체로 곳곳에서 미묘하게 균형을 흐트러뜨린다. 드럼이 예상한 지점에서 살짝 비껴나거나 루프의 강세가 일정한 간격으로 되풀이되지 않는다. 베이스와 멜로디가 같은 구간을 맴도는 사이에도 군데군데 불규칙한 여백이 생긴다. 재림의 랩은 그 틈을 능숙하게 파고든다. 이런 작은 어긋남들이 모여 앨범 전반에 은근한 긴장을 불어넣었다.

    대표적으로 “Coldsteel”은 [암벽등반]의 성격이 가장 밀도 높게 응축된 곡이다. 사이키델릭한 기타 리프가 투박하게 엉킨 드럼을 감싸며 나아가는 비트 위에서 재림의 랩이 느슨하게 걸치며 팽팽한 여운을 끌어낸다. 이 곡에서의 래핑은 [GMBT](2025)에서 보여준 드럼리스(Drumless) 힙합에 최적화된 스타일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린 버전이라 할만하다.

    그렇게 여유롭게 흘러가는 랩 안에는 의외로 무거운 현실이 촘촘히 들어차 있다. 아버지의 당구장 폐업, 할머니의 입원비, 빠듯한 월세 이야기를 차례로 꺼낸 뒤 그가 ‘내 거 다 뺏어가도 안 뺏겼잖아 내 랩까진’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앨범에서 가장 감정을 건드리는 대목 중 하나다. 앞서 이어지던 허세와 공격성도 이 한 줄에 이르면 비로소 그가 버텨온 현실과 맞닿는다.

    그런가 하면 “암격”은 앨범의 핵심 이미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소리로 옮긴 곡이다. ‘올라’라는 후렴이 집요하게 되풀이되고, 오밀조밀하게 설계된 비트가 나른한 잠을 부르듯 돌아나간다. 반복 자체가 곧 추진력이 된다. 특히 자전적인 서사가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프로덕션적으로 과하게 덧칠하지 않는 점이 효과적이다. 대신 단순하고 끈질긴 반복이 같은 발판을 몇 번이고 딛고 올라서는 듯한 감각을 만들고, 재림은 그 틈에서 농담과 고백, 허세를 한 호흡 안에 뒤섞었다.

    “키삣/아이젠” 역시 가장 귀를 잡아끄는 곡 중 하나다. 골격은 반복적인 루프와 묵직한 저역을 중심에 둔 힙합 비트에 가깝지만, 리듬이 매번 반듯하게 떨어지기보다 중간중간 힘을 빼거나 강세를 살짝 비껴가며 매력적인 그루브를 생성한다. 재림은 엇박에 몸을 걸치듯 랩을 이어가며 특유의 여유를 만드는데, 후반부에는 절묘한 비트 변주까지 더해지며 곡의 탄력이 끝까지 유지된다.

    혼란스럽게 충돌하는 드럼과 유령처럼 떠도는 보컬 샘플, 이미 무정부 상태인 공간에 또 다른 균열을 내는 디제이 거스트(DJ gust)의 스크래치가 한데 어우러진 “암벽을 넘어”, 단순한 패턴과 넉넉한 여백으로 재림의 목소리가 들어설 자리를 내어주다가 후렴에 이르면 보이지 않는 힘이 공간을 뒤틀어놓는 듯한 편곡으로 강렬함을 주는 “stealth”도 진한 인상을 남긴다.

    여기서 “Keep Frozen”, “Coldsteel”, “키삣/아이젠”, “Stanley”, “stealth” 등 여러 곡의 작·편곡에 재림이 직접 참여하고 총괄 프로듀서까지 맡았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클럽튠, 얼터너티브 힙합, 드럼리스 사운드가 뒤섞였음에도 앨범의 흐름이 크게 흩어지지 않고, 느슨함과 긴장 사이를 오가며 랩이 단조로운 힘겨루기로 흐르지 않는 데에는 그의 개입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마지막 “암벽을 넘어”에서도 재림은 정상에 오른 사람처럼 환호하지 않는다. ‘암벽은 넘어가 언제 안 그랬냐며’라고 말한 다음 다시 몸을 일으키고, 자신을 ‘버티는 자신과 끝나는 나 사이 어딘가’에 둔다. 앨범에는 그렇게 버텨낸 순간과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 그 사이에서 생겨난 농담과 허세가 모두 같은 하루 안에 뒤섞여 있다.

    그래서 어떤 선언이나 해답을 내놓지 않는 마지막이야말로 [암벽등반]과 잘 어울린다. 현실에서는 하나의 고비를 넘겨도 길이 곧 다시 굽어지기 마련이다. 삶은 언제나 뜻대로 매듭지어지지 않은 채 이어지고, 재림은 그 풀리지 않은 몫까지 품은 채 다음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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