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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드머 토픽] 명예의 전당: 한국 최초의 랩 & 한국 최초의 랩 앨범
    rhythmer | 2011-04-25 | 16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우리나라 대중음악계는 옛 걸작이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작품을 회자하고 기록하는 것에 너무 인색한 듯하다. 많은 이가 미국과 영국 팝 음악사의 중요한 작품들은 끊임없이 되새김질하고 호평하지만, 우리 음악에는 다소 깐깐한 게 사실이다. 특히 여전히 수많은 편견 속에 있는 랩•힙합 부문에서 이러한 경향은 두드러진다. 힙합 음악에 대해 잘 모르거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평단은 그렇다 쳐도, 장르의 팬이라고 자처하는 이들마저 소홀한 건 매우 씁쓸한 일이다. 심지어 그 가치를 인정받기는커녕, 말도 안 되는 이유로(혹은 무지 때문에) 비판받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한국 최초의 랩’인 홍서범의 “김삿갓”과 ‘한국 최초의 랩 앨범’인 김진표의 [열외]이다.

    그동안 사람들은 누가 한국어 라임을 발전시켰는지, 누가 더 라임을 복잡하고 정교하게 사용하는지, 누구의 플로우가 더 끝내주는지 등은 신나게 떠들어댔지만, 정작 그 시작점에 대해서는 시선을 별로 두지 않았다. 지극히 상업적인 의도로 녹음됐던 슈거힐 갱(Sugarhill Gang)의 “Rapper’s Delight”은 오늘날까지도 '최초로 상업적 히트를 기록한 랩 싱글'로 기록되며 평단과 힙합팬들 사이에서 영광을 누리고 있는데, 한국 대중음악사 최초의 (라임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 위 두 뮤지션의 결과물은 찬밥신세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김삿갓”과 [열외]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몇 자 적어볼까 한다.

    ‘랩’이 한창 가요계를 수놓기 시작하던 1990년대 초•중반 무렵 음악 팬들 사이에서는 어떤 곡이 우리나라 최초의 랩이냐를 두고 심심치 않게 논란이 일어나곤 했다. 그 중심에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 “난 알아요”, 015B의 노래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김건모의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등이 있었다. 당시는 랩이 생소한 때였기 때문에 저마다 기준으로 누가 ‘최초’인가에 대해 핏대를 세워가며 역설했다(그리고 이 논쟁은 항상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가 ‘최초’라고 우기며 끝을 맺곤 했다). 자, 그런데 여기서 많은 이가 잊고 있는 이름이 있다. 바로 지난 1989년 “김삿갓”을 발표한 홍서범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통해 랩이 본격적으로 화두에 오르자, 홍서범은 종종 TV 쇼 프로그램에서 “내가 서태지보다 먼저 했다”를 외치며, 자신이 랩의 원조임을 어필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과 평단은 그의 말을 단순한 우스갯소리로 넘기기 일쑤였다. 아마 지금도 ‘한국 최초의 랩’을 떠올릴 때 홍서범의 “김삿갓”을 심각하게 레이더망에 두는 이들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장난이 아니다. “김삿갓”은 ‘한국 최초의 랩’이자 더 나아가 ‘한국 최초의 힙합 음악’이기까지 하다.

    ‘열 살 전후에 사서삼경 독파 이십세 전에 장원급제 했네 / 이름도 버려 가정도 버려 욕심도 버려 양반 또한 버려 / 한잔하면 시상이 떠올라 두잔 하면 세상이 내 것이라 / 한잔에 시 한 수 또 한잔에 시 한 수 신선의 목소리 무아의 경지로다 / 천재로다 천재로다 김삿갓 김삿갓 삿갓 삿갓 삿갓 삿갓’

    위 노랫말에서 보듯이 홍서범의 1집에 수록됐던 이 곡은 매 구절은 아니지만, 후렴구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각운과 음수율을 이용해 라임과 플로우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최초의 랩이다. 1990년대 후반에 와서야 한국힙합 씬에서 라임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잡히기 시작했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건 정말 대단한 시도이자 성과였다. 게다가 루핑에 충실한 이 곡의 비트는 힙합이라고 하기엔 다소 모호했던 서태지, 015B, 김건모의 곡들과 달리 현재는 우리가 올드 스쿨(Old School)이라고 부르는 1980년대 미국 본토의 힙합 사운드와 작법에 다가서 있다. 음악적으로도 ‘한국 최초의 힙합’이 되는 셈이다.

    *최근 김완선의 “그건 너”에서 그녀의 랩을 최초라고 보는 의견이 나왔는데, 랩과 라임의 관계를 염두에 둔다면, 이는 하나의 해프닝으로 치부할만하다.

    이 앨범이 발표된 게 1997년. 당시를 잠깐 추억해보자. TV에서는 옷만 힙합으로 입은 댄스 그룹 멤버들이 나와서 ‘전 노래를 못해서 랩을 맡았어요.’라는 무개념 망발을 유머라고 떠벌려댔으며, PC통신 동호회를 중심으로 국내에는 생소했던 ‘진짜’ 힙합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느끼고자 하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한 마디로 당시는 아직 언더그라운드 힙합 씬이라는 게 본격적으로 태동하기도 전이었고, 당연히 뮤지션이고 대중이고 마니아고 간에 랩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부족하던 시기였다. 김진표의 [열외]는 바로 그런 순간에 등장했다.

    김진표가 패닉 활동을 할 때에도 랩을 선보이긴 했지만, “달팽이”에서 색소폰을 부는 그의 모습이 더 선명할 음악팬들에게는 본작의 등장이 참으로 뜬금없고 무모한 작품으로 비쳤을 것이다. 14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메이저 기획사에서는 꺼려한다는 ‘랩으로만 이루어진’ 앨범을 당시에 들고 나왔다는 것 자체도 놀랍지만,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가 전곡에서 보여준 라임에 대한 인식이다. 라임이 랩의 필수 요소라는 것을 많은 이가 인지하지 못하던 시절 매 라인의 각운을 철저하게 맞춘 김진표의 랩은 대단한 성과였고, 이것만으로도 본작은 독보적인 위치를 점한다. 그러므로 간혹 오늘날 랩퍼들의 랩과 비교하며 [열외]를 깎아내리는 건 정말 어불성설이다. 한 분야의 선구자에게 이후 진보한 기술을 들이대며 맞짱뜨기를 시키다니, 이 얼마나 가혹한 짓인가?! 본작에 대한 평을 하기 이전에 적어도 앨범이 발표된 그 시기의 가요계와 한국힙합의 현실이 어떠했는가를 아는 게 먼저다.

    한편, 본작의 음악적인 측면을 두고 ‘힙합이다, 아니다.’를 따지기도 하는데, 부정적인 입장의 의견 중 왜 힙합이 아니라고 하는지 타당하게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아마도 당시 미국에서 힙합의 대표적인 작법이었던 컷 & 페이스트(Cut & Paste)와 샘플링에 입각한 음악이 아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이는 다소 억지에 가깝다.

    이상 작품들을 논하는 데 이후 음악적으로 다른 노선을 간 홍서범의 행보와 이지 리스닝 계열의 랩 음악을 하는 김진표의 최근 행보를 끌어들일 필요도 없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은 그 자체로서 값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다시 한 번 확실히 하고자 한다. 홍서범의 “김삿갓”과 김진표의 [열외]는 ‘한국 최초’라는 사실만으로도 한국힙합의 역사, 더 나아가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기록되어 두고두고 회자해야 할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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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도현 (2011-04-28 23:03:51, 180.66.18.***)
      2. 선구자이긴 하죠. 당시에는 나름 즐겁게 들었었고요. ㅎㅎ
      1. Gerome (2011-04-28 22:43:40, 175.193.60.**)
      2. 아 진표형 카레이서로 활동중이지 않나요??
      1. killakim (2011-04-26 15:56:01, 219.252.184.**)
      2. 잘 읽었습니다ㅋㅋ
        홍서범의 김삿갓이 원조 한국 힙합음악이라는 얘기는 몇번 들었었는데 이렇게 또 보니 정말 충분히 당위성이 있는듯 싶네요.
        김진표가 97년에 사랑해그리고생각해를 만든건 정말 대단하고 혁신적이었지만
        그 후로 너무 '심각하게' 발전이 없어서 안타깝습니다
      1. djyd (2011-04-26 12:38:27, 182.210.21.***)
      2. 김건모의 잠못드는밤에서의 랩도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 힙합보다는 레게에 가까운 곡 자체도 훌륭했고요 jp 1집은 정말 선구자의 명반..허나 요즘 사랑노래 싱글로만 내는거 보면..월급셔틀러가 된듯..앨범하나 내주쇼
      1. Gerome (2011-04-26 00:32:45, 175.193.60.**)
      2. 요즘 김진표 랩 못한다고 무조건 까는 글들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죠. 리스너들이 우리나라 음악들도 좀 생각있이 들었으면 합니다.
      1. 외계소년 (2011-04-25 20:50:15, 175.197.17.***)
      2. 공감합니다. 돌이켜 보면 90년대도 새로움의 연속이었죠. 한국의 기록문화가 세계적 유산임에 불구하고 작금의 한국 대중음악의 기록에 대해 소흘히하는게 안타깝습니다. 오늘따라 일권님의 글이 소중한 이유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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