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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드머 뷰] 허울뿐인 연대는 필요 없다는 도발, [씨너스: 죄인들]
    rhythmer | 2025-06-28 | 7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글: 남성훈


    [블랙 팬서, Black Panther]는 2018년 개봉 당시 그야말로 신드롬을 일으키며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의 위상을 높이는 데 한몫했다. 같은 해 개봉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Avengers: Infinity War]보다 미국 내에서는 더 흥행하고, 오스카 작품상 후보에까지 올랐으니, 대중과 평단을 모두 사로잡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블 코믹스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각본과 연출을 한 라이언 쿠글러(Ryan Coogler)는 [블랙 팬서]를 통해 과감하게 미국 내 흑인을 위한 메시지를 던졌다. 많은 이들, 특히 국내에서는 단순히 백인/비백인 비중과 주체적 여성 캐릭터의 등장 때문에 '정치적 올바름'으로 [블랙 팬서]를 오독했다. 하지만 [블랙 팬서]를 이해하려면, 1950년대부터 흑인 지식인과 문화예술인을 중심으로 이어진 블랙 프라이드(Black Pride) 운동을 우선 흡수해야 한다.

     

    노예로 끌려 제도적 차별과 억압 속 정착한 미국 사회 속 흑인의 자존감을 세우는 것이 블랙 프라이드 운동의 핵심이다. 아프리카를 '마더랜드(Motherland)'로 부르며 정서적 가치를 드높인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러한 마더랜드 판타지를 쿠글러는 와칸다(Wakanda)라는 미지의 공간으로 구체화했다(비공개 프로덕션 시기에 [블랙 팬서]의 프로젝트명이 '마더랜드'였다). [블랙 팬서]는 여러모로 수십 년간 이어진 블랙 파워/블랙 프라이드 운동, 문화의 잔상과 방향성이 노골적으로 투영된 영화였다. 그리고 라이언 쿠글러는 다섯 번째로 각본을 쓰고 연출한 [씨너스: 죄인들, Sinners]에서 슈퍼히어로가 아닌 뱀파이어 호러 영화 형식을 빌려, [블랙 팬서]에서의 과감함을 넘은 꽤 도발적인 메시지를 미국 내 흑인에게 날린다. 그 메시지를 질문으로 바꾸면 이렇다.

     

    "흑인 인권운동에 연대했던 이들이 과연 정말 우리 편이었는가?"

     



    * 이하 스포일러 포함 *


    주인공인 쌍둥이 스모크(Smoke)와 스택(Stack)은 백인우월주의자가 분명해 보이는 백인에게 건물을 사 클럽 주크 조인트(Juke Joint)를 연다. 주크 조인트는 블랙 팬서의 와칸다와 같은 역할을 한다. 스모크와 스택은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어쨌든 철저하게 노예 역사를 겪은 미국 내 흑인만을 위한 공간이자, 그들의 문화가 아무런 제한 없이 펼쳐지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다른 점이라면, 고단한 일상을 벗어난 파티로 그들을 위로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주크 조인트가 정체불명 뱀파이어의 위협을 받으며, 분위기가 급히 반전된다. 그런데, 여기부터 쿠글러 감독이 던지는 [씨너스: 죄인들]의 질문이 시작된다.   



     


    영화 속 주요 인물 중 흑인이 아닌 이들이 몇 있다. 바로 흑인 할아버지 피가 섞인 스택의 전 여자친구 메리(Mary),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다 파티를 돕는 중국계 부부 보(Bo)와 그레이스(Grace), 그리고 뱀파이어 우두머리인 아일랜드인 레믹(Remmick)이 그렇다. 그들은 모두 어렵사리 만들어 낸 주크 조인트라는 흑인 공동체 공간, 일상에서 벗어난 그들만의 시간을 해체하고 위협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런데 공동체의 면면을 조금만 더 파고들면 드러나는 쿠글러의 영민한 메시지는 단순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유구한 차별의 역사를 가진 아일랜드인을 상징하는 레믹, '한 방울 원칙(One-drop rule)'과 같은 제도로 차별을 받은 혼혈 메리, 그리고 온갖 편견 뒤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동양인 보와 그레이스는, 흑인과 같이 출신과 정체성으로 인한 차별의 피해자로 함께 묶일 수 있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그들은 주크 조인트의 중심인 흑인의 편으로 등장하며 끈끈한 연대를 떠올리게 한다. 레믹도 진심인지 유혹인지 헷갈릴 정도로 '우리는 함께해야 한다'라며 접근한다.

     

    그런데, 주크 조인트를 파국으로 치닫게 레믹을 끌어들이는 이는 메리이며, 뱀파이어를 대거 주크 조인트로 몰려오게 하는 이는 중국계 부부다. 영민한 쿠글러는 그들을 악인으로 그리지 않는다. 절대 악인 KKK단, 백인우월주의자와의 충돌이 영화의 마지막에 강렬하게 처리될 뿐이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왜 그랬을까? 여기에는 흑인 중심적인 시선이 필요하다. 레믹과 메리, 그리고 중국계 부부가 대표하는 그룹은 흑인 사회와 차별의 역사를 겪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동시에 미국 역사에서 흑인 사회와 맺은 미묘하게 부정적인, 또 얄미운 관계도 명확하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인이 미국에서 사회경제적으로 백인 사회에 편입하기 위해 흑인을 더욱 차별해 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처음 KKK단 부부와 함께 찾아오는 것도 상징적이다. 또한 흑인 사회에서 동양인은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흑인 동네에서 장사를 하지만, 지역 사회에 기여는 하지 않는 이들로 종종 그려진다. 더해서, 흑인 혼혈은 상황에 따라 인종을 취사선택한다는 얄미운 존재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영화에서도 메리는 주크 조인트에서 흑인과 어울릴 때는 말투를 바꾸다가, 백인 손님을 데리고 오는 때에는 피부색이 하얀 자기가 낫지 않겠냐면서 밖으로 나간다.

     

    그들은 흑인에게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거나 처단해야 할 대상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심지어 믿을만한 편이거나 끝없이 연대를 원하는 뱀파이어가 된다. 하지만, 결국 그들이 대표하는 그룹이 흑인 중심적인 사회에서 어떤 식의 이면을 만들어가며 의도했든 안 했든 흑인 위에 서려 했는가? 라는 의문을 만들어내는 지점은, 흑인 인종차별과 인권운동 역사의 입체적인 면을 보여준다. 



     


    여기서 더 확장하자면, 2020년대 SNS의 해시태그와 미디어를 타고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불붙었던 BLM(Black Lives Matter) 운동을 향한 흑인 사회 외부의 연대 중 큰 비중이 얼마나 의미 없고 어설픈 허울뿐이었는가? 라는 위험한 질문에도 도달하게 된다. 영화의 종결부에 스모크와 스택의 경고를 무시하고, 선을 넘은 KKK단을 쓸어버리는 것은 스모크다. 만약 흑인 공동체 일원이 살아있었다면, 함께 했으리라는 것에 의심의 여지는 없다. 하지만 메리, 보와 그레이스, 레믹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KKK단을 함께 쓸어버렸을까? 이 차이가 던지는 메시지와 질문은 계속 이야기했듯 도발적이다. 불편하기까지 하다.

     

    [씨너스: 죄인들]을 해석하는 많은 글이 국내에서도 나왔다. 하지만, 이런 흑인 중심적인 시선을 직시한 이가 거의 없다는 것은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결국 라이언 쿠글러는 많은 이들이 불편할 수 있는 가장 흑인 중심적인 시선으로 흑인 공동체와 문화의 폐쇄성을 스스로 강화하며, 그 역사적 성취와 가치를 드높이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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